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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와 같은 말씀을 대하면 사람들은 없는 동정심도 이끌어 내고, 멸시하는 마음이 들지만 억지로 불쌍히 여기며 잘난 체 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며 억지로 겸손하려고 합니다. 즉 자기 마음에 없는데 성경이 그러라고 하니까, 안 그러면 벌 받아서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안 될 것 같으니까, 아니면 그래야 죽어서 천국가고 그곳에서 잘 살 것 같아서 그렇게 합니다. 다들 성경을 그렇게 지키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필연적으로 그 억지로 하는 것을 잘 하기 위한 각양의 방법이 필요하게 되고, 그런 방법이 바다처럼 널리고 널린 세상을 살펴서 좋아 보이는 것들을 가지고 옵니다. 금욕적인 생활 습관을 가지거나, 마음을 다스리고 수련하는 것과 같은 것이면 될 것 같아서 그것을 도입합니다. 교회의 건물을 크게 짓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세상의 것들을 섬기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바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다는 노아 시대의 일인 것입니다.


정말로 우리가 솔직해진다면 성경대로 산다면서 노력하는 것들은 대부분 우리 안에 있는 것과 반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화를 내지 말라고 하는 말씀대로 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은 자기 마음에는 화가 났다데 그것을 표현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력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화가 났는데 그것을 억제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쩌다 계획대로 되면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며 바칩니다. 그렇게 신앙이라는 것이 행위의 공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한 것이 같은 말씀인데, 사도들이 ~을 하지 말라고 말씀한 것은 사람의 겉 행위만 그러지 말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을 지금의 신앙인들이 크게 착각하고 타협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하라, 또 무엇을 하지 말라고 한 것은 그 행동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과 생각조차 그것과 무관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인 것인데, 그냥 행동으로 그러지 않으면 다 된 것인 양 생각하고, 그렇게 드러내지 않으면 좋은 신앙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것입니다. 그렇게 행위로 드러내지 않으면 행위가 의롭고, 그 의로움 속에는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을 억지로 참아낸 공로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행위의 공로를 드리는 것입니다. 소유(물질)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까운 마음이 있는데 헌금하고는 그 헌금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의로워지려는 것입니다. 물론 때론 마음까지 그럴 수 있지만 문제는 성경은 ‘항상’, ‘언제나’, ‘온전히’ 그래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니 단 한 번이라도 마음까지 순전하지 않았다면 그간의 모든 것이 다 허사가 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고,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며,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은 안타깝게도 너무도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는데, 사람마다 행위의 방법에 대한 생각이 달라서 누구는 ‘이렇게 하자’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저렇게 하자’고 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우기고 서로 다투고 있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어떨 때는 도저히 교회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은 방법을 도입하기도 하고 그것을 본 사람들이 저항하는 것과 같은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우리 신앙의 모습에 의문을 가지고, 또 그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루어내지 못하는 자기 삶의 하염없는 노력들에 회의를 느껴야 하는 것임에도 눈이 어둡고, 자기를 너무 사랑하므로 그 죄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몸이야 일요일이면 성경 들고서 교회에 가지만 가서 하는 일이라고는 졸거나, 다투거나, 집중해서 들어도 삶으로 구현하기 힘든 설교를 듣고서 그 값으로 헌금을 내고, 결혼식 답례품처럼 밥 한 그릇 얻어먹고서는 마치 숙제 했기에 모든 공부 다 했다는 아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자기 할 바를 다 한 것 같이 스스로 위안하는 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때로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에 대한 의문이 들거나, 누군가의 질문을 받거나, 토론에 임할 때는 뫼비우스의 띠 위를 달라는 것처럼 그 끝없음에 아예 포기합니다. 그리고 인생은 ‘단지 노력할 뿐’이라며 봉합하고선 또 그냥 그렇게 살아갑니다. 다들 그러니까, 그렇게 하면 천국에 간다는 사람들이 많으니 그러다보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복권에 인생을 걸 듯 그러고 삽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일점일획도 땅에 떨어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하나라도 어기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성경의 계명의 수만 논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명 100가지 중에 한 가지를 어기면 안 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아가 성경을 지키는 영역 또한 행위 뿐 아니라 마음과 본성까지 빠짐없이 성경을 다 지켜야 한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마음은 화가 나는데 행동으로 지켜냈다고 성경을 지킨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온전히 지켜내려면 말씀 그대로 <마음과 뜻과 정성> 모두가 다 성경을 지켜내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것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본성을 인하여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는 것도 그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화를 참는 것이 아니라 이전에 화내던 일이 이제는 화가 나지 않는 일이 되어야 그 생각까지 성경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을 지키는 것이 아니면 다 성경을 지키는 노릇하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은 잘하면 잘 할수록 하나님께 죄가 커지는 것입니다. 무덤에 회 칠을 화려하게 할수록 기만하는 것이듯.


