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는 우리가 아는 대로 지금의 포경수술이다. 그 포경수술과 같은 할례가 종교적으로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나 유대인들에게 이것은 선민사상의 증표이기도 하다. 즉 유대인은 하나님이 택한 민족이라는 선민사상의 증거이고 그것만으로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하는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 신앙 안에서는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던 것이기도 했다.


할례라는 것은 남자의 생식기 끝에 있는 표피를 잘라내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도무지 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기에 그 옛날에 돌칼로 찢어내듯 잘라내면서 까지 그렇게 해야만 했다는 것인가? 그것은 껍질에 대하여는 버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낳을 때에는 할례를 행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러나 이삭은 할례를 행한 이후에 얻은 아들이었다. 사실은 아내가 정부인인 사라냐 아니냐 보다 이것이 더 중요한 기준이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형식이 벗겨져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자 하셔서 그런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생명을 얻는데, 그 생명이 껍질이 벗겨진 신앙으로 얻은 아들이라야 진정한 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는 세상은 항상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형식에 의미와 의를 두고 그것이 있어야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신앙에서 벗어나야만 진정한 신앙이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나님께서 할례를 행하라고 하신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런 내용은 버리고 형식을 벗어 버리라고 주신 법을 오히려 형식으로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항상 그들의 신앙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책망을 받은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골로새 교회에서도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더 큰 의미는 바로 신앙에 있어서 형식을 벗어 버려야 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심청전의 의미가 효에 있지, 심청이 에게 있는 것이 아니듯이…… 하지만 그렇다고 육신이라는 형식을 벗어 버리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여기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다.


이는 형식을 벗어 버리라는 것은 내용이 표현되어야 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안되는데 이삭은 되는 것은 형식이 벗겨진 가운데 표현된 아들이기 때문이다. 즉 형식이라는 것이 무작정 버려야 좋은 신앙이 되기 떄문에 할례를 행하게 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형식이 아닌 내용으로 표현되는 법이 하나님의 뜻임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할례의 의미인 것이다.


지금 이 골로새 교회의 문제는 세상의 것, 즉 철학이나 기타 여러 가지 사상들이 신앙과 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제를 안고 있기에, 그러한 학식과 철학은 다 하나님의 표현방식인 형식에 관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가질수록 신앙이 좋다고 여기는 문제를 안고 있기 때문에 할례의 의미를 다시 말하면서, 껍데기와 같고 형식에 속한 것을 버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한 육신으로 할례가 아니라 할례의 의미를 아는 것이 진정한 할례, 곧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비뇨기과 의사가 되어 할례를 행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이신 그리스도라는 성품을 표현하고 설명하기 위하여 만드신 형식이라는 것이기에 그것에 어떤 가치나 의미를 부여할 것이 아니라 온전한 내용을 알아가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그것이 진정한 그리스도의 할례라는 것이며, 그 진정한 내용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라(롬 2:2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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