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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모임 안내입니다.

Category : 알리는 말씀 Date : 2018. 4. 7. 09:02 Writer : 김홍덕

일전에 공지한 대로 

충북 영동에서 모임을 가집니다..


평소 블로그를 눈팅만 하시던 분들의

기습적인 방문도 환영합니다.



말씀의 주제는 <하나님이 주신 육신>입니다.



시간과 장소는 다음과 같습니다.


일시 : 2018년 4월 21일(토) - 22일(일) 02일간

장소 : 충북 영동군 용화면 용화초등학교로 오시면 됩니다.

        (장소는 초등학교 바로 옆입니다.)


** 아래 Time Table에 맞춰서 오시면 됩니다.

   12시부터는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Time Table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건 가이드입니다. 상황에 따라 조정될 수 있습니다.)

(단 말씀나눔 시간은 가급적 3회가 되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날)

15:00 - 16:00 맞남의 시간

16:00 - 18:00 첫번째 말씀 나눔 시간

18:00 - 20:00 저녁 및 휴식

20:00 - 22:00 두번째 말씀 나눔 시간


(둘째날)

09:00 - 11:00 세번째 말씀 나눔 시간

11:00 - 폐회



일전에 공지한대로 회비는 없습니다.

말씀 장소와 숙박 장소는 김수용 집사님께서 준비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식사는 ? - 요즘 밥 굶는 사람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단 식사는 말씀 나눔 시간에 영향을 주는 메뉴는 사양합니다.

(간단한 차림, 설걷이 필요 없는 후처리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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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앞서 애매한 고난이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과 같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의인이고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들이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을 죄인으로 삼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과 같이 의로우나 오히려 죄인이 되는 것이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임을 설명했습니다. 또한 그것은 삶의 한 순간의 일이 아니라 삶 전체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존재 자체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이 그런 분이셨다는 것을 증거하면서 그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 너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애매히 고난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위로는 그랬습니다. 오늘날 삯꾼 목자들이 밥벌이 삼아 강대상에 서서 ‘하나님을 믿으면 육신이 겪고 있는 곤고한 일들이 풀려서 육신이 평안하게 되고, 부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반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고난은 보상을 목적으로 하는 시험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고난을 당하고 참아야 하는 이유가 고난을 견디고 나면 상을 주실 것이기 때문에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건 고난을 견디는 목적이 상급에 있는 것이지 본성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본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셔서 얻는 상급이 무엇이겠습니까? 고난은 보상을 기대하거나 결과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본성이 그래서 그런 것일 뿐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지만 새롭게 얻은 것이 없습니다. 영광을 얻고 부활하셨는데 그게 상급입니까? 예수님은 원래 가만히 있어도 온전히 영광스러운 분이시고, 원래 죽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영생이나 영광을 위해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본성, 하나님의 아들되게 하는 아버지의 본성에 이끌려 살다보니 애매한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그 결과 영광얼 얻는 것이 아니라, 실은 그 자체가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본성 자체가 영광스럽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 본성이 의인이 죄인 앞에서 죄인이 되는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또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뜻이 바로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 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에게 보이셔서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게 하셨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육신 가진 인생의 존재 의미라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하나님이 드러내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 것도 목적 안에서 온전해지는 것 만한 영광이 없습니다. 축구공이 박물관이 잘 보관되면 영광스러울 것 같지만 사실은 경기장에서 발에 차일 때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듯, 인생도 고난을 참고 견디면서 얻는 보상이 있다면서 그 보상을 받을 때에 영광스러워지는 것이 아니라, 이 육신이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축구공이 발에 차이듯 육신을 소비하는 그 자체가 가장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그렇게 살다보면 우리의 육신은 약해지고 쇠잔하며 늙고 보잘 것 없이 되는 것입니다. 경기장에서 발에 차여 너들너들해진 축구공의 모습은 축구공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삶을 산 것이듯 인생 또한 하나님 주신 육신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그 육신이 종과 같이 수고로이 살아가는 애매한 고난의 삶을 살고 나서 늙어 낡은 모습이 되면 그 모습 속에서 그간의 삶이 하나님의 영광 안에 있었다는 것으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매히 고난 받는 것이고 인생의 영광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면서 애매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하심인데 그 계획이 말씀이 되니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며 우리 안에 생명이 되는 본성인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인생을 살며 육신이 평안해지려하고 그 평안을 얻으면 영광스럽고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며 육신이 평안해지기까지 고생한 것을 고난이라 여깁니다. 그리고 그 고난 끝에 평안한 삶을 보상으로 또 상급으로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 말들은 모두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십자가를 지실 운명 그 자체로 인하여 이제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요 17장)하심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같이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평안을 누리는 것이 영광이나 복된 삶이 아니라, 하나님 주신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본성에 이끌리어 수고하듯 살아가는 그 삶 자체가 영광스럽고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의 눈에 보기에 아름다운 것이 있기에 그렇게 되는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 여기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고 하심도 이것이고, 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하심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에 이끌려서 산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본성에 이끌리어 십자가를 지심과 같은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하나님의 의와 뜻에 이끌리는 삶을 사신 것입니다. 그 삶의 총화가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는 애매함의 극치입니다. 의인이 죄인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죽임을 당하는 것 만한 애매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예수님을 믿고 따라가며 그 본성으로 거듭나고자 하면서 예수님을 빌어 세상에서 성공하겠다고 하는 것은 완전한 망상이고, 그렇게 된다고 말하는 자들이야 말로 멸망의 사기꾼인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저 고생이나 하는 것인가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삶을 살아보지 못하고서 이 삶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을 전하는 사람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삶의 한 절이라도 그렇게 살아 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영광스럽고 평안하며 복된 것인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존재하게 된 목적대로 살고 있는데 그 보다 평안하고 영광스러울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자동차 엔진을 생각해 보면, 그 안에서는 끊임없이 폭발이 일어나고 열로 인하여 식혀주지 않으면 견질 수 없을 정도로 뜨겁게 달궈지고 또 식히고 또 폭발하고 아주 빠르게 회전하는 고난 속에 있지만 그러라고 만든 것이니 그렇게 더 잘 할수록 평안하고 영광스러우며 칭찬을 받는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도 그러한데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만드실 때 목적하신 바가 있고 그것을 아들을 보내어 보이셨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왜 영광스럽지 않으며 평안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영광스럽지 않은 것은 단 하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것, 그 뿐입니다. 자기가 목사 아니라 목사 할애비라도 이것뿐입니다.


