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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스스로 생각할 때나 다른 사람이 그렇게 일한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종으로서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종이란 지극히 수동적이라는 것을 알고서 한다면 참 아름다운 일이 되겠지만, 많은 경우, 아니 우리가 쉽게 접하는 거의 모든 경우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하고 뭇사람을 공경하고 형제를 사항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공경하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종이란 그런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종교인들, 목사, 전도사, 장로, 신학자들은 스스로를 종이라 여기면서 사람들 위에 군림합니다. 말은 섬긴다고 하고, 사람 앞에서 공손한 모습을 보이긴 하나, 결정적인 것이 하나 안 되는데 그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는 것에 있어서 자신들은 항상 다른 사람보다 위에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아이러니하게도 복음에 대하여 깊은 감동을 주고 깊이 있는 깨달음을 누리는 교회나 또 그 반대편이라 할 수 있는 이단들에게서 많이 나타납니다. 이단들이야 자기 그렇다 치지만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아는 사람들이 그런 것은 한편 의아스러운 것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에 대하여 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로 낮은 자리에 들어가려 하지 않습니다.


청년의 때에 친구들과 성경에 대한 토론을 많이 했었는데, 그 중에 신학교 다니는 친구가 어느 날 토론에서 의견 일치가 되지 않자, ‘야! 신학생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지 뭔 말이 많아!’라고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그 친구의 개인 성향도 작용했겠지만 대부분의 종교인들(신학자, 목사 등)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고 흠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문제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이라는 것에 대한 개념을 잘 알지만 이상하게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면 하나님 앞에서는 종, 그러나 사람 앞에서는 왕보다 높은 존재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을 잘 상징하는 것이 바로 ‘교황’이라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물론 강대상이 높은 자리에 있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어떤 문제일까?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님을 모르는 자들의 몰지각한 행패입니다. 더 신랄하게 말한다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잘 안다면 그럴 수 없는데, 예수님을 알지 못하기에 그런 행동을 보이면서도 자신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또 신분은 하나님의 종 인양 행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해서 유대인들이나 제사장 바리새인들보다 몰라서 십자가를 진 것이 아닙니다. 그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 아들의 개념은 완전히 부정한 것인 반면, 예수님은 온전하고 온전한 하나님 아들의 실체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정죄한 죄목이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더 잘 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지금의 목사들이나 신학자들은 예수님을 못 박은 바리새인들보다 더하면 더 했지 나은 것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란 하나님 앞에서는 종이고 사람들 앞에서는 선지자요 목자가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뭇사람을 공경하고 세상의 제도를 순종하며 왕을 공경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종이지만 세상 사람들과 하나님의 의와 말씀을 이야기 할 때는 가르치는 자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제대로 보았다면 하나님의 종은 세상이나 사람들 앞이나 다 섬기는 모습입니다.


사람을 공경하라고 했지 예수 믿는 사람만 공경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왕께 순종하라고 했지 교황이나 기독교를 믿는 왕께 순종하라고 한 것도 아닙니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했지 자신에게 잘하고 친한 형제를 사랑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람이나 왕이나 형제나 자신의 힘으로 정하거나 세우거나 만들거나 태어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경영의 일부입니다.


따라서 정말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고, 하나님은 실수도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다면 당연히 세상을 경영하심에 실수나 부족함이 없다는 것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실수가 없다고 믿으며 그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들고 경영하신다고 믿으면서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왕께 순종하지 않는 사람, 세상 사람을 공경하지 않는 사람, 하나님 앞에서는 왕이지만 세상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르치는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모순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칭 타칭 아무리 스스로를 하나님의 종이라고 해도 본질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신분과 하나님을 아는 정도와 무관하게 사람을 공경하고, 세상의 모습이 어떠하든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경영하심으로 보고 순종하는 사람이 진정한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의 모든 것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 근원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세우신 뜻과 우리 인생의 목적입니다. 그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모든 목적은 우리 눈으로 보기에 문제점투성이인 세상에서 우리의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나오기만 한다면 이 세상은 온전한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하신 바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은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하신 바,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하는 일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게 진정한 하나님 종의 모습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목적, 또 인생을 만드신 목적을 알지 못하면 세상에 순종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을 공경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왕도 우스운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구원도 없는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일 뿐입니다.


