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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3장에는 아주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노아 홍수 때에 불순종한 사람들이 있는 옥에 가서 영으로 전하셨다는 말씀입니다.(벧전 3:19-20) 이것을 두고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고 부활하기 까지 3일의 시간 동안 지옥에 다녀오셨다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성경을 본다면 예수님 이후에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없이 지옥에 간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지가 또 문제가 됩니다.


사실 이런 문제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로마서(1:19-20)에서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을 주셨기 때문에 핑계치 못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지옥에 갔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이 주신 것을 어긴 결과인 것입니다. 따라서 성경을 통해서 윤회설을 주장하고 싶지 않다면 패자 부활전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렇듯 성경에서 아주 어려운 부분을 만났을 때 이런 부분을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하여 잠깐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그런 부분은 실제로 우리가 알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어려운 것은 먼저 그것을 기록한 사도들이 상당한 영적 단계에서 체험적인 것을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는 당연히 그 장성한 부분에 이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것을 단지 성경을 공부하면 모든 것을 다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 의존하여 억지로 알려고 하면 곤란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은 공부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어려운 부분을 기록한 사도의 영적 장성함에까지 영이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성장 없이 공부해서 영적 세계가 깊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신학교에 있는 어리석은 자들이나 하는 생각입니다. 만인을 위한 복음이 공부해야 깨달아진다고 여기는 것은 공부한 사람만을 위한 복음으로 차별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구분 없이 주신 것을 교만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이 구분하는 것이니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그것은 기본적으로 성장이 없는 존재들의 향연입니다. 공부해서 영이 자란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생명의 법이 아니라 가공과 제조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이 공부해서 성경의 모든 부분을 이해하려고 하는 이유는 성경의 모든 것을 지켜야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 생각은 틀린 것이 아니고 실재로 성경은 그 말씀하시는 바를 다 지켜 행하여야 하는 것이지만 그렇다고 문자 그대로 다 지켜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아니 문자 그대로 지키라고 쓴 것이 아닙니다. 심청전을 효도하려면 바다에 빠져야 한다고 쓴 책이라고 여긴다면 몰라도.


성경은 생명에 관한 말씀입니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bone)으로 온전합니다. 그리고는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살아감에 있어 장성함이 있는 것입니다. 아기가 태어나면 걷는 것은 고사하고 목도 가누지 못하고 말도 못하지만 한 인간으로서 온전합니다. 법적으로 주민번호를 받아 법인이 됩니다. 선거권과 같은 것은 인간 존재 정체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역할에 관한 것일 뿐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진정으로 거듭남을 생명의 사건으로 본다면, 다시 말해서 거듭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난 생명의 온전함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장성한다는 것의 의미도 압니다.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그 삶의 영역일 넓어짐과 같이 살면서 마주하는 일들을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대하는 것이 더 많아지는 것이 장성함입니다. 그것은 모든 것을 그렇게 하지 못한다고 거듭나지 않은 것이 아님도 안다는 것입니다.


이 생명의 관점을 가지면 성경을 안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반대로 또 성경을 모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압니다. 성경을 보면서 어떤 문구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성경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고, 성경의 말씀대로 행동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이 목욕하지 않은 것인지, 발을 씻어야 하는 것인지 안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3장)


반면에 성경의 작은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성경을 다 어긴 것으로 여기지는 사람이나, 성경의 문구 하나가 이해되지 않으면 성경을 모른다고 여기는 사람은 이게 목욕을 하지 않은 것인지 발을 씻지 않은 것인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대충 아라고 대충 지켜도 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생명은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하여 자기 안에 답이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갓 태어난 병아리도 매가 자신에게 위협이 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을 지키고 아는 것에 있어 성공과 실패 모두를 돌아봄에 있어 그리스도의 본성과 그 생명의 관점에서 대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바로 거듭난 생명으로 사는 모습인 것입니다. 생명은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다 생명으로 대하기 때문입니다. 기쁜 일이나 슬픈 일이나 다 사람으로서 그것을 대하고 느끼는 것입니다. 사람이 슬픈 일을 당하거나 조성했다고 개가 되는 것이 아니듯,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어떤 일들이 때로 성경적이지 못하였다고 거듭나지 못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성경적이지 못했던 것을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미 목욕한 자로서 발을 씻는 일이 되겠지만,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해도 육신으로 그것을 지켜야 온전한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으로 지켜내었다면 그것은 오히려 성경을 지켰어도 거듭나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와서 율법을 잘 지켰다고 말한 사람과 같이.


