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7:31-37) 에바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9. 28. 07:47 Writer : 김홍덕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대로 그 딸을 고치신 예수님께서 다시 갈릴리에 이르렀을 때 사람들이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데리고 와서 안수하여 주기를 간구하였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다소 이상한 행동으로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셨다. 안수를 청했는데 따로 데려가서는 양 귀에 손가락을 넣고, 무엇보다 침을 뱉고 그 사람의 혀에 손을 대시고는 하늘을 우러러 ‘에바다’라고 하시며 그를 고치셨다.

 

이 말씀은 앞선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과 연결되어 있다.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에서나 모욕적인 행위인 침을 뱉는 행위로 사람을 치유하신 거나 이방인이란 이유로 개에 빗대는 건 당연히 연결된 사건이다. 따라서 이 말씀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사건과 함께 보는 게 온전한 이해를 돕는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열리다고 하신 건 단지 사람들이 데려온 귀먹고 어눌한 사람만이 아니란 거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이 땅에 와 십자가에 달리셔서 말씀하셨음에도 순종이 무엇인지, 믿음이 무엇인지 들리지 않고, 그 말이 모순되고 어눌한 모든 사람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순종이 무엇인지, 무엇보다 하나님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가 열리기를 원하신다는 말씀이다.

 

구세주가 침을 뱉어 사람을 고친 게 이상한 일인가?

이 사건과 비슷한 일로 예수님께서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만들어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의 눈에 바른 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심으로 고치신 일도 있다. 이런 모습은 사실 평범하지 않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왜 그랬을까?’에 주목한다. 그러나 진정 주목해야 하는 건 예수님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이 누구신가’ 이다. 누군지가 분명하면 행동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들 보기에 때로 엄마가 이해되지 않을지 몰라도 엄마는 항상 아이를 위하는 사람인 것과 같다.

 

침을 뱉는다는 건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모욕을 주는 행위다. 그런 이유로 죽은 자도 살리는 예수님께서 굳이 이런 행동으로 병을 고칠 이유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먼저 들고, 그 생각이 우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분이고, 우리에게 하늘의 뜻이 열리도록 십자가의 제물이 되신 분이라는 걸 먼저 주목하고 있다면 쟁점은 ‘왜 굳이 침을?’이 아니라 ‘그래서 뭐가 열려야 하는 건가?’가 된다.

 

우리는 이 말씀이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과 연결되어 있다는 걸 주목해야 한다. 이 말씀은 수로보니게 여인을 통해 보여준 믿음과 순종이 우리에게 열리기를 바라시는 말씀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개라고 하고 침을 뱉어 사람을 고치는 걸 이상하게 여기며 ‘왜 그랬을까?’ 고민하다 못해 학문으로 연구하는 귀먹고 어눌한 이들에게 순종과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과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가 열리기를 구하시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엄청난 착각 속에서 자신을 속이고 있다. 이를 알 수 있는 게 있다. 바로 ‘예수님 앞에 나는 죽고 주님은 산다’고 곧잘 하는 말이다. 상식적으로 죽은 사람은 어떤 저항, 어떤 자존심, 어떤 모욕도 느낄 수 없다. 내가 진정으로 예수님 앞에 죽은 자와 같다는 걸 인정하고 예수님을 믿는다면 ‘하필이면 침을 뱉어 사람을 고쳐? 더럽게’ 같은 관점은 있을 수 없다.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산다는 말이 진심이라면 침을 뱉어 사람을 고치는 게 이상할 리 없다.

 

정말 나는 죽고 예수님은 산다는 게 진심이라면 예수님이 어떤 방식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고치시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왜 하필 침을 뱉어서…?’가 아니라 나와 예수님과의 관계다. 왜 하필 침을 뱉어 사람을 고치느냐 보다 정말로 이상한 건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까지 나를 살리느냐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을 고치신 일이나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신 일에서 중요한 건 예수님의 표현과 행위 방식이 아니다. 그 이면에 있는 나와 예수님은 어떤 관계인가가 핵심이다. 이 관계 정립이 정말 분명하다면 모욕적이거나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예수님과 나의 올바른 관계 정립, 그게 바로 <큰 믿음>이란 사실이다.

 

 

예수님께서 여신 건 모든 사람의 귀와 입

이 말씀 속 귀먹고 어눌한 사람은 자기 스스로 혼자 고침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사람들이 데리고 왔다. 귀먹고 어눌한 걸 고쳐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이기에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것이다. 이들은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예수님께 질문했듯 이 사건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이 열리기 원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 사건은 ‘왜 하필 침을 뱉어서?’라고 생각하는 사람, 수로보니게 여인의 일을 보고 ‘그래도 그렇지 개라니?’라고 생각하는 모든 이들, 그것이 큰 신학적 비밀이라도 되는 냥 연구하고 어려워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모든 이들에게 큰 믿음이 무엇인지, 올바른 예수님과 자신의 관계가 무엇인지 열리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열려야 하는 것 ‘왜 침을 뱉어서 고친거지?’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예수님 앞에 나의 존재 정체성 그리고  믿음과 순종에 대한 온전한 개념이다. 우리를 구원하는 믿음은 하나님께서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하시든 하나님께서 정한 나와의 관계와 나의 존재 정체성 회복을 위한 것이란 것을 믿는 믿음이다. 

 

이것을 방향성이란 관점에서 보면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를 구하여 성취하는 게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나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로보니게 여인과 귀먹고 어눌한 사람을 고치신 말씀은 이게 믿음이고 온전한 순종이란 게 우리 안에 열리기를 원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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