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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빌레몬서에 나오는 내용은 21세기를 사는 사람들에게는 실감이 나지 않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 내용이 감동적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나의 이야기로 받아들여 지기에는 체감 온도가 많이 다르다는 점을 간과할 수는 없다. 물론 이 말씀을 통하여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중보가 자신의 이야기로 들리기만 한다면 체감 온도와는 무관하게 너무나 은혜로운 말씀으로 느껴지겠지만 말이다.

 

이 시대는 지중해 연안은 로마가 다 점령하고 있었던 시대이고, 그 시대의 종은 주인이 아무 이유 없이 죽여도 큰 일이 아니었고, 주인의 유희를 위하여 종들은 어떤 형태의 성적인 수치도 감당해야 했고, 노예를 사고 팔 때는 남자든 여자든 벌거벗겨진 상태로 거래가 이루어지기도 하던 시대이다. 그런 시대의 종이 주인의 재물을 훔쳐서 달아났다가 이렇게 사람들에게 노출되었다면 그것은 뭐 재론의 여지 없이 죽은 목숨이라고 봐야 하는 것이다.

 

 

그렇듯 죽은 것이나 다름 없는 오네시모가 당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울에게 형제라 칭함을 받고, 또 자기가 배신한 주인인 빌레몬이 다시 자기를 받아 주고, 그러한 과정에서 바울이 죽어도 아무 문제 없는 오네시모를 위하여 빌레몬에게 손해를 갚아 주겠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감동 스토리가 아니다. 이것은 진정한 기적 중의 기적이고 진정한 복음의 능력이며, 우리가 육신 가운데 거하며 살아가는 것이 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가를 너무나 은혜롭게 설명하는 모습인 것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육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인지를 볼 수 있다. 이 육신의 삶 안에서 보면 지금 이 오네시모를 대해가는 빌레몬과 바울의 모습은 정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신분의 차이가 없는 지금 세상도 돈 떼어 먹고 달아난 사람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남다르고 분노하는 것이 일상인데, 그 옛날에 종이 돈을 들고 달아났는데 그것을 용서한다는 것은 진정으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왜 그것이 기적인가? 지금을 사는 사람들도 오네시모의 일을 보면 체감 온도는 낮아도 적어도 ‘대단하다’는 느낌을 가지게 하는 것은 왜 그런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사실 하나님은 굳이 사람이 아니라도 그러한 기적을 일으키시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으신 분이시다. 하나님께는 천하에 둘도 없는 원수라도 상관없다. 그것을 용서하고 말고 하실 분도 아니시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는 그러한 마음이 있으신데, 그것을 표현해줄 존재가 필요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하기 어려운 일들이 있다. 그것은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세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육신이 어떠한 것을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고, 그것에 메여서 구속 받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지금의 모든 사람들은 돈이라는 것 앞에 다 메여 있다. 돈이 악하거나 유익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사회 안에 있다는 것 만으로도 돈에 대하여 구속 받은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이 돈에 메이게 된 것은 사람들이 돈에 가치를 부여했기 때문인 것이다.

 

즉 사람의 가치가 돈에 있지 않은데, 자신의 모든 수고와 성과를 대변하는 대명사가 바로 돈이기 때문에 그 돈이라는 것이 자기의 모은 노력을 표현하고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세계이다 보니 돈이라는 것 자체의 의미 이상으로 자신의 삶을 그것에 투영시키고 그것에서 의미를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돈에 구속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돈은 또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를 너무 이젠 필수 중의 필수항목이기에 그것을 배척하고는 살 수 없다. 이는 마치 우리가 육신을 벗어나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돈이라는 것이 내 삶의 성과를 대변하는 것이라는 것에 매여서 그것에 집착한다는 것은 삶의 목적이 자신의 삶의 성과 달성에 두고 있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사람들이 돈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자신이 의미를 부여했기 때문인 것이다.