우리가 성경을 대할 때에 이 생명의 관점을 가진 자가 된다면, 즉 거듭난 생명으로서 성경을 대한다면 성경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자람에 따라 또 시절을 좇아서 과실이 맺힘과 같이 어떤 부분들은 어느 때에 이해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관점을 가졌다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적인 것을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즉 성경의 모든 부분을 이해하여야 성경을 아는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온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심청전을 읽고 인당수가 어딘지 모르고, 육지에서 얼마나 떨어져서 바다에 빠져야 하는지 몰라도 효도를 하면 온전한 것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다른 사도들이 언급하지 않은 부분을 베드로전서 3장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옥에 가서 복음을 전하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이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는 영적 세계에 예수님께서 가서 복음을 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서두에 언급했듯이 문제가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 관념이 그렇다면 예수님이 주기적으로 가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 베드로 사도가 이 말씀을 전할 때까지야 예수님이 가서 전했다고 쳐도 그 다음에 죽은 사람은 또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으니 그때는 다르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런 안목은 직접 예수님을 대면해야 하는 것이니 동양이나 아시아 그리고 인디언들과 같은 사람들의 문제는 또 어떻게 할 것인지 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본질적 맥락을 알고서 봐야 합니다. 그것을 알면 때로 대하고 있는 성경의 직접적인 내용을 바로 알지 못한다고 해도 시절을 따라, 또 자기 영혼의 장성함을 따라 알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본질적 맥락에서 보면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가 된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에 어느 한 부분만 온전히 자기 이야기가 되어도 성경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이기도 합니다. 생명이란 생명의 어느 부분에서 채취한 세포라도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듯이.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께서 육체로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사셨으며 그 영으로 <옥>에 갇힌 자들에게 전파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어려워보여도 심청전은 그 내용이 전개되는 내내 효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이 본질이듯 성경이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본질적 맥락에서 보면 됩니다. 성경은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본질적 정체성을 회복시키는 것을 본질적 맥락으로 삼고 있다는 관점에서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옥을 단순하게 파편적으로 지옥으로만 보면 아주 어렵지만 옥이라는 것은 구속된 상태를 말하는 것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드라마의 대사처럼 그냥 성실한 무기수와 같이 구속된 삶입니다. 알고 보면 그것이 사실 지옥이나 감옥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옥이란 바로 구속이란 개념이 형식화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옥에 갇혔다는 것은 바로 인생이 구속되어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즉 죄에 빠져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옥에 갇힌 듯 산 사람은 죽어서도 살던 것과 같이 지옥에 가는 것입니다.


그들의 죄, 그들이 구속된 곳은 다름이 아니라 방주를 예비하지 않는 자리라는 것입니다. 방주를 예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 섞이는 것에 대하여 구분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좋은 것이 뒤섞인 것을 인생의 존재 갈증을 해갈하는 물이라면 마셔대는 세상의 가치관에서 구분되지 않는 삶을 산다는 것이 바로 방주를 예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옥에 갇힌 것이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죽은 자의 정체입니다.


