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성전을 정리하신 일은 오병이어처럼 모든 복음서에 기록된 유명한 말씀이다. 그리고 잎만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사건의 중간에 있다. 잎 곧 성경을 지키려는 행위만 풍성한 신앙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여기시는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의 양식이 되지 않을 것이라 말씀하신 다음 사건이란 걸 주목해야 한다.

 

당시 성전 상황은 일면 이해되는 부분이 있긴 하다. 유월절에는 번제를 드려야 하고, 제사엔 제물을 바쳐야 하지만 멀리서 오는 사람은 가지고 오기 힘들기에 성전에 와서 제물을 사는 상황이었다. 일면 합리적인 일이고 어떻게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장사하는 이들의 상과 앉은 의자를 엎어 버렸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인데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고 화를 내었다. 제물을 사고파는 걸 강도의 일이라고 하신 것이다. 요한복음에서는 기도하는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황폐시켰다는 의미다.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우리가 잘 아는 주기도문이다. 이 주기도문에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건 없다. 있다면 그건 하늘의 뜻이 이루어지는 땅이다. 하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순종하는 사람이 되게 해 달라 기도하라고 하신 것이다.

 

주기도문은 하나님의 말씀이 내 삶을 지배하도록 나를 허용 곧 순종하는 게 기도임을 말씀한다. 사람은 땅의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땅은 하늘의 변화에 종속되어 순종하듯 기도는 하나님의 의가 내 삶의 본질이 되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기도는 Give and Take가 아니다. 그러나 사람은 나는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하나님께 드리고 육신의 복락을 구한다. 모든 종교인의 기도가 이렇다.

 

오늘날 종교인들의 기도 역시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에게 하신 책망의 대상이다.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드리고 육신의 복락을 얻으려는 기도는 강도질과 같다. 강도는 자기 것은 주는 건 없이 상대의 것을 빼앗으려는 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건 드리지 않고 원하지 않는 걸 내놓고 자기는 원하는 걸 가지려 하니 강도다. 그리고 하나님과 거래를 시도하니 장사다.

 

이런 이유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일 사이에 이 말씀이 있다. 유대인의 나무 무화과를 통해 하나님이 원하는 그리스도란 열매 없이 율법적 행위의 풍성함만 내놓는 유대인의 신앙을 저주하신 것과 같은 맥락에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강도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성경을 지키는 노력으로 육신의 복락을 얻으려는 오늘날 기도 역시 예수님 책망의 대상이다.

 

열매, 곧 그리스도의 생명 없이 구하는 건 역시 열매 아닌 형식이다. 그리스도의 생명 없이 기도하니 육신의 일을 구한다. 이런 신앙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언제나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메시아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육신도 구하지 못한 그리스도다.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으면 육신의 일을 구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 역시 육신의 일이고, 기도도 육신의 행위를 드려 육신의 복락을 구한다. 이런 신앙을 가지고 가난한 자는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란 말씀을 들으면 오히려 가룟 유다처럼 배반하는 게 솔직하다.

 

하지만 당시의 바리새인들과 제사장들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날 기독교인 역시 그렇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세상 법으로 더 이상 낮고 천할 수 없는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 세상의 성공을 구하면 예수님을 조롱하면서 자신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받았다고 떠든다. 이런 강도가 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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