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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1-7) 남편과 아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4. 24. 07:49 Writer : 김홍덕

남녀가 결혼을 하므로 남자는 남편이 되고 여자는 아내가 됩니다. 남자와 남편이 다르고, 여자와 아내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부부가 된 남편과 아내는 세상의 모든 이성중에서 자신의 짝이 된 서로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여자가 되고, 남편은 아내에게 유일하게 의미 있는 남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자가 한 남자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은 남편인 남자를 아내가 있는 남편으로 만들었고, 남편 또한 아내에게 그러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내용과 형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눈에 보이지 않는 내용인 하나님의 의가 그 의를 나타낼 수 있는 형식인 사람과 하나가 될 때 안식이 되듯, 남편이 된 남자는 더 이상 여자를 찾지 않아도 되고, 여자 또한 아내가 되면 남자를 찾지 않아도 되므로 다시 자신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생명을 낳고 기르는 것을 행복으로 알고 살아가게 됩니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 역시 사람이 하나님을 온전히 만나게 되면 더 이상 신을 찾거나, 인생의 곤고함을 해결하기 위하여 수고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안식하게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삶이 전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거듭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내용은 형식을, 형식은 내용을 찾지 못하여 온전치 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내용 혹은 형식을 찾아 헤매다 하나가 된 다음에는 내용은 형식을 통해, 형식은 내용을 통해 자신을 표현해 내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삶의 목적과 이유를 알지 못하여 방황하는 삶을 살다가 하나님을 만나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알게 되어 안식하고, 그 알게 된 존재의 목적대로 살게 되는 새 삶을 살게 되는 것과 같이, 남자와 여자도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해주는 짝을 만나기 위하여 삶을 가꾸며 기다리고 순례하듯 하다 남편과 아내를 만나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남편과 아내, 그리고 가정을 통해서 그 섭리를 설명하고자 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내가 되었다는 것이 남편의 본성을 가진 자손을 자신의 몸으로 잉태하여 낳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듯,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자기 육신으로 살아내어 그 육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여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말씀의 본질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 안에 이런 법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에 그 만드신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내용과 형식으로 되어 있고, 사람이 또한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태어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품 속에 있던 것이 나타난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가 부부에 대하여 권면할 때 아내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귀하게 여기라는 것도 다 여기서 비롯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 모두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여자와 아내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들이 가진 그 육신의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전의 자기 삶이 여자였다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변화된 삶은 마치 여자가 성이 다른 아이를 낳듯 이전과 다른 생명으로 살게 된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편들 역시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안다면 당연히 그들이 육신으로 사는 삶 중에 자신들이 의를 가진 존재로서 아내를 통하여 그 의를 가진 아들을 얻는 것임을 안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을 사랑하셨는지, 그 본성과 품속에 있는 의를 표현하시기 위하여 얼마나 낮아지고 사람을 사랑하셨는지를 알 것이기에 아내에게 또한 의에 있어 여자와 같은 존재에게 어떻게 섬기며 살 것인지 알 것이기에 그것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남자와 여자들에게 이 비밀을 전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 법 아래에서 보면 아내가 어떤 치장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머리를 꾸미고 금으로 치장하며 좋은 옷을 입을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는 것이 여기에 있습니다. 결혼 했으니 다른 남자에게 예뻐 보일 이유가 없으니 몰골에 신경 쓰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여자와 형식은 남편과 내용이 거할 그 속사람이 어떤 것인지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중심을 보신다고 하신 뜻을 알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아내에게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치장하라고 한 것이나 베드로 사도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라고 하신 것이 같은 의미인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 존재 의미로서 여자요 신부가 되는 모든 인생이 그 육신의 것으로 이루어내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할 것이 아니라 속 심령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법을 안다면 육신으로 남편인 사람은 아내를 사랑할 것이고, 육신으로 아내된 사람도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남존여비라는 적폐 속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부부가 되어 살면서 속으로는 부글부글 끓는데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했으니, 또 아내를 사랑하라고 했으니 그렇게 해야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고, 상을 받으며, 벌을 받아 불행한 일이 생기는 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건 이미 그 마음이 순종도 사랑도 아닌 상태인데 그래봤자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


특히 남편들을 향한 권면에서 말씀하고 있는 ‘지식’ 바로 이 법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연약한 아내를 생명을 얻기 위하여 귀히 여긴다는 것은 비단 육신으로 약한 자들 앞에서 어떻게 할 것인지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가진 자로서 아직 그 삶에 하나님의 생명이 없는 영적으로 연약하나 자들 앞에서 의인으로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오히려 그 약한 자들을 귀히 여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은 앞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한 ‘애매히 받는 고난’과 같은 것이며,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본성이 되고 생명이 되어 그 육신으로 나타나는 법 아래 있는 사람을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말씀을 들을 자격과 본성을 가진 사람은 그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를 권면한다는 것은 곧 이 말씀을 듣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라는 증거가 되므로 진정한 위로가 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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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고난이라는 무겁기도 하고 어떤 면에서 보면 일상적이지 않던 주제로 성도들을 위로한 베드로 사도는 갑자기다 싶게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런 말씀은 곳곳에 나오는데 남편과 아내, 남자와 여자에 대한 말씀을 육신의 남녀에 대한 것으로만 보면 곤란합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시각의 전부라는 것은 그 사람의 생명이 거듭나지 못하고 단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본질로 알고, 형식인 육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아내나 여자는 단순히 결혼과 함께 아내가 되는 육신으로 여자인 사람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신랑이고 모든 성도들이 신부라는 것이 또한 그렇습니다. 