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 8:1-10) 4,000명을 먹이시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마가복음 Date : 2022. 10. 5. 13:02 Writer : 김홍덕

오병이어와 비슷한 것 같은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사실 제자들을 전도 여행 보내신 일부터 연결된 일이다. 앞선 제자들의 전도 여행, 오병이어,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신 일, 바리새인들과 논쟁 그리고 수로보니게 여인과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일과 에바다까지 하나의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다.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을 그 즈음에라는 말로 연결한 것만 봐도 그 연관성을 알 수 있다.

 

오천 명을 먹이신 오병이어와 사천 명을 먹이신 일은 상당히 유사해 보이지만, 오병이어는 연결된 흐름의 시작을,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은 마무리다. 제자들의 전도 여행으로 회개한 사람, 자기 안에 있던 귀신을 내쫓고 나니 비어버린 심령이 된 사람은 그 자체로 광야에서 굶주린 상태다. 광야에 모인 오천 명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반면에 사천 명은 에바다 이후에 모인 사람들이다. 귀와 입이 열린 사람들이란 의미다. 이들은 오천 명과 달리 사흘 밤낮을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말씀의 본질이 열리지 않고선 함께 할 수 없는 시간과 열정이다.

 

오천 명은 심령이 공허한 사람들
사천 명은 귀와 입이 열린 사람들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도 다르다. 오천 명이 굶주렸을 때 예수님은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시니 제자들이 이 광야에서 어떻게 먹을 것을 구합니까? 이들을 먹이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합니다.’고 했다. 반면 귀와 입이 열린 사천 명의 때엔 너희가 가진 떡(양식)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으니 떡이 7개 있다고 했다. 다들 알고 있듯 성경 속 숫자 7은 완전수다. 제자들 안에 온전한 양식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도 틀리지 않는다.

 

제자들의 전도 여행으로 회개한 오천 명은 마음을 비워낸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귀신 내쫓는 권세 앞에 회개했다는 건 귀신이 떠났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목적 아닌데 인생의 목적과 성공인양 좇던 많은 것들을 비워낸 게 회개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전도로 회개했다는 건 이때까지 자기가 신앙하던 것에서 돌아섰다는 의미다. 공허한 광야에 모인 오천 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때까지 인생을 채우고 있던 것을 비워낸 공허로 인한 굶주린 우리의 모습이다. 신앙이 시작될 때 모습이라 할 수 있다.

 

공허한 광야에 모인 오천 명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때까지 인생을 채우고 있던 것을 비워낸 공허로 인한 굶주린 우리의 모습

 

반면에 사천 명은 성격이 좀 다르다. 사천 명은 에바다, 곧 열린 사람들이다. 무엇이 큰 믿음인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하나님과 나는 어떤 관계인지가 열린 사람들이다. 이게 열리지 않았는데 사흘 밤낮을 먹지도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을 리는 없다. 인생의 목적이 예수님의 말씀에 있지 않은데 그럴 수는 없다. 그리고 ‘3’이라면 하나님의 숫자다. 달력으로 3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한 시간을 거쳐내었다는 의미다.

 

사천 명을 먹이실 때는 먹을 게 있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떡이 일곱 개(물고기 두어 마리 포함) 있다고 지체 없이 제자들이 답한다. 이 광야에는 먹을 게 없고 음식을 사려면 이백 데나리온은 있어야 할 것이라 답한 오병이어 때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그 사이에 제자들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을 보았고, 죽은 자를 살리는 것을 보았다. 자기 안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하늘 양식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사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고 예수님은 이런 놀라운 능력의 주로 믿고 자기 육신의 문제를 의지하면 해결된다고 기대하고 믿는 사람이 되면 안 된다. 그건 거듭난 게 아니다. 더 심각한 건 예수님이 사회적 민생 문제 해결에 관심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걸 한시라도 잊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육신이나 육신이 속한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다. 그런 건 육신 가진 인생의 목적을 알면 절로 해결된다.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면 다 해결될 문제다.

 

오병이어를 육신의 민생 문제를 해결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기적으로 보면 안 된다.

 

오천 명 때나 사천 명 때나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육신의 양식 문제가 아니라 하늘 양식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이것은 바리새인의 누룩을 말씀하실 때 더 분명해진다. 그리고 하늘 양식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것, 곧 그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육신의 양식은 육신 안으로 넣는 것이나, 하늘 양식은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요4:34)

 

우리가 간과하거나 오해하면 안 되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우리는 그리스도로 거듭나야 하는 사람, 거듭난 사람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온전히 이루는 것이 양식이라면 우리도 그래야 한다. 예수님처럼 되라고 만든 존재가 사람이고, 그 사람이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 보여주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할 뿐이지 예수님처럼 될 수 있나?’라는 말이 얼마나 무식하고 어리석은 말인지 알 수 있다.

 

오병이어와 사천 명을 먹이신 건 육신의 양식이 아니라 하늘의 양식이며, 하늘의 양식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며 일을 이루는 삶게 하는 양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