떡 일곱 개와 물고기 두어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보이신 다음에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은 살짝 생뚱맞다. 하지만 이 말씀의 핵심은 표적을 구하는 바리새인의 모습이 아니라 누룩, 곧 외식이다. 사천 명을 먹인 양식이 육신의 양식이 아님을 말씀하신 것임을 알 수 있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정말 많이도 외식을 말씀하셨다. 바리새인의 누룩이란 표현은 그나마 점잖은 표현이다. ‘독사의 자식들’, ‘회 칠한 무덤과 같은 표현은 정말 거칠다. 예수님께선 공생애 내내 유대인들의 외식을 책망하셨다. 그렇다고 이제 그 책망이 끝났는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외식과 다투고 있다.

 

사람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외식을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가식적인 율법 준수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당시의 율법과 오늘날 신앙생활의 규례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당시 유대인의 십일조와 지금의 십일조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근거는 의외다. 그때와 달리 지금의 복음의 <시대>, 예수님의 구속이 유효한 시대라는 게 그 근거다.

 

그러나 이건 착각이고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당시 유대인이나 지금 기독교인이나 십일조를 내는 목적은 같다. 심지어 예배(제사)드리는 목적도 같고,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이유도 같다. 그때나 지금이나 부자가 될 복선을 깔고 십일조를 내고 있고, 벌 받지 않고 평안한 삶을 위해 예배를 드린다. ‘예배 안 드리면 안 된다는 말에 오늘날 신앙인의 외식이 모두 들어있다.

 

그리고 또 성경은 당시 유대인이 아닌 오늘날 사람을 위해 기록되었다. 당시 유대인의 모습이 훗날인 오늘날에도 있을 것이기에 교훈을 위하여 기록되었다. 그런데 성경이 말씀하시는 외식을 당시의 일로 치부하면서 예수님의 구속을 믿는 우리는 그들과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정신 승리일 뿐 아무 효력이나 가치가 없다. 오늘날도 외식의 시대란 의미다.

 

성경을 통해 외식을 말씀하심은 오늘 우리를 위한 교훈

 

예수님은 기적을 구한 바리새인을 두고 누룩을 조심하라고 하셨다. 누룩이란 실체보다 부풀려진 것을 의미한다. 유월절 출애굽 시 누룩 없는 빵을 문설주에 양의 피를 바른 집 안에서 먹으라고 하셨음을 상기하면 그 의미와 이유를 알 수 있다. 구원이란 자기 모습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말씀이다. 구원이 그렇다는 건 복음은 그렇게 시작한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외식은 왜 누룩인지와 오늘날은 어떤 누룩이 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누룩은 사실보다 부풀려진 것, 곧 거짓이다. 또한 회칠한 무덤이란 표현에서 보듯 기만과 속이는 것이다. 아닌 것을 그렇다고 생각하고 주장하고 믿는 것이 누룩이다. 그리고 외식이다.

 

너무 자주 이야기해서 식상할지 모르지만, 오늘날 기독교 신앙이 누룩인 이유는 <노력>이란 말이다.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게 신앙이란 말은 언뜻 참 가상하고 거룩한 것 같다. 하지만 노력은 아직 이르지 못한 상태라는 증거다. 그리스도인 예수님의 형제라는 건 그리스도라는 동일한 본성을 가졌다는 의미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는 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란 말이다. 따라서 구원받고 거듭났다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다. 그런데 구원받았으니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건 그 자체로 기만이고 누룩이다.

 

구원받았으니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게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이자 회칠한 무덤인 증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인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랬더니 제자들은 배에 빵이 하나밖에 없다는 걸 어떻게 아실까 의논했다. 이때 예수님께선 오병이어와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을 상기시키면서 제자들이 깨닫지 못함을 책망하셨다. 오천, 사천 명을 먹이신 양식은 육신의 빵이 아님을 일러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누룩과 오병이어가 어떤 관계기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 이는 예수님의 양식, 곧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하나님의 일을 온전히 행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고,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신 양식이란 뜻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었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 말씀으로 바리새인은 그렇지 않은 존재가 된다. 어떤 것을 정의하면 정의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건 자연스레 심판이다. 무엇이 물인지 정의하면 물 아닌 건 모두 물이란 기준으로 심판을 받은 게 된다. 예수님의 양식, 그리스도의 양식을 정의하면 그것 아닌 것을 양식으로 삼는 사람은 다 심판을 받는다. 예수님의 양식 아닌 걸 자기 양식으로 삼으면 모두 외식이란 의미다.

 

예수님의 양식인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것 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임이 틀림없다.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느냐다. 앞서 설명한 대로 오늘날 신앙인들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을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여기나 그건 무덤에 회칠하는 것일 뿐이다. 노력은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의미, 곧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채워나가고 있다고 말하겠지만 일만 가지 법을 지키다가 단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아무 것도 아니란 말씀을 상기해야 한다. 말씀대로 살려는 노력으로 미치지 못하는 단 하나, 그것만으로 그는 이미 말씀대로 살지 않는 사람이다. 즉 외식하는 바리새인이다.

 

그러나 이건 사람에게 엄청난 도전이다. 어떻게 우리가 성경을 다 지킬까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문제가 구원과 믿음의 본질이다. 이 도전의 답은 하나님 아들은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존재임이 분명하다면 구원받아 하나님 아들이 된 우리 역시 말씀을 온전히 지키는 존재여야 한다는 사실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진정 믿음이 필요한 건 이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막 9:23)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이라 책망한 당시 유대인들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아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오고 가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 그 자체다. 행위의 받침이 없다면 구원을 불안해하는 사람,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바로 누룩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다는 건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 양식인 자기 생명의 본성이란 의미다.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기 때문이다. 즉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다. 말씀대로 사는 게 본성인데 노력할 이유가 없다. 이런 생명의 법이 아닌데 말씀대로 살려 노력하는 그 자체가 바로 바리새인의 누룩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