정말로 잘 생각해 본다면,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인생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나오는 것이 세상을 경영하시는 목적이라는 것을 바로 안다면 자신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세상이 온전한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합한 삶이라는 확신이 자기 안에서 생수와 같이 넘쳐나는 사람은 세상이 아주 제대로 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세상은 참 감사한 곳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세상을 향해서 잘못되었다고 외치고 있다면 자신이 구원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안에 확실한 구원의 생명과 증거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목적이 이루어졌기에 세상은 너무나 온전하고 감사한 것임을 알 것인데, 자기 안에 하나님의 경영하심에 대한 온전한 증거 없이 세상을 보니 세상이 엉망인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은 하나님의 종도 구원 받은 사람도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세상에 순종하는 것은 그 자신 안에 하나님의 경영하심의 증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과 육신을 가진 인생을 지으신 목적을 알 뿐 아니라 자신의 삶이 그 목적 안에서 온전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람은 세상이 참으로 온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이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알고 자신이 그 열매라는 것을 안다면 세상은 제대로 된 것이라는 것도 아는 것인데 왜 세상에 불만이겠습니까? 바울 사도가 말한 것과 같이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 것이 온전한 말씀임을 알 것인데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은 단순히 하나님의 명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목적 안에서, 하나님이 뜻하신 목적을 이루어내는 사람입니다. 그 증거가 자신에게 있고, 자신이 하나님 뜻하신 목적의 열매인 것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종은 또한 하나님의 의로 거듭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시는 모든 의가 자기 안에 있으니 또한 사람을 공경하고 세상의 제도에 순종하며 왕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종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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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13-17) 하나님의 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3. 24. 09:25 Writer : 김홍덕