그러면 이 모든 문제를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를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보는 것 까지는 이르렀는지 모릅니다. 실제로 세상을 보면 그 경지에 이른 사람들을 볼 수 있고, 주변에도 또 교회에도 그런 사람들이 제법 있는데 안타깝게도 문제의 파악까지는 그렇게 해 놓고서 다시 <더 노력하자>하는 세계의 법을 가져오는 것을 봅니다. 이것이야 말로 개가 자기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이 모든 정황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 곧 구원은 우리가 아는 대로 예수님 답입니다. 예수님처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했는가? 예수님은 행위로 의에 이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행위는 십자가에 처형될 행위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 아들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입니다. 즉 생명의 본성이 하나님의 의에서 비롯되어야 비로소 성경을 지키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거듭남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다는 것은 그냥 교리 문답시간에 ‘아멘’이라고 했다고, 아니면 4영리와 같은 짧은 성경말씀을 듣고서 ‘그렇구나!’ 동의하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인하면 거듭나지고 그리고 나서 거듭난 사람은 성경대로 사는 것이라며 힘들고 어렵게 그것을 지켜내는 세계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신용카드 할부 같은 것이라서 먼저 지불하고 차차 갚아가는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다 갚지도 못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운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이는 예수 믿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자기 육신으로 산 세월 동안 옳다고 여긴 것을 벗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잉태되어 출산하기까지도 10달이 걸리는데 평생을 자기가 옳다고 살던 사람이 성경구절 몇 마디에 완전히 거듭나는 것과 같은 것은 없는 것입니다.


적어도 사람이 거듭났다고 하면 자기로서는 어떻게 이 성경을 부인하려고 해 보아도 안 되고, 성경을 어기면서 살려고 해도 되지 않고, 말씀을 전하려 하지 않으려 하면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 견딜 수 없는 지경은 되어야 비로소 이제 예수를 믿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생명이 그리 단순하게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옳다고 여긴 자기 의를 육신에서 벗어내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이 그리 쉽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 안에 씨와 같이 심기고 성령으로 그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되어 육신으로 나타나기 시작하기까지 시간이 그리 짧지 않습니다.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이 시간이 걸리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산 세월이 길고 주장하던 의가 강할수록 오래 걸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거듭난 생명은 생명으로 비롯되어 살아가므로 생각과 행동 그 어느 하나 예외 없이 성경을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이 거듭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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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교회에서 듣는 설교 중에서 상당수는 도덕에 관한 것입니다. 사회 윤리적 관점에서 어떤 상황에서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또한 평소에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를 설교합니다. 대부분의 내용이 도덕시간 같은 내용인데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이유가 학교 도덕시간에는 ‘사회와 국민으로서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인데 반해, 설교에서는 그 이유가 단지 ‘예수를 믿기 때문’으로 바뀐 것뿐입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도덕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래야 천국에 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설교를 하는 이유는 교인들에게 좋은 이야기를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의 신앙관이 행위로 의로워지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예수 믿는다는 것의 본질이 행위에 있다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나은 본질적 요소를 안다면 당연히 그것을 전할 것인데, 전하는 내용이 전부 도덕적인 행위를 권면하는 것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는 것이나 혀를 금하거나 제어하라고 또 재갈을 물리라고 하는 것이나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것과 같은 이 모든 것을 일일이 행위로서 지켜내는 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육신의 행위인데 이를 제어하기 위하여 육신의 능력을 가지고 제어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보안 시스템은 결국 사람에게 뚫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문제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행위 규범은 결국 지켜야 천국이든 하나님 나라든 갈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다 지켜야 하는데 도덕시간처럼, 윤리 행위 규범으로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 이래로 대부분의 인생들이 그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들의 눈에 그것이 최상의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더 나은 것을 보기만 하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그것을 추구할 텐데 그것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달리 더 나은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게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지켜가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행위 규범의 대부분은 사도들이나 구약의 율법에서 나온 것이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행위 규범적이 관점에서 말씀하시지는 않았음에도 예수를 믿고 그 말씀을 지키려는 인생들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의 눈에 예수님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즉 책으로 보면 행간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하고자 한 것은 행위 규범이 아니라 존재 규범인데 예수님을 믿는 것을 행위 규범에 두고 있다는 것은 예수를 모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담 이래로 어떤 인생도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서 모두 지켜낸 인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은 나서 누구나 죽는다는 것과 동일한 명제입니다. 