더욱이 이 삶은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유일한 삶입니다. 예수 이외에 구원을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셨으니 예수님의 본성으로 사는 것 외에 구원이 없고, 하나님이 구원을 베푸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보실 때 선하게 여기시는 것뿐이니 예수님과 같이 애매히 고난 받는 것, 의인인데 죄인이 되고 종과 같이 섬기는 그것만이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유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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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2:18-25) 애매한 고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4. 5. 16:16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인한 안목과 관점의 전환은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목과 관점이 전환되었다는 것은 생명과 존재 정체성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거듭난 것이라고 합니다. 거듭난 안목으로 바뀐 안목은 바로 세상을 보는 관점과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는 관점 그 두 가지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거듭남으로 인한 현상입니다. 거듭남 없이 세상을 달리 보려고 노력한다거나, 아니면 세상의 경험이나 인생의 시련으로 얻은 교훈이나 공부해서 얻은 지식과 같은 것으로 안목을 바꾼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지 거듭나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는 것이 거듭남의 현상으로 인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세상과 인생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다는 것은 이전과 달라졌다는 것인데, 이전과 어떻게 다른가 하면, 이전에는 세상과 인생이 모순이고 부족한 것이며 진화론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생각지 않는 것에서, 거듭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스스로 알기에 그 생명이 가진 본성과 안목으로 세상과 인생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세상에 대하여 순종하라고 말씀하는 것도 이 거듭난 생명을 가지고 보면, 이것은 노력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기에 사도들이 그렇게 말하면 거듭난 사람은 이 말씀이 그 뜻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세상에 순종하지 못하지만 심령이 가난한 사람들은 사도들의 말씀을 들으면 자신이 세상에 순종하지 못함을 이상한 것으로 또 죄로 여기고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알기에 이런 말씀들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신 가장 온전하신 의인인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진 사도들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순종의 본성이 자기 안에 있고, 그것이 사람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이 당하는 환난에 대한 위로의 내용이 많이 담겨 있는 이 베드로전서의 말씀 속에 베드로사도는 세상에서 당하는 환난의 정체를 이야기 해 가고 있습니다. 환난이라는 것은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하여 당하는 고통이 아니라, 애매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애매하다는 것은 ‘이게 맞나?’ 싶은 상황입니다. 그런 상황의 최고봉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또한 모든 인생은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밝히고 전했는데, 하나님이 만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낸 아들을 보고, ‘저게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야?’라며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은 상황이야 말로 ‘저래도 되는 거야?’라는 상황인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애매히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본성을 가진 제자요 사도인 베드로 사도가 환난이란 애매한 것이라고 말씀한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당하신 것과 같은 고난을 당하는 것을 환난이라고 한 것입니다. 즉 의인이 죄인들에게 죄인이 되어 당하게 되는 애매한 일들, 그것이 환난이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자기 죄로 인하여 매 맞고 참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 죄야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 하나님이 죄라고 하시는 것은 사람이 무슨 행동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는 이 블로그 전반을 통하여 말씀드리는 성경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자리, 하나님께서 정한 인생의 목적 그것을 모르고 또 외면하면서 사는 모든 것이 죄인 것입니다.