성경은 성도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또 아들과는 신분이 전혀 다르고 반대에 가까운 종이라고도 합니다. 아들은 자유한 존재이고 종은 자유하지 않습니다. 또 때로는 우리가 죄의 종, 세상의 종이었는데 예수님의 구속으로 인하여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고 합니다. 상충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우리 정체성에 관한 신분입니다. 사람이란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본성이 되는 생명으로 거듭나서 하나님의 성품을 그 육신으로 표현하며 살도록 지음을 받았는데, 그 지음 받은 목적대로 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유전자가 본성이 되어 아버지의 혈통 곧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은 목적 아래서 종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줍니다. 그 신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대로 살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좇아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삶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인생의 목적을 좇아 살기에 목적에 대하여 종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심은 우리의 정체성에 관한 부르심이고, 우리를 또한 종이라고 하심은 하나님이 아들 삼으신 그 존재의 목적을 좇아 그것을 이루고 나타내려 살아가는 삶을 살기에 그 목적에 대하여 종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고로 이것은 같은 것인데 정체성의 입장에서 보는지, 아니면 목적의 각도에서 보는지의 차이일 뿐인 것입니다. 다만 이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존재의 목적과 인간 정체성에 대한 밝음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한 말 그대로 아들이 종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들이 가진 자유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들은 자유함이 있기에 그 자유함으로 종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을 선택할 수 있지만 종은 아들과 같이 살겠다고 선택한다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고, 그 아들이 가진 자유와 권세로 종의 삶을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의 아들이심에도 이 땅에서 죄인들 앞에서 오히려 죄인이 되는 선택을 하셨습니다. ‘하늘의 천군을 불러 물리 칠 수 없겠느냐?’는 말씀과 같이 얼마든지 하나님 아들이란 권세로 의로운 하나님 아들을 죄인으로 몰고 가는 이들을 물리치고 벗어날 수 있었지만 그 권세보다 더 강한 것이 있었으니 바로 하나님 아들이라는 생명의 본성이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이란 본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있는 사람입니다. 그 본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위한 것이라면 자기의 권세도 버릴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자유를 좇는 성품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본성을 좇아 하나님 아들이라는 더 없는 자유함으로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한 종이 되신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의 의를 전하는 베드로 사도가 자유로 하나님의 종이 되라고 권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더욱이 베드로 사도가 전하고 있는 자유로 하나님의 종이 되라는 것은 결국 선택이 아니라 그런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의미입니다. 그런 본성을 가지고 있어 그 본성대로 살 수밖에 없는 것보다 더 강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 본성을 가진다면 베드로 사도의 권면을 받은 사람은 그럴 수밖에 없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때는 지킬 수 있고, 어떤 때는 또 지키지 못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하나님의 종과 같이 된다는 것은 의지로 선택하는 일반적이고 세상적인 패러다임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된 존재가 되라는 함축적이고 원론적인 말씀입니다. 인생이 가진 자유가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다는 것 그 자체가 이미 하나님의 종과 같이 되는 본성을 가진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인생이 가진 자유를 포함하여 인생의 존재 자체의 시작과 끝,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그 목적과 의미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머리로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본성이 되는 거듭남이 없으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으로 거듭난 사람이면 자유한 것이고, 그 본성은 하나님의 종과 같이 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같은 권면을 듣고서 하나님의 종과 같이 살아보겠다고 마음먹고 시도했다가 때로 실패하고 되지 않아서 교회에 가서 말씀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울며 회개하고 또 성경공부 시간에 나눔 한다며 말씀대로 살지 못했다고 고백하고 그러고 있다면 자유한 생명도 아니고 그 자유로 하나님의 종과 같이 살아가는 것도 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은 시도 대비 성공률 따지는 것이 아니라, 0 아니면 1과 같은 것입니다. 생명이 생명이거나 아니거나 한 것이지 교회에선 생명이고 세상에 가면 생명이 아닌 것이 없는 것입니다. 개가 땅에서는 개고 물에 빠지면 상어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생명도 같은 것입니다. 즉 이 말씀은 결국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유를 가진 자로, 또 그 자유가 가진 본성에 이끌려서 하나님의 종과 같이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지 행동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신학교를 간다거나 선교사가 되겠다고 난리를 떠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그런 짓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 사람의 생각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공부하라고 주신 것이라 여기고 하나님 일에 대한 출사표나 행동 지침으로 보는 행위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말장난에 불과하나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본성을 가진 생명으로 나는 세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 생명이 가진 본성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좇아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또 많은 사도들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한 것은 그들 자신과 그들의 권면을 받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이기에 그 세계의 법에서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말씀을 지키려 하고 또 하나님의 종으로 살려고 한다면 신학교 가겠다고, 또 하나님을 위하여 죽을 테니 선교지로 보내 달라고 떼 쓸 일이 아닙니다. 진정 하나님의 종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신 뜻을 알고 그 뜻이 자기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자기 육신과 본성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먼저입니다. 그런 삶을 살다보니 먼 곳으로 가게 되면 어디가도 같은 생명이니 그 곳에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에 대하여 이렇듯 분명한 이해와 순종이 필요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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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자유롭지만 그 자유로 자신의 악을 감추는 것에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자유로 악을 가린다는 것은 증거 인멸이나 도주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악하다고 하시는 것은 오직 자신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고 심판하며 그 결정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창조주로서 사람에 대한 분명한 목적이 있고, 그것을 사람에게 부여하시고 기대하십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로봇이나 아바타처럼 사람이 그 목적대로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주시고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고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알고 순종하기를 바라셨기에 자기 운명에 대한 순종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한 이후에 스스로 선택하는 삶을 삽니다. 그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선택이란 그에 앞서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한 가치 판단이 선행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어떤 것이 선한 것인지를 결정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자기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즉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아주 어려운 문제 같지만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면 너무 쉽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다만 그 와중에도 사람은 자기 모습과 생각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것이 잘 보이지 않고 또 보여도 쉽게 순종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정당화시킵니다. 그것이 바로 자유로 악을 가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을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들은 항상 고상한 모습을 띱니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라는 명목 아래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하는 선택에 대하여 존중해야 하는 것으로 인간으로서의 가치가 완성된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모든 존재에게 있어 가장 온전한 가치는 존재의 목적 안에 있을 때입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자기가 존재하는 목적의 자리를 벗어나면 천덕꾸러기가 될 뿐 가지고 있는 모든 가치는 상실합니다. 칼이 부엌에 있지 않고 아이들 장난감 통에 있다면 그것은 가치 상실을 넘어 위험과 악이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란 존재 역시 가장 가치 있는 모습은 다름이 아니라 그 존재의 목적 안에 자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자리에 이르려면, 즉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고 그것을 자신이 가진 자유로 자기 삶의 목적으로 선택하려면 가장 먼저 있어야 할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창조주라는 것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의 모든 선택과 의가 선의 기준이라는 것에 순종하고 자신의 삶과 선택 역시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선한 것으로 아는 자리에 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창세기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모든 세계가 다 하나님의 세계가 되는 사건이 바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이렇듯 자기의 의를 버리고 하나님의 의와 뜻을 자신의 의로움으로 순종하면 너무 논리적이고 알기 쉽게 되어 있습니다. 단지 사람이 자기 의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성경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힘든 것입니다. 그것이 힘든 이유 중에는 바로 사람은 자기가 자기 뜻대로 행하는 자유가 가져다주는 맛을 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선악과는 그래서 먹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을 보십시오. 인생이 자기 맘대로 되었을 때 스스로 얼마나 영광스럽게 여기는지. 그것이 세상에서 선하게 여기는 일이든, 심지어 세상에서 조차 악하게 여기는 일이라고 해도 자기가 뜻한 대로 되면 그렇게 만족합니다. 자기가 뭔가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을 즐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모습을 바로 악에 빠진 것이라고, 죄악 중에서 행하는 것이며,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즉 인생이 하나님이 주신 존재 목적은 버리고 자기의 뜻대로 행하면서 그럴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자유라 여기며, 그렇게 이룬 것을 선하고 영광스럽게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베드로 사도가 자유로 악을 가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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