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미련하게 여기는 십자가의 도만 자랑하고 전한다고 했지만 바울 사도도 처음부터 그것만으로 될지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지만, 세상 지혜가 권하는 말이 아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전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모든 것을 성령이 보이셨다고 말씀하고 있다. (고전 2:10)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두려워하며 심히 떨었노라(고전 2:3)

 

그러나 고린도 교회나 오늘날 교회의 설교는 그렇지 않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성공한 사람을 인용하여 복음을 전한다. 하나님과 성령의 능력이 세상의 성공을 목적으로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지혜는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에 관한 지혜다. 따라서 이런 설교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모두 세상 지혜가 권하는 말로 복음을 전하고 듣는 사람이다.

 

이같이 세상 지혜가 권하는 설교를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은 십자가의 도와 반대로 가는 사람이다. 십자가는 어느 모로 보나 세상에서 실패한 자리다. 그것도 가장 실패한 자리다.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전하는데 이기고 높이 올라가는 법의 세상 지혜, 사람의 지혜를 인용하고 의지한다는 건 모든 게 잘못된 것이다.

 

세상에 있는 지혜와 여러 일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에 있는 일이다. 따라서 그 어느 것도 하나님의 의를 벗어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대로만 전하면 된다는 의미다. 그런데 세상의 지혜,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과 그의 일들을 성령과 성경의 증거로 설교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전하는 이들에게 성령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설교를 듣는다. 또 많은 설교들이 있어 자연스레 비교도 된다. 이런저런 이유로 설교는 화려해졌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날로 발전하고 있다는 의미다. 더 많은 책을 읽고, 더 아름답고 화려한 말로 설교를 준비한다. 그러나 이들이 망각한 게 있다. 설교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이란 거다.

 

예수님의 말씀은 공부할 이유가 없다. 성령만 오시면 모두 알게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성령이 오시면 모든 걸 알게 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달리 성경을 공부하는 신학을 만들고, 성경 말씀 성취를 증명하기 위해 세상의 일을 인용한다는 건 모순이다. 바보 거나 사기꾼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 중반 이후 성령의 능력이자 정체성을 전한다. 그 핵심은 성령은 모든 것을 통달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여기엔 성령의 능력을 본질적으로 언급한다. 주목할 것은 성령의 능력은 곧 기적이란 일반적 인식과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바울 사도의 관점은 고린도전서 전반에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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