또한 노아의 홍수 때에 사람들이 방주를 만드는 노아를 보고 비웃었는데 그렇게 방주를 비난하는 안목의 자리가 바로 옥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서 노아를 비웃은 것은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것만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육신과 같이 눈에 보이는 것만 본질로 여기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옥에 갇친 것이고 죽은 자리인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와 같이 눈에 보이는 형식만 본질로 알고 있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셔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즉 육신은 도구라는 것을 보이시고 영이 본질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이셨다는 것이 바로 죽은 자들에게 영으로 전하셨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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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이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가 되는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지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사신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의 본성은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이유인 세상적인 이김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에 다니면 하는 일이 잘 된다는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세상에서 흉악한 죄인들이 처형되는 십자가를 지는 것이었는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살면서 하는 일이 잘 안되면 교회에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즉 그리스도의 정체성과는 반대의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인 자신들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주장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불법을 저질러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되지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정직하고 정의롭게 살아서 성공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생각은 정말로 바보 중의 상 바보들의 생각입니다. 방법만 다르지 성공을 바라는 것에서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따지면 교회에 다니지 않아도 더 정직하고 청렴한 사람들이 천지에 널렸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정직하고 도덕적이라며,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믿기에 그렇다면서 세상에서 하는 짓과 똑같은 짓거리를 하니 ‘개독교’라고 욕을 먹는 것입니다. 어쨌거나 현재의 기독교가 추구하는 것,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에 있어 하나님의 이름으로 더 정직하고 성실하며 도덕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구원이나 거듭남은 물론이고 죽어서 천국 가는 것과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는 무례함이 더해진 죄인들일 뿐입니다.


베드로전서 2-3장에 이어지는 ‘고난’은 남들은 반칙하는데 교회에 다니니까, 예수 믿으니까 반칙하지 않고 돌아서 가느라 수고하는 고난과 같은 저급한 것이 아닙니다. 이 고난은 의로운데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심(벧전 3:18)과 같은 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고난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두고 남들처럼 쉽게 가지 않기에 겪는 고난이 아니라, 남들이 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의로움과 이긴 것으로 여길 때에 반대로 낮아지는 삶을 가는 것이 고난인 것입니다.


이 부분은 정말로 기독교 신앙의 근간이고 지금의 교회들이 크게 오해하고 있기에 돌이켜야 하는 부분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보이신 것과 반대로 가면서 자신들이 예수를 잘 믿는 줄 알고, 죽으면 천국 갈 것이라고 착각 속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진리라며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욕망을 채울 도구로 사용하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신앙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기에 하나님의 의에 대한 절대적인 존재인데, 그 의에 도전하는 죄악 중에 있는 자들의 주장에 이끌려서 십자가에 처형되시는 것까지 순종하셨는데,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이 예수를 믿는 신앙에 대하여 도전하는 사람들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탄의 아들이라며 대항하면서 그것이 주를 위한 것이라고 망상에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에 대한 자기 의조차 내려놓는 것인데, 예수를 믿고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것은 다 놓아도 하나님에 대한 의는 내려놓지 못하는, 아니 내려놓으면 안 되는 것으로 여기고 오히려 그것에 대항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 때문에 예외 없는 법칙이 존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한 의는 내려놓는 것인데 그 하나님의 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의 의를 믿는다는 그것마저 내려놓아야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본체이시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손상되는 것인데 그것에 순종하신 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고, 이 블로그에서 지속적으로 말씀드리는 것, 십자가의 도는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세계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자기 믿음마저 내려놓고서 오히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주장에 자기 육신을 내어 주는 것이 진정한 십자가인 것입니다. 


자기 육신을 내어 준다는 것은 단순히 휴지를 한 번 줍는 것 같은 수고에서부터 육신의 목숨을 드리는 것까지의 모든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한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그 생명을 가졌으면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까지 할 수 있을 것이고, 생명을 가지지 못했다면 때로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기도 하나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를 지키려 한 자기 의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아무 소용이 없다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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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세계 안에서 소위 말해서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의 모습에는 의외로 낮아진 예수님의 모습과 등진 모습이 많이 있습니다. 사실은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낮아진다는 것을 태도나 말을 공손하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실은 만남과 관계를 이루는 본질의 흐름에서 찾아야 합니다. 신앙인의 만남에서는 성경에 대하여 얼마나 아는지, 능력을 얼마나 행할 수 있는지, 교회나 신앙 세계에 이룬 공적이 어느 정도인지가 관계를 이루는 본질입니다. 


목사를 만나면 성경에 대하여 더 안다는 것이 이미 정해져있고, 40일 금식이라도 하면 이미 그것이 관계의 운동장을 기울입니다. 공로가 많은 장로도 말할 것 없습니다. 신앙 안에서 만난다는 것이 성경과 기적과 영광을 위한 만남이니 그런 것이 바로 만나는 관계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것들이 낮은지 높은지가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낮아짐의 문제인 것입니다. 성경에 대하여, 능력에 대하여, 또한 공로에 대하여 자신을 낮추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공손한 자세를 취해도 실상은 높은 자인 것입니다.


