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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13-22) 온유함으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5. 3. 07:41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소망에 대하여 물어 오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라고 하면서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온유함이란 우리에게 ‘부드러움’이라는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온유함은 ‘겸손’에 가깝습니다. 굳이 표현한다면 자신의 뜻을 버리고 따르는 것고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산상수훈에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여러 번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성경에서 땅은 사람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고 이 경우 또한 그에 해당되는데 결국 온유한 사람들은 사람을 얻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업이 된다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하여 하나님의 세계로 얻게 하는 것을 자기 존재의 목적으로 삼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소망이 없는 사람이 그 소망을 가진 성도들에게 소망에 대하여 물어 오면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라고 한 것은 결국 그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얻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사람을 얻으려면 자기의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소망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졌다는 우위를 버리라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목사나 장로와 같이 교회에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에 대하여 누가 물어오면 자신이 더 아는 사람으로 대화의 중심을 자신에게 둡니다. 모든 의문을 자기가 알고 있는 것에 맞추고 자신이 제시하는 것에 동의해 가야 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대화의 내용에 대하여 자신이 더 높은 자로서 임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이나 태도를 공손하게 한다고 낮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대회의 중심을 누가 가졌는가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더 온전한 정도가 아니아 하나님의 의의 본체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자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따라 처형이 되신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설명하심에 있어 예수님 자신을 중심으로 설명하신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가진 기준에 자신을 드려서 설명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런 것이다.’ 라고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아들은 이런 것’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주장하는 것대로 대화를 이끄신 것입니다. 하나님 아들에 대한 자신들 만의 기준을 가진 자들의 기준으로 볼 때 ‘예수 너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야!’라는 주장대로 끌려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유함인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온유로 인하여 오히려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가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인한 소망을 가진 이들이 그 소망에 대하여 물어오는 사람에게 답을 한다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이 보여주신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답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으로 대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말을 부드럽고 자세를 공손히 한다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물어오는 이가 가진 가치관에 자신을 내어주듯 할 때 그 소망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는 목사가 성경을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안 보고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답변하는 것과 다른 세계입니다. 신앙이 있다면서 신앙 없는 사람을 훈계하듯 하는 것과는 반대의 것입니다. 알고 보면 있다는 그 신앙도 영적인 것이 아니라 육신이 공부해서 얻은 학위고 목사라는 신분도 단지 직업일 뿐인데 꼴난 그것으로 그리스도의 소망을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자기가 아는 것을 기준으로 답을 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그런 태도를 가졌다는 것은 온유하지 않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소망이 자기 안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 답변이 틀린 답인 것입니다. 단지 자신이 학교에서 배웠다고, 또 세상의 가치관과 혼합되어 어떤 이익을 가져올 것인지를 답해 주었다는 것만으로 성도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세상의 유익이고 육신의 정욕이 바라는 바 일 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온유함으로 그리스도의 소망을 물어오는 이들에게 답하라는 것은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답하라는 것입니다. 그 생명은 자신이 그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기반으로 행하지 않습니다. 그 생명은 언제나 자신이 가진 그 생명을 오히려 버려서 생명의 본성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신학을 포함하여)은 자기 가진 것을 보전하듯 나타내어 그 본성을 드러내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은 오히려 자기 가진 것을 버려 그 생명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라고 해도 말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온유함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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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다 생명에 관한 것입니다. 즉 생명의 본성에서 유추하여 볼 수 있는 것이여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선한 양심이라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닙니다. 소망이나 선함도 다 그와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선함도, 소망도, 양심도 모두 그런 것을 본성으로 가진 생명을 가졌다면 베드로 사도의 권면대로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생명 없이 노력을 통해서, 믿음이라 착각하는 신념을 통해서 이루려 한다면 그것은 헛수고에 그칠 것입니다.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자가기 가진 의로 인함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다르게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의를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섬겨야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거나 이룰 수 있는데 문제는 자신들의 의를 좇는 세계에서 그 의를 이룰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육신으로 문자 그대로 지켜내어야 육신의 평안이 훼손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성경을 문자 그대로 육신으로 지켜내는 것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미래에 자신이 원치 않는 결과가 올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게 하고 그 두려움을 이기려 끊임없이 행위를 단속하고, 행위로 노력해서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들은 성경을 행위로서 문자 그대로 지키려는 것 같지 않은데 오히려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이루며 산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이 그것입니다. 메시아는 병든 자를 고친다고 했는데, 이상하게 율법에서 일하지 말라고 한 안식일에 병을 고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예수를 백성들이 따르니, 예수님과 달리 금식하고 의복을 차려 입은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피나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을 고칠 수 없으니 그 갈등과 두려움은 상당했던 것입니다.