그 죄 중에 있을 때는 항상 환난이 있습니다. 이는 천지창조를 말씀하실 때에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지 않은 자들이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하신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인생에게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안목과 관점이 열리는 생명이 없으면 인생 자체가 고난인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나 다른 종교에서 간혹 인생은 ‘고(苦)’라고 말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죄 가운데, 즉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을 알지 못하여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생명이 없어 하나님의 안목과 관점과 가치관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잘못되었고, 자이 자신을 비롯한 육신을 가진 인생을 보면 다 악하고 약하며 부질없고 보잘 것 없이 부정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족할 수 없이 삶이란 감옥에 무기징역 처해진 인생이 기뻐봤자 얼마나 기쁠 것이며, 행복하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본들 얼마나 가겠습니까? 그게 바로 환난의 본질인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서 사는 사람들, 그들에게는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육신으로 인한 고통을 당할 이유가 없어야 하지만 오히려 그 세상에서 육신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과 같이 수고하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의가 없는 자들로부터 죄인이 되어 끌려가고 더 수고하고 종과 같이 살게 되는 그것이 진정한 환난이고 고난이며 성경이 기뻐하라고 한 고난인 것입니다.


그 고난의 내용을 보면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육신으로 사는 세상의 모든 자들과 심지어 까다로운 자들에게까지 순복하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삶의 한 순간에 겪는 곤고함의 이야기로 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는 삶의 정체성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애매한 고난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삶이 예수님과 같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본 사람은 누구나 이것이 얼마나 기쁜 것인지 압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으면 인생 자체가 평안해지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고문을 받아도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축구를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축구하는 동안은 숨이 차고 힘이 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의가 풍성한 사람이라고 이 육신의 삶이 고난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이는 거듭난 생명이라면 육신에 대한 안목이 달라지기에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차별이나 야유를 받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단편적인 삶의 사건도 아닙니다. 이는 전혀 십자가를 질 이유가 없는데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가졌기에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세상에서는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살게 되는 삶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고난을 이야기하고 말하면 알아들으려면 당연히 거듭난 생명이 있고 세상과 육신 가진 인생을 보는 안목이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 없이 세상에 순종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이 잘못되었다며 정당을 만들기도 하고 또 그와 반대적 성향으로 진보적으로 세상을 개혁하고자 외치며 강연하고 SNS에 다니며 의견을 피력하는 것과 같은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목적이야 어떻든 그 정체성은 거듭남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어 그 안에 진정한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은 세상 전반을 볼 때 하나님이 다스리시기에 얼마든지 순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보고도 절한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뜻하신 대로 온전히 다스리는 것을 아는 생명으로 났는데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 순종하는 것은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했으니 그렇게 해야겠다고 살다가 어떤 사건을 만났을 때 마음을 그렇게 먹고 시도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초보적인 관점을 가지고 설교나 하고 다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존재가 거듭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졌음에도 이 세상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그 순종이 육신의 수고를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니 십자가를 지신 것과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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