 

이는 마치 오네시모가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자기가 의미를 부여하고 종이라는 자리를 스스로 떠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스스로 자기의 삶에 가치를 부여하는 자리에 이른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현상인 것이다. 그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던 명분과 같은 것이고, 오네시모가 빌레몬을 떠난 명분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지으신 이에게 의미 부여를 맡기게 된다면 스스로 삶에 의미를 부여한 사람들과 같이 육신에 거한다는 것은 동일하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돈도 마찬가지다. 돈이라는 것이 사회 안에서 절대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그것에 나의 삶의 성과가 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돈은 사회를 살아가는 하나의 도구와 방법으로 알게 되면 돈을 쓰는 용도가 달라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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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고 버리고 가벼워 진다는 것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3. 4. 18. 16:30 Writer : 김홍덕

서점에서 책을 보거나 뭐랄까? 교훈을 주는 말들 중에서 마음을 비운다고 하는 것이나 버린다고 하는 것, 또 낮아진다고 하는 것이 있다. 특히나 신앙 안에서는 낮아지고 버리고 비우는 것에 대하여 많이들 이야기 한다. 그건 아주 좋은 일이고 또 그렇게 된다면 훌륭한 사람이 되겠지만 문제는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에 있다.

 

물건을 찾느라 집을 뒤지는 때가 가끔 있는데, 그런 순간들을 잘 생각해보면, 그 때 하는 생각들이 있다. ‘이게 여기 있네?’, ‘이젠 이런 것 필요 없는데……’, ‘이런 것은 진작에 버렸어야 하는데……’ 같은 생각들을 하기 마련이다. 그러면서 결론은 ‘언제 한번 싹 정리해야지!’하고 생각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또 같은 것을 찾느라 같은 곳을 뒤지고, 찾는 물건은 다른 곳에서 발견되고, 그러다 찾지 못하면 새로 사고, 사고 나서 얼마 있지 않아 또 무엇을 찾다 보면, 예전 것도, 새로 산 것도 다 있기도 한 그런 경우가 많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비운다는 것은 참 어렵다. 처음부터 잘 정리되고 규모 있게 살면 가지는 규모가 작아질 것이고, 그러면 굳이 버리고 비울 이유가 없을 텐데 그러지 못하는 것이 삶의 한 단면인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버리고 비운다는 것은 이미 무엇을 가졌을 때 하는 생각이 아닐까 하는 궤변 같은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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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삶을 많이 가볍게 해 가고 있다. 일이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조만간 이사할 일이 생기게 되면 아주 작은 집을 구해서 가 볼까 생각도 하는 중이다. 그러려면 아마 적지 않은 살림을 정리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선 내가 가지고 있는 컴퓨터들만 해도 문제가 될 것이다. 그렇게 삶을 가볍게 하는 일이라는 것은 불요한 것들을 하나씩 버리고 처분하는 일이 다반사인데, 그러는 중에 돌아보니, ‘참 불요한 것 많이도 가졌구나!’ 하는 생각과, 더 나아가서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는 어디일까?’ 생각해 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가 마음을 비우고 삶을 가볍게 하기 위하여 버리는 것은 그렇게 하고 싶다고 해서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우리가 삶을 가볍게 하고, 마음을 비우기 위해서는 역설적으로 가져야 할 이유가 없어져야 하는 것이다. 내 마음에 불요한 것을 가지려 하는 이유가 버려지지 않은 채로 아무리 무엇을 버린다고 해도, 그것은 물건을 찾지 못해서 다시 사는 반복과 같이, 이내 또 채워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려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한마디로 목적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서 어떤 것을 가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부담스럽지도 않고 거추장스럽지도 않고 오래 쳐 박아둘 이유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삶에서 버려야 할 것이 보일 때는 어떤 지난 날 나의 목적을 비추어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어떤 것은 온전히 목적 아래 수명을 다해서 버려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그때는 그 목적을 잘 이루어낸 삶을 얻었을 것이고, 그렇지 못한 날은 온전치 못한 목적에 대한 교훈을 얻을지도 모른다.

 

또 우리가 목적이라 여기는 것도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내가 어떤 것을 가지고, 구입하고, 만들고 한다면 그것은 큰 빚을 내어서 그렇게 한다 해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나의 삶을 돌아보니 뭐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아서 많이 돌아보고 이렇게 마음을 기록해 둔다. 불분명한 목적 아래 내 삶에 들어온 생각과 물건들, 그 뿌리는 굳이 찾아보지 않아도 다 세상의 것이라 그럴 것이다. 요한 사도께서 그러셨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때문이라고….

