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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고난에 대하여 두 가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애매히 고난 받는 것’ 또 하나는 ‘자기 죄로 인하여 매 맞는 것’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사람이 겪는 곤고함은 이 두 가지 외에는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애매히 고난 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고, 자기 죄로 인하여 매 맞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기준으로 보면 세상에는 이 두 종류의 사람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육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신을 가졌기에 인생입니다. 이 육신에 대한 관점 역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육신을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과 도구와 형식으로 아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위하여 육신을 던지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목적을 위하여 자신을 소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지은 목적을 위하여 인생을 소비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입니다.
또 하나는 육신을 인생의 본질로 보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육신의 평안과 행복과 성공이 인생의 모든 척도입니다. 그래서 육신이 평안하고 성공하면 복된 삶이라고 여기며 심지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와 교회가 이 가치관 아래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내용은 없고 형식에 매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육신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특히 육신을 인생의 본질로 아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육신이 더 평안할까 염려하므로 인생이 곤고하고, 때로는 내일 더 평안할 것이라는 헛된 꿈을 가지고 오늘 죽자고 고생하면서 ‘이 고생 끝나면 행복한 날이 올 것’이라 믿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어떤 것도 자기 존재의 목적을 벗어나서 행복하고 만족할 수는 없습니다. 육신을 인생의 본질로 보는 자리 곧 하나님이 죄로 여기시는 자리에 있는 사람은 내일이 되나 천년이 지나나 항상 자기 죄로 인하여 인생이 곤고한 매를 늘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애매히 고난을 받는 사람들은 진정한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을 살고 있는데 오히려 세상의 의와 자기 선악의 기준에 따라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앞에서 죄인과 같이 그들의 의를 인하여 종과 같이 수고하고 죄인이 되는 고난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세상의 본질을 형식으로 알고서 자기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오히려 종과 같이 사는 고난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의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오묘함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의 목적을 우리의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게 하셨는데 그 의가 바로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이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육신을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도구로 쓰려고 보니 그 의가 바로 세상의 의를 가진 사람들 앞에서 그 육신으로 수고하고 섬기는 것이더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육신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시니 밑에 있던 백부장이 ‘저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로다!’라고 고백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육신을 가진 존재로 지으신 것이 이 육신으로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주장을 좇아 종과 같이 섬기면 그 수고하는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인생을 지은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모습은 세상의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기 짝이 없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흠모할 것이 없고 건축자는 버리는 돌과 같은 모양이기도 합니다. 세상은 누구라도 작은 의 하나만 알아도 그것을 주장하고 그것을 가르치고 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외치는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세상에서 자기 아버지가 주인인 세상에서 그 주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의 주장을 따라 종과 같이 수고하고 섬기더라는 것입니다. 그 꼴을 보니 조롱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렇게 자기 의를 좆아서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그렇게 조롱하던 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요 인생의 목적을 알게 하신 메시아라는 것을 알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 왔다거나,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을 책망하듯 훈계하거나 가르치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의 말과 같이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 만든 세상에서 오히려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산다는 것이 얼마나 수고스럽고 애매한 것이겠습니까? 그러나 바로 그것이 우리의 존재 목적이고 우리에게 육신 가진 인생을 부여하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성품을 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도 사랑이 자기희생이라는 정도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고난이 즐겁고 아름다운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육신을 가지고 고생하는데 그게 즐거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의 행위로 인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인데 그것이 즐겁고 아름답고 선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 문제의 핵심은 애매한 고난을 누가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목을 가지고 보느냐 아니면 사람의 안목을 가지고 보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애매한 고난을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보면 조롱거리기도 할 뿐 아니라 세부적으로 가면 ‘그것이 즐거운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합니다. 육신이 고통 받는 것이 핵심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핵심으로 보인다는 것은 육신을 인생의 본질로 보는 시각을 인함인 것입니다. 육신이 본질이라고 보는 한 육신의 수고가 괴롭고 회피할 것으로만 보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동차의 엔진 이야기를 다시 해 보겠습니다. 엔진은 그 안에서 폭발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높은 온도를 견뎌야 합니다. 이것을 보면서 ‘엔진이 즐겁겠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동차 엔진은 시동 걸지 않고 두면 고장이 난다고 말하며, 그런 폭발과 온도가 나오지 않으면 죽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땐 엔진이 아니라 그냥 고철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엔진의 목적이 바로 폭발을 일으켜서 자동차 주인이 원하는 이동의 에너지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엔진은 가만히 있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운행을 하는 것이 더 즐거운 것입니다. 주인이 볼 때 그것이 더 아름답고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주인의 목적 아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과 그 육신을 가진 인생 역시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을 위하여 육신이 수고하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그런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이 세상 지으신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어 주인과 같으나 오히려 종과 같이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알 수 있도록 자기 육신의 수고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수고와 고난은 어떤 생명의 눈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것이 즐겁고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 되고 어떤 이들이 볼 때는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벌을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와 같이 말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분명하게 할 것은 하나님의 본성을 가지고 육신으로 섬기면서 사는 수고와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은 그 고통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영지주의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된다면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고통을 느끼지 못하셨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할까 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을 지경인데도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라며 그 상황을 말씀하시기도 한 것입니다.