이 정도가 되면 적어도 바보가 아닌 이상 성경은 행위 규범이 아니라는 것을 알 법도 한데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둡고 예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게 몸이 교회에 다닌다고, 자신이 교리 문답에 ‘아멘’이라고 말했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쯤 되면 ‘이게 아닌가?’라는 생각 정도는 할 수 있어야 정상인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도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지켜내지 못함에도, 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행위를 요구하시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과 사도들이 이를 요구하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고 하고 말을 조심하라고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도 예외 없이 모두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위를 전하지 않은 예수님을 믿은 제자들과 사도들이 행위에 대한 권면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에 대하여 고찰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정말로 성경을 신학으로 공부하고 싶다면 이런 것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지, 행위로 하는 것에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방법을 구할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왜 우리가 지키지도 못할 행위를 성경이 요구하는지, 그러면서 다 지키라고 하는지, 또 한 편으로 보면 예수님은 행위를 구하지 않으셨는데 그 제자들과 사도들은 왜 그것을 권면하고 있는지 이런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 성경을 제대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을 제대로 묵상하면 성경은 도덕책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물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성경을 도덕 윤리 책으로 알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들은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지켜내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합니다. 자기들 생각에는 자신들이 성경은 도덕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 여기지만 실상은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결국 성경의 본질을 종교적 윤리 책으로 만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하라, 또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단순히 그 행위를 본질 혹은 타켓으로 두고서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다. 물론 그 행위가 가져올 지옥에 가는 것과 같은 결과 또한 본질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은 행위는 존재로부터 나오는 것이기에 그런 행위를 지켜내는 존재가 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누구며, 스스로 있다고 하시는 그 존재성이며, 생명이라고 하시는 이 모든 것이 바로 성경은 존재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의 증거입니다. 단지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들이 가진 의로움이 자기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닫아 버렸기에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이것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빛이 왔는데도 사람들이 알지 못하더라고 하신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사람들도 서로의 관계에서 상대가 어떤 말을 하면 그 말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욕을 해도 괜찮은 경우가 있고, 칭찬 같이 좋은 말을 해도 모욕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어 있기도 한 것입니다. 또한 자녀들에게 공부하라고 하는 것도 아이들이 공부하는 행위 자체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기 때문이지 공부하는 행위 자체가 본질이 아닌 것입니다. 이렇듯 행위는 언제나 의(도)의 표현일 뿐 본질은 아닌 것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사도들이 행위를 전하지 않은 예수님을 전하면서 행위를 권면하는 것은 그 행위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 정도에 생각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어둡고 자기 옳은 대로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안타까운 것은 그러면서 자신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고, 구원을 받은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에게 구원이 없다고 여기면 듣기라도 할텐데 말입니다.


제 아무리 대단한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도 율법이나 성경을 문자 그대로 다 지킬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음욕을 품은 자 마다 이미 다 간음한 것이라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도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설교 시간을 윤리 강연 시간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단지 윤리적이어야 하는 이유를 성경에 결부시키면서. 그러나 성경의 모든 행위 규범적 말씀은 그런 행위를 하는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지 그 행위를 잘 지켜 행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생각해보면 개는 개 노릇하는 것이 하나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 개 노릇이 가진 근원적인 곤고함은 있겠지만 그 근원적 곤고함(집 밖에서 잔다는 것과 같은)에도 불구하고 본성이 그러하므로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전에 김 아무개 교수의 딸이 돼지우리에 발가벗고 뒹굴면서 돼지가 되고 싶다면서 사진을 찍고 난리를 친 적이 있는데, 그런다고 몸이 돼지가 되지는 않겠지만 그 정신이나 정체성은 하나님 앞에서 돼지보다 나을 것이 하등 없는 존재임을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행위는 결국 본성에서 비롯된 결과이고 다음 공정입니다. 