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을 청결하게 하신 일이 있고 난 다음 날에 보니 저주하신 무화과가 정말로 말라 있었다. 이를 베드로가 언급하자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말씀하신다. 바로 전날 성전에서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소굴로 만들고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었다고 하신 예수님이다.

 

예수님은 무화과를 저주한 일이 기도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이 구했고 이루어졌다. 반면 성전에 가니 기도는 하지 않고 장사를 하고 있었다. 유월절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무화과나무잎처럼 많고,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분주할 뿐 아니라 정성을 다하는 것 같았지만, 열매, 곧 하나님이 사람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의 양식은 없었다. 무성한 잎처럼 제사의 형식만 풍성하고 정작 본질은 사라졌다.

 

예수님은 믿고 구하면 산도 옮길 수 있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믿고 구하면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고도 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물론 성경에 산이 바다로 옮겨진 일은 없다. 그런 논쟁은 차치하더라도 일상에서 사람의 기도가 예수님 말씀처럼 마냥 이루어지지 않는다. 좋은 대학 입시에 임하는 기도하는 기독교인들의 수가 분명 입학정원보단 많다. 기도한다고 다 되는 게 아니다.

 

이건 괜한 침소봉대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에 인생은 물론 영원한 내세를 의지한 사람이라면 이런 모순이나 괴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건 심각한 문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자기 구원과 인생의 보살핌과 영원한 내세의 삶까지 모두 의지하는 믿음에 의문을 그냥 방관한다는 건 믿음이 없는 게 아니라 인생을 외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수도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흠이 없으신 예수님의 말씀이, 기도하면 이미 이루어진 것이라 하셨다. 이 말씀을 믿든지 아니면 자신에겐 이루어지지 않는, 자신은 믿음이 없고 구원도 없다고 시인하든지 할 일이다. 그 사이 어디쯤 구원이 있을 것이란 막연한 기대로 인생을 살 수는 없다. 그럴 바엔 그냥 세상의 쾌락을 즐기는 게 나을지 모른다. 어차피 자신이 가진 믿음은 예수님의 말씀대로 되지 않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말씀대로 되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데 예수님의 구원이 있다고 믿는 건 웃기는 일이다.

 

예수님의 기도는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 사람에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 이것이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도다. 나무에 기대하는 건 열매지 풍성한 잎이 아니듯 육신이란 형식을 가진 사람에게 구하시는 건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생명의 본성이 되는 것이지 본성을 가진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모습만 흉내 내는 형식과 외식이 아니다. 유월절의 의미가 본성이 되기를 원하시지 요란한 유월절의 격식 준수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본질이 아니다.

 

같은 맥락에서 성경을 지키려는 노력으로써 도덕적인 품새나 경한 모양새로 예배에 참석하는 게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말씀이 본성이 되어 오히려 어기고 살려고 노력해도 되지 않는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이다. 기도하면 다 이루어진다는 말씀을 듣고 육신의 복락과 세상의 일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기를 한껏 기도했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더 많음에도 다음에는 이루어주실 것이라 믿는 건 믿음이 아니라 도그마(독단적인 신앙이나 학설)일 뿐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믿음은 육의 일이 아니다. 육의 일이 믿음과 기도로 다 이루어지는 게 하나님의 계획이라면 최소한 육신이 죽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세월과 함께 약해지는 전형적인 소비재의 모습인 육신은 우리의 본질이 아니다. 당연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기도나 믿음 역시 육신의 일에 대한 게 아니라 하늘의 뜻, 하나님의 의와 뜻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땅, 곧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 이를 두고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기도하면 이미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 하늘의 뜻이 자신 생명이 되길 기도하는 건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하늘의 뜻을 구한다는 건, 이미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인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무엇이 있어야 자신이 온전해지는지를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죄(이것을 모르는 상태)를 시인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씀의 원리도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