가끔 교회 안에서 목회자라는 작자들이 연루된 각종 범죄가 발생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 때문이기도 합니다. 이미 그 만남을 이루게 하는 관계의 근본이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전혀 낮지 않은 자리에서 말을 거룩하게 하고, 옷을 경건하게 입고, 태도를 공손하게 한다고 낮아졌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외식이고, 높아진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낮은 자리에 있는 것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에게 그 소망을 물어오는 사람들을 대할 때에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신앙에 대하여 물어오는 이들에게 더 알고 가졌다는 입장이 아니라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하라는 것은 그들이 스스로 알 수 있도록 몸을 드려 수고하라는 것입니다.


온유라는 것이 겸손하게 생명으로 대하는 것이고, 두려움으로 하라는 것이 소망을 물어오는 이들을 대한다는 것은 그들의 주장 앞에 자신이 죄인이 될 수 있기에 두렵기도 하고, 무엇보다 그 관계가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관계이기에 두려움으로 공손함으로 대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때껏 알고 겪은 것과 같이 목사가 하라는 식으로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물어오는 이가 주장하는 주장에 가진 자가 자기 자신으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어떤 것이라도 더 가졌다는 것이 분명하다면, 그 더 가진 이유는 단지 하나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가지지 않은 자를 위한 수고입니다. 수학에 대하여 더 가진 수학 선생은 수학을 알지 못하는 학생을 위하여 자기 육신을 수고하여 가르치고, 때로는 학생이 처음 대면에서 자지 주장대로 문제를 풀어가더라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이 아님을 알기 까지 참아내는 수고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이 온유와 두려움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더 가진 자는 세상에 없는데, 자기들이 하나님을 안다면서 예수님을 향해서 ‘그 꼴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수용하시므로 십자가에 끌려가심을 순종하셨던 것이 바로 온유와 두려움으로 소망을 물어온 자들을 대한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 역시 예수님으로부터 그렇게 소망을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들의 성직자(물론 형식이 성직자일 뿐이지만)들은 신앙의 의문을 가진 사람을 대할 때에 자신이 확신하는바 하나님을 주장하고, 심지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물어 오는 이가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여 괴롭게 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고, 또 교회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이라고 하며, 심지어 마귀의 소행이라며 저주하기 까지 합니다. 이것은 신앙에 대하여 깊이가 더 있다고 생각할수록 더 심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이런 모습은 단지 운유와 두려움으로 사람을 대하지 않는 정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소망에 대하여 물어오면서 때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는 사람으로 인하여 곤고해지는 것을 신앙 없는 것으로 정죄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은 그런 것 앞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것인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하게 봐도 그 생명이 없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회 세습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일에 간섭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교회가 가는 방향과 다른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 향하여‘ 신앙 없는 영적 전쟁의 적’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럴 리도 없지만 교회 세습이 진정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여도 아니라는 사람들의 주장에 따라 철회하고 일이 흘러가는 것대로 두고 순종하면 그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 수 있게 되는 것이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교회에 반대하는 사람도 그 주장대로 하면 많은 손해가 발생하더라도 그 주장대로 하므로 손해와 수고를 감당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결국 스스로 자기 주장에 대하여 뉘우치는 고백 없이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소망이란 그런 것입니다. 결국 십자가와 같은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주장하는 의로움에 자기 육신의 수고를 내어 주는 것, 때로 그것이 목숨을 잃는 것이라고 해도 그렇게 하는 것이 십자가의 도인 것입니다. 결국 소망을 물어오는 사람도 무엇을 보고서 자기 스스로 깨닫고 고백해야 하는 것이므로 그들이 깨달을 수 있는 이미지(형상)를 보여주는 것이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사람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은 결국 십자가의 도와 같은 것이기에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며 십자가를 지신 겸손함과,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에 순종하신 예수님의 온유하심과 같이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삶에 대한 경외함과 두려움을 가지고서 사람을 대하는 것, 그리스도를 알기 원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고, 인생의 의미를 알고자 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이 온유와 두려움으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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