교회가 신부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그 몸이라고 하는 것은 교회는 예수님의 생각과 뜻과 의를 표현하는 형식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듯 모든 사람이 신부가 된다는 것도 예수님이 가진 의와 뜻을 표현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고 따라간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성경의 본질적인 구조는 의가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세상으로 나타났다는 창세기에서 시작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그리고 그 육신으로 속에 있는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신 십자가를 거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 부활이라는 의미에 이르기까지 의와 뜻이 육신과 세상이라는 형식으로 나타나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구조는 곧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바로 이 관점에서 남자와 여자를 보는 것입니다. 육신으로 남자, 여자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남자로 대변되고 표현되는 존재는 의와 뜻을 가진 존재이고, 그 의와 뜻을 형식으로 표현해 내는 존재가 여자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버지인 것입니다. ‘어머니 하나님’과 같은 소리는 기본적으로 성경을 모르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어리석음은 모두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것이라고 하셨고, 기본적으로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이기도 합니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고 공손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은 육신으로 여자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형식을 가진 존재는 그 형식의 내용이고 본질인 의와 뜻을 가진 존재에게 공손하고 순종하라는 의미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아내에게 공손하라고 말씀하면서 ‘이와 같이(벧전 3:1)’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와 같이’는 자유하나 그 자유로 종과 같이 행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은 애매한 고난을 받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바로 길 잃은 상태에서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님께 돌아오는 회복된 삶입니다. 그와 같이 모든 형식들은 그 뜻하신 바를 나타내는 일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인데, 이 법을 남녀의 결혼으로 나타내셔서 남편과 아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떻게 보면 역할극이기도 한 것입니다. 남편은 의를 가진 자의 역을, 아내는 그 의를 형식으로 나타내는 역을 맡은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결혼과 가정의 삶을 보면 남자는 남편으로서 가정의 의를 가집니다. 성씨를 가지고 있고, 가업을 이어 갑니다. 그런 의를 가지고 자녀를 낳음에 있어 아내 된 여자가 그 의를 형식으로 가진 아들(자녀)을 낳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그렇게 아버지의 의가 어머니의 육신으로 통하여 육신이란 형식으로 나타난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듯 하나님이 가지신 의가 인간이 가진 형식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는 것이 바로 우리가 존재하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의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육신이란 형식으로 나타나게 되고 그 육신으로 나타난 것을 육신 가진 자가 보고서 의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가 육신으로 나타내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존재고, 그 존재를 보고서 하나님의 의를 발견하는 사람 안에 그 발견된 그리스도의 본성이 심기는 것이고,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는 것이며, 그 생명이 또한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그것이 거듭남이고 구원의 본질인 것입니다.


따라서 아내들, 곧 형식을 가진 자들은 의를 가진 자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와 형식에 대하여, 그리고 자신이 의와 형식에 있어 어느 편인지만 알게 되면 억지로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게 되어 있습니다. 즉 이것을 선택의 문제로, 또 의지를 가지고 순종해야 하는 문제로 보는 사람은 아직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든 존재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니 순종이 안 되는 것일 뿐인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실 때 남자와 여자로 인생을 살게 하신 뜻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남자, 여자라는 각각의 존재로서 모든 것을 알아가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다고 하심과 같이 남자와 여자가 한 몸(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바라시는 바 인데 이는 그렇게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는 삶을 서로 보게 하여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배우고 깨닫고 또 누리게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뜻 안에서 남자는 육신으로 그 역할을 하여 여자에게 교훈이 되게 하고, 여자는 또한 형식을 이루어내는 존재로서 역할을 잘 감당하므로 육신 가진 남자들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여자로서 어떤 순종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시고자 하심이 하나님의 뜻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는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라는 이 관계성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로서의 의미를 아는 것이 핵심이고, 그 뜻을 수행함에 있어 남자와 여자로 주신 육신으로 그것을 밝히고 표현해 내는 것이 본분인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 또한 남편과 아내로 인생을 살게 하심을 눈에 보이는 형식만 보고 육신으로 남자 여자라는 것만을 본질로 볼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본다는 것은 신앙 자체가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신앙입니다. 행위는 형식을 본질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신앙의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내를 향하여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이 단순히 육신의 남편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내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의 가장 우선은 하나님의 의를 형식으로 표현하는 육신을 가진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육신으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에게 어떻게 대하며 어떻게 살아가는지도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앞선 포스트들에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유하나 그 자유는 스스로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을 순종하는 선택을 위하여 자유를 주신 것임을 알고 자유를 그렇게 활용하고, 그렇게 자유를 활용한 선택은 의인이 죄인들 앞에서 스스로 죄인이 되신 예수님과 같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인생들의 주장 앞에서 섬기는 사람으로 사는 삶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 선택은 우리의 삶이 세상의 의로움과 자기 선악의 기준을 가진 이들이 볼 때 참으로 애매하고 어리석은 고난과 같아 보이지만 놀랍게도 그 삶을 사는 이들에게 그것은 참 영광되고 평안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생명의 말씀을 전하여 생명이 된 사람들에게 위로의 편지를 하면서 고난뿐인 것을 전했을 리가 없을 것이라는 상식적 측면에서만 봐도, 사람들이 보기에 애매히 고난 받는 것은 인생으로 슬픈 일일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님을 알기에 그렇게 전하는 것입니다.


