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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1장) 사마리아 같은 오늘날의 교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8. 4. 08:50 Writer : 김홍덕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하여 멸망을 당하고, 앗수르는 강제적인 혼혈 정책을 시행하므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의 혈통의 순수성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런 결과를 초래한 것은 당연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어떤 행위 규범을 범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어떤 행위에 대하여 일희일비하시는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에 행위란 생명의 본성에 수반된 것임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 아래에서 초래된 결과는 어떤 행위를 인함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그 존재의 본성대로 행하였거나, 그 존재의 정체성에 맞는 대접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나타난 결과인 것입니다. 즉 사마리아 지방이 강제적인 혼혈 정책을 당했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이 하나님이 정한 것과 세상의 것이 섞인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 맞는 경영을 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혼혈정책 아래 놓인 것은 그들이 성적인 문란을 인함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 앞에 간음한 자가 된 것은 성적인 간음이 아니라 정체성의 간음을 인함이라는 것입니다. 존재가 그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 아닌 다른 것과 짝을 맺는 것이 정체성의 간음입니다. 성적인 간음은 그렇게 정체성의 간음을 행하는 존재가 보이는 하나의 형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혼혈정책을 시행하는 앗수르의 침략을 받고 멸망하여 혼혈 정책 아래 놓였던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정한 존재의 정체성과 목적을 버리고 다른 것을 자신들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삼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배필로 삼은 것은 다름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의로움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와 세상의 의가 혼용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성전에 우상을 두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들 삶의 전반은 율법을 기반으로 한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것은 그들이 삶의 전반에서 하나님의 법을 버린 것을 인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과 세상의 가치관을 혼용하였다는 것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하신 하나님의 진노의 본질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 능동적인 심판을 하시는 경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의 백성들이 범죄 하였을 때에 이방인들이 쳐들어오게 되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물리치시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백성들이나 사람들을 난데없이 심판해서 벌을 주거나 하시는 것은 성경에 흔치 않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그 삶 자체가 사망 가운데 있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다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조그마한 잘못에도 일일이 참견하시고 벌을 내리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미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은 그 삶의 양식이 하나님의 말씀과 법에 준용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 쉰다거나 십일조를 하는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이 앞에 범죄 했다고 벌을 받는다는 것은 그들의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추출해내고 다른 것으로 치환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샀던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삶과 세상의 가치관에서 비롯된 삶이 혼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정체성의 간음 상태에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사실 지금 이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는 <큰 교회>에도 같은 모습입니다. 아니 오늘날 우리가 흔히 말하고 있는 대부분의 교회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일요일이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지만 결국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복이라는 세상의 가치관과 혼용되어 있는 모습이 그것입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의 생활양식 안에는 ‘그러면 벌 받는다.’는 식의 말과 관념이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그 벌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들의 행위를 보시는 분이 하나님일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가치관은 무당의 샤머니즘과는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샤머니즘에 불과한 신앙입니다. 물론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닙니다.


누누이 언급하였듯 여호와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에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다고 육신에 어떤 벌을 내리시는 그런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어떤 행동을 언급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화를 내시는 행동을 한다는 것은 그 존재가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여기시는, 창조의 목적에 맞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임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교회는 ‘십일조 하면 부자 된다.’, ‘기도 안 하면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스스럼없이 설교하며 말합니다. 그래서 그런 불행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성경공부를 하고, 또 기도하여 그런 화를 면할 뿐 아니라 종국에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성공했다는 자리에 이를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우시기를 바라고, 하나님께서 기쁘게 도우시도록 기독교적으로 행동하려 합니다.


그런 생각들이 모여서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건축하고 수십억 하는 음향기기와 영상기기를 갖추면서 ‘위대하신 하나님의 격에 맞게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으로 꾸미려 합니다. 그렇게 세상에서 좋게 여기는 것을 교회와 신앙 안으로 끌어 온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간음이고, 구약시대 선지자들이 그렇게 외쳤던 하나님 앞에 범한 죄인데 오늘날의 교회들은 자신들이 단지 예수님 이후 시대를 살고 있다는 그 하나 만에 근거를 두고 자신들은 전혀 구약 시대의 책망에서 무관한 것과 같이 구약을 바라봅니다.