밤에 예수님을 찾아온 니고데모의 일이 그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 밤 중에 찾아 왔다는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알려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기도 하고, 니고데모 자신은 예수님과 같은 세계에 대하여 밤과 같이 어둡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 세계를 알려고 하는 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추구하는 바가 확신하는 것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 니고데모와 같이 육신으로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려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난 사람들을 보면 자신들이 가진 두려움이 없다는 것에 의문을 가지게 되고 물어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이유를 물어오는 자들에게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밤에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답하시기를 거듭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이들의 마음에 있는 두려움 아닌 소망의 이유를 묻는 이들의 질문은 사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 질문한 것으로 대표됩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께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예수님과 같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자신은 예수님과 같은 표적을 나타낼 수 없으므로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맥락에서 보면 ‘소망은 하나님께 있는 것인데, 내게 소망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고백을 가지고 사람들이 물어 온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이로 볼 때 베드로 사도가 물어 오는 것에 대한 대답을 항상 준비하라고 한 것 역시 거듭난 <생명>이 되라는 것입니다. 즉 거듭나서 생명이 바뀌면 언제 누가 그를 대하여도 그 생명으로 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양이를 바다에 던져도 고양이듯, 거듭난 사람은 그 마음에 소망을 언제라도 보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로 볼 때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노후에 대한 불안감, 살아가면서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을까 하는 근심과 염려는 모두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의문을 가졌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물학자들이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는 것은 사람이 동물을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사람의 행동을 보면 학자가 아니라도 ‘사람이 다 그렇지’라고 이유는 설사 몰라도 사람의 행동은 서로 이해를 하지만 사람이 동물의 행동은 이해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자신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이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볼 때 가진 의문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이 자기 안에 없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이들을 볼 때 가지는 의문은 자기 안에 그 의문스런 생명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니고데모에게도 그리스도의 소망이 없는 사람도 모두 그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거듭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단순한 것 하나를 인정하지 못해서 인생이 늘 두렵고 근심이 많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사람들이 와서 질문하는 것에 답하는 것을 준비하기를 바라서 대답할 것을 예비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 사도가 권면하는 것은 마음 곧 심령에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즉 그 소망을 가진 생명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면 두려움도 근심도 없는 사람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있는 것에 관한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답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항상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는 그 생명을 가진 이들은 자기 안에 있는 생명에 대한 의문을 가진 이들을 대할 때에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에 대하여 어떠하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곧 그 생명이 바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사람은 그 이유를 물어 오는 이들에게 그 이유를 설명할 때에 그것을 물어온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또 그것을 설명함에 있어 하나님을 경외하는 두려움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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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13-22) 두려움과 의문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전서 Date : 2018. 4. 30. 09:28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을 열심히 행하면 고난을 받을 것인데 그것은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이기에 복을 받은 것이라고 위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난을 받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의를 위하여 사는 것을 해하려 하는 것을 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모습이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렇게 의를 핍박하는 자들이 핍박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이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데 이 두려움은 두 가지 조건 하에서 발생합니다. 하나는 시간적으로 미래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자기 생각과 반대되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 미래라고 해도 자기 생각이나 바람대로 되면 그것은 기대가 되지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미래나,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미래가 분명해지면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한 마디로 정리하면 자기가 생각한대로 되지 않는 미래가 바로 두려움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도 예수님이 자신들의 신앙이나 사회나 특히 자신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의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여겼다면 굳이 죽일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빌라도의 모습에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빌라도 입장에서 예수님의 두 가지 죄목인 신성모독과 반란죄 중에서 관심은 반란죄뿐인데, 자신이 볼 때 그 몰골로 반란을 일으킨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기에 사람들을 선동한 죄 값으로 몇 대 쳐서 방면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아주 심각한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늘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두려워했다는 것이 그 증거인데, 그들의 가치관으로 보면 백성들이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변질되는 것이기에 그렇게 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벌하실 것이라고 여겼고, 또 무엇보다 자신들이 백성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약화될 것이기 때문에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런 구도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두려움이었던 것입니다.