그 맥락에서 아내들에게 남편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육신을 가진 인생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로서 순종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면 순종하는 아내가 되고, 또한 순종하는 아내가 사랑받는 것을 보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육신으로 표현하는 순종의 삶을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성경의 본질적인 구조를 알아야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무식하고 어리석은 남자들은 자기가 남자로 나는 것에 자신이 기여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면서 유세하는 바보가 될 것이고, 이유도 모르고 순종해야 한다는 억압 속에서 사는 여자의 인생은 허무하기 짝이 없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본질을 알면 아내가 순종하는 것도,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도, 그리고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와 인생의 목적도 다 알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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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오는 ‘황금률’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 이 두 가지가 어쩌면 성경대로 사는 것의 모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남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는 것, 그리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 성경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모든 말씀이 이 두 말씀에 함축될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욕으로 욕을 갚지 말라는 것도 일종의 황금률이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하여 많은 사도들이 세상이 자신을 욕하고 악하게 대하여도 악으로 다시 갚지 말고 선함으로 대하라고 하는 말씀들을 많이 하였는데 이 또한 황금률과 원수를 사랑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원수는 참 극한의 상대라서 눈에 띠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단지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악하게 대하는 이들을 선함으로 대하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원수도 사랑하는데 삶의 작은 부분이야 어렵지 않을 것이니 말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을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를 다시 한 번 언급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존재에 대한 규범으로 볼 것인지를 상기해봐야 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을 예로 든다면, 행위로 원수 된 자가 있고 존재로서 원수가 된 자가 있습니다.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원수가 되는 것은 행위로 인함일 것이고, 성경을 존재 규범으로 보는 사람에게 원수는 존재로 인함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행위 규범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말씀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악은 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것이고, 성경이 말하는 원수 역시 하나님이 원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악한 것은 오직 하나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뜻을 떠나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대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보고 악에 빠졌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원수 역시 남의 밭에 가라지를 밤에 뿌리고 가듯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반하고 자기 옳다고 살아가면서 다른 인생들에게 까지 그것이 옳다고 따르라고 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원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하며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지켜내어야 한다고 설교하는 목회자들이야 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원수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하는 말씀은 정말로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만든 세상과 자기 삶을 자신의 주장대로 세상을 살고, 자신이 가진 선과 악에 대한 기준으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악함과 동일하게 사람을 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게 갚아도 되는 것이 복음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것을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는 자들이 십자가로 끌고 갈 때에 아주 위대한 기적과 능력으로 그들을 벌하셨을 것인데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욕으로 욕을 갚지 말라는 것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것보다는 오히려 약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욕한다는 것은 자기 의로 볼 때 ‘저 꼴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는 욕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이미 자기 안에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악한지 선한지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악하다고 하시는 유일한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의를 가지고 ‘저것이 무슨 하나님의 아들이며, 저것이 무슨 신앙이냐?’며 애매한 고난을 받는다는 이들을 심판하고 욕한다는 것이 바로 악함이고, 아이러니 하게도 그렇게 욕하는 마음이 하나님의 아들들을 애매한 고난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욕하는 것이 바로 악함이기도 한 것이고 그렇게 욕을 하고 악한 모습을 보이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미 자기 의와 선과 악의 기준을 주장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고, 그런 주장이 있다면 누군가는 그 주장으로 인하여 육신을 수고하여야 하게 되므로 그 육신의 수고를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진 이들이 수고하게 되는 것이며 그 수고가 바로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 애매한 고난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들은 이미 욕으로 욕을 갚지 않는 존재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욕으로 욕을 갚지 말라고 하고 바울 사도가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했다는 것은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이 그 말로 인하여 욕하고 싶고 악으로 되갚아 주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 말이 유효한 정체성을 가진 사람 그 자체가 이미 욕으로 갚지 않고 악으로 갚지 않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그런 성도들을 위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의 삶이 이미 자기 의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진 이들로 인하여 애매히 고난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런 성도들의 형편 자체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가 대신 받은 고난에 참여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기에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에 들어 있다는 위로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위로가 25절에서 이전에는 길 잃은 양 같더니 이제는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 곧 예수 그리스도께 돌아 왔다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돌아왔다는 것은 장소로 돌아 왔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위로하고 있는 성도들의 정체성입니다. 그 성도는 앞선 몇 개의 포스트에서 이야기 한 그런 정체성과 삶의 모습과 본성을 가진 이들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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