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알게 된다는 말씀대로라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지혜인 사람의 존재의 목적이자 삶의 의미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것과 삶의 목적을 안다는 건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 거듭났다고 믿는 기독교인들은 세상에서 이기고 성공하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또한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을 신령한 사람과 육에 속한 사람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바울 사도 역시 하나님의 지혜를 안다는 건 곧 신령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의 지혜는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있으니 당연한 말씀이다.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이 곧 신령한 사람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신령한 사람은 신비롭고 초인적이며 남다른 초월적 도덕성과 종교성을 가진 사람이다. 심지어 자신이 그리스도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이건 사실 상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지만 신앙 가치관을 지배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말씀에 따르면 성령을 인하여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신령한 사람이지만 거듭났다면서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누가, 어떤 사람이 신령한 사람인지는 매우 중요하다. 신령한 사람이 아니라면 육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육에 속했다는 건 곧 사망이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는 대로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자신이 곧 신령한 사람이란 믿음이 자기 안에 부인할 수 없는 지경이 아니라면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다.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롬 8:5-6)

 

신령(神靈)하다는 건 신의 영이 함께 혹은 지배한다는 의미다. 따라서 신령함의 성격은 곧 신의 성격이다. 어떤 신을 믿는지에 따라 신령함이 달라진다. 신비하고 기적적인 능력을 행사하는 신의 신령함은 기적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있어 신령함은 신비한 기적과 일을 행하는 사람이다.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는 건 말 그대로 행위다. 신의 정체성, 곧 의로움의 기준이 행위에 있다는 의미다.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신은 어떤 행위는 기뻐하고 어떤 행위는 노여워한다. 성경에 나오는 바알과 아세라가 대표적이다. 문제는 오늘날 아니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믿어 온 하나님의 정체성도 이랬다. 자신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지만, 주일날 짜장면 먹으면 안 된다(벌을 받는다)는 사고가 어떤 하나님을 믿는지 설명한다.

 

그러나 더 큰 쟁점이 있는데 그건 의롭게 행하려는 목적이다. 어떤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노력하는 목적은 하나님의 기쁨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쁨이 나에게 가져올 이익 곧 육신의 복이다.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목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어 육신의 이익을 얻으려 한다. 육에 속한 육의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신령한 사람은 육신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 신령한 사람에게 육신은 복을 받고 평안을 누려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성령으로 잉태된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도구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가 된 육신은 말씀을 표현하는 형상이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 창조된 사람 본연으로 살아간다. 이게 신령한 사람이다.

 

바울 사도가 말씀한 신령한 사람은 이처럼 성령으로 잉태되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이 육신과 함께 한 존재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의 본질이 이것이다.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 이렇게 살 수밖에 없어야 한다. 이게 성경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신령함을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적적인 능력으로 생각하며 살아서는 안 된다. 신령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는 건 어리석다. 생명은 날 때 온전한데 그리스도로 거듭났다면서 노력한다는 건 완전한 모순이다.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 역시 신령함이 아니라 육신의 일이다. 이런 육신의 일은 또한 세상의 가치 기준에서 비롯된다. 바울 사도가 세상 지식에 의지하는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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