카네기 자서전인가에 보면 ‘죽은 개는 발로 차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어떤 것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면 굳이 가서 곤고하게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곤고하게 하는 이는 하나님이 선히 여기시는 일을 행한다는 것은 자기 의를 좇아 사는 이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주고 의문을 가지게 한다는 것은 그것을 보면 자기와 상관있는 일로 여겨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뭔지는 몰라도 하나님의 선하심이 나타나면 자신이 그렇게 살지 못함이 드러나서 두려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이 선하게 여기시는 삶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들에게 심판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므로 심판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죄는 어디까지나 법이 있어야 하는데 예수님이라는 생명의 법이 나타나니 생명의 법을 가지지 않은 모든 자들은 생명의 법이 없다는 것이 드러나서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 앞에서 죄가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사람들은 ‘이렇게 해야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는 자기 생각을 좇아 그 생각을 육신으로 행하여 하나님께 이르려 죽으라고 애쓰고 있는데, 자기들이 그렇게 노력하는 것과는 반대로 가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은 가만히 둘 수 있는 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본성을 가진 성도들 역시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졌기에 모두들 위로 올라가서 영광을 얻으려고 하는데, 아래로 내려가고, 자기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것과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행여 저것이 사실이 아닐까 싶은 두려움 그 자체입니다. 그렇듯 어떻게든지 높은 곳에 올라 그 영광을 하나님께 드리려 노력하고, 그 영광 이루는데 해가 되지 않으려 성경을 몸으로 지켜내려 애쓰면서 살아도 그것이 온전치 않아서 늘 불안한데, 자기들이 하는 것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불편한 것입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절기를 지키며, 율법을 외워가며 그것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서도 자신들이 그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하지 못하는 유대인들 앞에,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겪는 갖은 질병을 고쳐내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권세가 놀라운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가진 모든 두려움을 자아내고 드러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예수님을 시험하듯 하고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두려운 만큼 의문도 많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을 곤고하게 하는 이들은 바로 그런 두려움과 의문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사람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노력하게 합니다.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이루지 못했다는 증거임에도 그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들이 가진 불확실성에 대하여 안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 신앙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크고 많은 것을 다수결과 같은 선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자신들 스스로가 확신하지 못하지만 많이들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여깁니다. 그것이 큰 길로 다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 안에는 늘 의문이 있습니다. 또한 불만도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이 자기가 가진 의문과 두려움을 다 해결해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다들 그렇게 하는 것 같으니 자신도 그냥 큰 길로 따라가고, 한 편으로 교회가 하는 일이 못마땅하여 교회에 갔다가 오면 이런 저런 불평들을 하면서도 다른 길을 가는 것은 또 막상 두려워서 그나마 익숙한 두려움 속에 그냥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조금만 솔직해져도 지금 안주한 자리를 자신이 확신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고, 조금만 상식이 있어도 어차피 지금 있는 자리도 아직도 이루지 못한 것을 향해 마냥 노력만 하고 있을 뿐이니 앉아서 죽으나 나가서 죽으나 같은 것이니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찾아 나설 것인데 이런 것조차 할 수 없는 두려움과 어두움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과 달리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핍박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이들이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안을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에 사람들의 눈에 확실히 다르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이 주는 평안은 큰 길로 가는 평안입니다. 자신은 불안하지만 너도 나도 같이 가니 서로에게서 위안을 받는 평안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주신 평안은 자기 안에서 생수가 넘쳐나는 것과 같이 확신 또한 넘쳐나기에 두려워하려 해도 두렵지 않는 그런 평안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신 평안인 것입니다.


한편 또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 생명으로 사는 삶에 대하여 의문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런 삶을 사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의문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 자신과 달리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고 애매히 고난 받아도 즐거워하는 이들에 대하여 궁금해 하고 알고 싶어 합니다. 그들은 두려워서 니고데모와 같이 밤에 찾아오기도 하고, 예수님을 선한 선생이라고 부른 이와 같이 자기 의를 증명하고자 찾아오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런 이들에게 답할 것을 예비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심령을 가진 이들은 그 마음에 생명이 있고, 생명은 그 생명이 가진 본성이 소망하는 바가 있기에 그 소망 가운데 삽니다. 그 삶은 자기 삶을 두려움과 의문과 혼동 속에 살고 있는 자들 중 어떤 이들에게는 그 이유가 궁금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는 것입니다. 항상 예비하라는 것은 그 대답을 가진 본성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가 언제 어떻게 물을 것을 알고 그것에 신경 쓰며 대비하겠습니까? 그냥 자기 안에 있는 본성대로 사는 것, 그것이 항상 대비된 것인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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