본성이 먼저 있어야 행위가 비롯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려면 예수님과 같은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되는 것이 먼저지, 성경을 몸으로, 행위로 지켜내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따라서 사도들이 전하는 각종 행위 규범은 그 행위를 몸으로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라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행위를 구하지 않으셨는데 제자와 사도들이 행위 규범을 권면한 것은 예수님이 전한 생명을 가지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들이 체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전한 본성이 자기 안에서 거듭난 생명이 되는 것을 경험하고서 자기 삶을 보니 성도들에게 권면하는 삶을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렇게 살려고 노력해도 되지 않았던 것들이, 또 그렇게 살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조차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인하여 그렇게 살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그 사도들이 전하는 말씀들 속에 있는 윤리 규범과 같은 것은 그 행위를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그런 행위를 행하게 하는 본성을 가진 생명이 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것이 보이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는 것이고, 이것이 보이지 않으면 성경을 윤리 책으로 보는 자들이 되는 것입니다. 전자는 하나님의 아들이고 후자는 회 칠한 무덤과 같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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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자기 행동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 ‘화를 내지 말라.’는 말씀이 있으면 그것을 지켜 내려고 화나는 순간에도 화를 참으려고 합니다. 그렇게 화를 참으려면 결국 화를 억제해야 하고, 이를 위하여 신념과 의지를 동원합니다. 화가 나는 순간 성경 말씀을 떠 올립니다. 더 정확히는 성경을 지켰을 때의 보상이나 지키지 못했을 때 벌을 생각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데 이게 잘 되지 않습니다. 사람에 따라 각자가 강점을 가진 영역에서는 되지만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일에 들어가면 아담 이래 모든 인생들이 인생을 살 동안 그렇게 신념과 의지로서 성경을 지켜낸 자가 없었고, 없으며, 앞으로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거나 아니거나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여기에 여러 가지를 가미합니다. 악한 생각이 들 때 육신을 괴롭히기도 하고, 학문으로 연구된 세상의 좋은 방법과 시스템들을 도입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당근과 채찍을 동원합니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에 교회에 가면 사탕을 준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런 여러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렇게 해서 성공한 사람은 아직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종교, 어떤 세계에서도 말입니다.


그러면 왜 그것이 안 될까요? 사람들의 생각처럼 자기 의지가 부족해서? 자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아니면 인생이 연약해서? 그게 아닙니다. 이는 성경대로 살기 위해 관리와 통제를 맡긴 자기 의지와 신념과 생각 역시 성경대로 살아야 하는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게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악으로 악을, 욕으로 욕을 갚지 말라고 하니 화가 날 때 참고, 다른 사람들이 악한 행동을 할 때 왼뺨을 들이대듯 자신은 선함으로 대하려는 것이 되지 않는 것은 악으로 악을 갚고 싶은 마음이나 그것을 보고 왼쪽 뺨을 들이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결국 같은 자기 육신 안에 있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같은 것에서 나온 것끼리 서로를 제어하려 하니 때로는 이것이 이겼다가 때로는 저것이 이겼다가 하는 것입니다. 단지 상황이나 경험과 같은 것에 종속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삶을 성경대로 이끌어가려면 우리 육신 안에서 나오는 것, 제어할 어떤 것이나 제어할 권한을 가진 것이나 다 육신의 것이라면 그것으로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려면 육신보다 근원적인 것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본성인 것입니다. 우리가 제어하려는 육신의 모든 것이 다 우리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이 본성이 바뀌지 않는 이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거듭남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바뀌지 않는 이상 본성은 바뀌지 않는 것입니다. 본성은 생명의 현상이고,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생명이 바뀌지 않았는데 성경을 지킬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역설적으로 자신이 성경을 지키려고 아주 열심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자꾸 실패해서 기도할 때 마다 회개부터 해야 한다면 생명이 바뀌지 않은, 거듭나지 않은 생명이라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욕으로 욕을, 악으로 악을 갚지 않기 위해서는 생명의 본성이 바뀌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본성이 바뀌지 않고, 거듭난 생명으로 악이나 욕을 대하지 않는데 그것을 이겨낼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욕을 먹는 것과 악을 당한 것보다 더 높은 수준의 본성이 있어야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본성이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이고, 행위를 본질로 보지 않는 것이며,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이며,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아래로 내려가서 종과 같이 섬기는 것이 의로운 것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가는 것을 의로 여기는 본성으로 바뀌지 않는 이상, 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본성으로 세상이 가진 악이나 욕을 대하지 않는 이상은 그것을 이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이김이 되시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인함인 것이지, 군병들에게 맞서 군사로 맞서 이기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육신이 악으로 곤고해 졌을 때 육신의 신념으로 그것을 이길 수는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앞에서부터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한 것으로 애매한 고난이 있습니다. 그 고난이라는 것이 바로 세상이 다들 위로 가는 것을 의로 여기는 중에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은 낮은 자리로 가기 때문임을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악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은 낮아지는 것을 악한 것으로 보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은 낮아지는 것을 의롭고 선한 것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으로 악을 갚지 않으려면 신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달라져야 하는 것입니다. 즉 거듭난 생명의 본성이 아니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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