축구를 아무리 좋아하고 잘해도 축구 할 동안은 숨이 차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면서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이 육신의 고통을 느끼지 못할 것이라고 하는 것은 다 기만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런 설교를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오히려 모독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수고와 그 수고에 수반된 육신의 모든 감각은 자기 죄로 인하여 매를 맞는 자나 애매히 고난을 받는 사람이나 동일하게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함께 달린 죄수도 예수님을 가르쳐 저는 죄가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의 곤고함은 육신을 본질로 보는 자나 하나님의 의가 그 삶의 본질과 내용이 된 사람이나 누구나 겪는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인생과 육신을 주신 목적이라는 것을 아는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선하고 아름다우며 즐거운 것이지만 자기 죄 곧 하나님이 자신을 지은 목적을 벗어나서 육신을 인생의 본질로 보거나 인생의 목적을 하나님께 두지 않는 자들의 고통은 다 자기 죄로 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을 위로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가 애매히 고난 받으나 고진감래라는 말과 같이 견디면 복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애매히 고난 받는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너의 안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있다는 것이기에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의 위로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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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에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인하여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이는 사도신경에도 그렇게 나옵니다. 이데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신 것은 우리를 대신한 것이라고 압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치 차비를 대신 내어 주듯이 죄는 우리가 범하고 벌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과 같이 안다는 것입니다. <행위는 사람, 형벌은 예수님>이라는 구조로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생각의 구조는 큰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죄를 대속했는데 왜 우리는 오늘도 기도할 때 회개부터 해야 한다고 하고, 또 예수님께서 모든 고난을 받으셨는데 우리의 삶은 왜 오늘도 고달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냥 이 의문에 대한 모든 답은 ‘내가 노력이 부족해서’라고 정의 내리고 오늘도 내일도 또 노력만 하고 있다는 것이 큰 문제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모호한 문제 앞에 서면 근원부터 새롭게 시작해보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괜찮은 방법인데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하여 벌을 대신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는 물러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고정시켜놓고 다른 대안들을 찾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대안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것은 신앙의 근간, 곧 출발에서부터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 블로그에서 늘 설명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깨닫고 그 깨달은 정체성을 자신의 운명으로 또 하나님의 정체성과 자신의 관계로 순종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What to do?’)에 주안점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늘 행위를 기반으로 생각하기에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아닌가를 늘 염려합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고 있다는 것은 죄는 곧 행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가 죄가 되는지를 논하는 것이 죄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지 않는다거나, 주일날 짜장면 사 먹는다는 것과 같은 행위가 문제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으로 보면 우리 육신은 세상에 규정된 어떤 행위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늘 죄에 대한 문제의 굴레를 벗기 힘든 것입니다. 그런 상황이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되지도 않을 일을 시키셨을까?’, ‘하나님은 우리를 아시는 긍휼의 하나님이라고 했는데?’라는 생각 정도는 해야 이성적인 것입니다. 안 되는 상황 앞에서 능치 못할 것 없다고 덤비는 것이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럴 값이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왔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는 우리에게 있어 죄의 문제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충분히 일러 주신 것입니다. 즉 존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신앙이 존재의 문제라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존재에 관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이시니 그 아들도 당연히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의로 여기시는 분이시니 십자가가 행위의 사건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가 행위로 죄를 지은 것에 대한 형벌을 예수님께서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와 뜻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고난은 오늘 우리의 고난이기도 한 것입니다. 괜히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의 모든 것이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또 사람들은 ‘그러면 오늘 우리가 육신으로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반문합니다. 도무지 그런 머리는 누가 주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물론 세상의 안목으로 보니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알지만 참 한심한 일이기도 합니다. 앞서 그렇게 예수님의 십자가가 육신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고 A4 한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으로 설명을 했음에도 그런 사람이 꼭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면서 그 고난을 우리에게 보이시며 우리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 오라고 하신 것은 ‘너도 가서 십자가 하나 만들어서 지고 따라 오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십자가는 바로 우리의 육신과 그 삶인 것입니다. 그것을 지고 예수님을 따라 오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보이시고 베드로 사도가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하셨다고 전하는 고난은 바로 우리 육신이 살아가는 삶에 관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그러면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고생만 한다는 것인가?’라는 생각에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몇 개의 포스트에서 우리의 고난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설명을 하였습니다.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려고 하면 세상과 세상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이 생각할 때 의롭다고 여기는 것을 주장하는데 그 주장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것이 바로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올하고 주장 하는 것 앞에 섰을 때 그 앞에서 죄인이 되고 종이 되고 수고하게 되었다는 것은 그 주장에 따라 자기 육신으로 수고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앞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무장한 유대인들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의를 주장할 때에 예수님은 그 육신으로 그들의 주장에 죄인이 되어 그 육신을 십자가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의 고난을 따른다는 것은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의를 주장하는 자들 앞에서 세상을 지은 하나님의 의를 가졌지만 그들의 주장대로 수고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고난을 따라 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법이 아니면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세상의 권세자들 앞에서 순종할 법이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 법이 우리에게 육신을 주신 의미이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예수님이 보이신 고난이고 또 우리가 따라가야 하는 고난인 것입니다.
(다음 편에서 이 고난은 아름다운 것임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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