 

생각해보면 그 말 참 진실되다/ 마음에서 생각을 버릴 때와 삶을 가볍게 할 때, 그 버리는 대상보다, 내가 그것을 가졌던 이유를 생각해보면 다 요한 사도의 교훈 아래 있는 것이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데 세상 사람들의 이목 때문에 필요 이상을 가지고 있다 버리는 것이다. 그게 돌이켜야 할 마음이다. 그러하기에, 버리고 비우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안에 가져야 할 어떤 이유가 있는지? 그리고 그 이유의 목적은 분명한지, 그것이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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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레몬서) 중보자 예수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빌레몬서 Date : 2013. 4. 18. 13:43 Writer : 김홍덕

성경에서는 Mesites라는 헬라어가 6회 정도 사용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통과하다’, 혹은 ‘서로 다투는 것을 화해시키다’라는 의미에 가깝다고 한다. 반면에 우리는 보통 중보자 예수, 또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셨다고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뭔가를 대신해 주는 의미로 인지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단어의 의미를 혼용한 문제만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에 대하여 아무런 생각 없이 “우리를 대신해서 ……”라고 하기 때문이다. 사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대신 했다고 보는 것 보다, 우리의 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다. 아니 그 보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자 한 것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모습이 그런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행위와 생각과 신분으로서 인정 받으려 한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될 때,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단절이 연결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드신 목적에 대하여 우리가 대응하고 순종할 마음이 생겼기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고리가 생기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중보인 것이다. 이는 마치 고장 난 자동차는 주인이 타고 다니겠다는 목적이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이기에 주인과 자동차의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자동차가 수리가 되면 자동차와 그 주인이 다시 연결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지금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는 바울 역시, 비리레몬에게 오네시모가 입힌 손해를 갚아주는 그런 중보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의미가 있고, 그것이 바울의 본심이고 목적인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이렇게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직 복음의 능력을 인함인 것이기에 이 중보는 참으로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이야기 하지만, 지금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바울이 빌레몬에게 편지를 보내는 시대의 상황은 익숙하거나 피부에 와 닿는 그런 상황은 아니다. 지금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바울이 의도한 바와 같이 그 관계가 회복된다는 것은, 단순히 도적질한 무례한 종을 용서하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신앙 안에서 보여 줄 수 있는 복음의 위대한 능력이요,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하늘의 뜻이고, 이것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기적인 것이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하고 또한 오네시모가 다시 빌레몬에게 돌아 간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있는 모든 육신적인 관계와 신분과 과거와 이해관계와 기억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이는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말씀이시기도 한 것이고, 그것이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신 뜻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세상에서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신분과 능력과 재물과 예의와 도덕과 같은 것들이 있을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것에서 지나서 그런 것이 바로 구원의 증표라고 생각하거나, 또한 그런 것을 기준으로 교회 안에서 인정하고 인정 받는 모든 생각과 관계 안에서는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납할 수도 없고, 오네시모 또한 빌레몬에게 돌아갈 수 없으며, 바울 역시 그렇게 중보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너와 나 서로가 사람이라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기준으로 만나는 어떤 관계도 온전한 관계가 아니라, 그 연결 고리가 세상에서 온 것에 기반을 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울과 빌레몬 그리고 오네시모 안에는 그러한 것이 없었기 때문에 범죄한 오네시모를 바울이 그 주인에게 돌려 보낼 수 있고, 모두가 그것을 수용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예의와 사회적인 규례를 따른다면 오네시모는 죽을 것이나, 그렇지 않고, 돌아가서 다시 주인과 종으로서 살아가는 것에 관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보내고 가고 받아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이유가 이 모두들에게 세상에서 온 것이 서로의 관계 안에서 기준이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관계를 이루는 각 개인의 신앙이라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 가시관을 쓰고 발가벗겨져서 손과 발에 목 박혀 죽으심으로 세상의 어떤 사상이나 신분이나 공로로 수고하여 하나님께 이르려는 마음, 하나님이 죄로 여기시는 그 마음의 어느 것 하나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에서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와 같은 기적과 같은 관계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며, 이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모일 때 진정한 공동체가 되고, 또한 이것이 바로 가장 위대한 기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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