물론 때로 구약의 말씀을 오늘 자신들에게 반추하기도 하지만 그것 역시 행위에 대하여 반추할 뿐 자기 정체성, 자신들이 하나님께 창조되어 하나님 앞에 존재하게 된 이유와 목적에 기인하여 반추하지는 않습니다. 바로 이런 모든 것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행한 간음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늘 바로 우리 옆에 앗수르가 침략한 이유가 상존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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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무시하는 것은 여러가지 이유나 명분이나 심지어 성경적 근거가 있어 보일지 모른다. 그들의 생각에 세상은 언제라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이겼다고 하셨으니 아마 목숨을 걸고 그것을 믿을 것이다.


또 하나님께 기도할 때나 간증할 때에 자신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때를 일컬어 벌레만도 못했던 시절이라고 말들을 하기에 자신과 달리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세상도 그렇게 여기는 생각과 말들도 많이 한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그 사람 안에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또 더 온전하게 되는 것에 대한 법을 알지 못하기에 앞서 이야기해 온 것과 같이 세상을 무시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자선을 베풀 듯 전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모습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세상을 대할 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더 온전하고 능력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바로 세상의 법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잘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에 관한 생각이다. 사람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할 때 그 이김은 다분히 세상에서의 성공에 관한 것이다. 세상은 사람들의 성공에 장애가 많고, 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불법적인 방법으로 성공하려고 하는 것에 반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기에 그것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성공을 도우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생각은 하나님이 도우시기에 하나님이 이기시는 것 같지만, 그 성취가 바로 세상이라는 것, 그리고 그 성취를 위하여 자신이 드린 것은 성경을 지키는 행위라는 것, 그리고 그런 관계를 정리하면 나는 하나님께 성경을 지키고 성경대로 행하는 행위를 드리고 하나님은 그것에 값을 매겨 상으로 복과 성공을 주시는 구조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오르고 싶은 피라미드 꼭대기에 하나님을 빙자하여 올라가고자 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거래를 제안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의 이런 마음을 하나의 사건으로 기록한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바벨탑>의 사건이다. 흙에 짚을 넣고 구워서 하늘에 이르려고 했다는 것은, 흙으로 만들어진 사람을 그 자신을 단련하여 하늘에 오르고자 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법으로 세상을 이길 수는 없다. 행여 교회에 다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고 해도 그게 더 문제다. 존재의 하나님께 행위로 거래하여 무엇을 성취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정체성을 버리고 공로와 행위를 의로 여기시는 신이 되었거나, 아니면 그 성공한 사람이 믿은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잡신의 보답일 뿐이기 때문이다. 교회에 다닌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다고 하신 것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지금의 신앙인들이 가진 생각과 같이 하나님을 믿어서 세상의 가치관이 귀하게 여기는 것을 다른 사람들보다 쉽게 혹은 더 크게 얻어내는 것에 관한 것과는 전혀 반대의 것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고 하신 것은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었다는 것은 더 이상의 실패가 없는 완전한 실패가 곧 세상을 이긴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식의 도덕적 역설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식적인 것이다. 어떤 세계에서 죄인이 된다는 것은 그 세계에 반하는 정체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죄인이 되었다면, 그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을 죄로 여기심을 안다면 세상에서 죄인이 되는 그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머리로는 성경 말씀을 생각하면서도 삶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을 좇아가는 것은 한 마디로 그 본성이 거듭난 본성이 아니거나 그 본성대로 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이 문제는 이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는 큰 교회가 아니라 존재의 신앙을 가진 이들,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도 크게 실수하는 부분이다. 즉 생명을 생명답게 표현하지 못하는 삶의 대표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으로 거듭난 안목으로 세상이나, 큰 교회의 신앙을 보면 자신이 가진 안목과의 차이를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그 차이를 잘 다스리지 못하면 그것은 이내 교만이 되고, 세상에 대하여 스스로 우위에 선 것과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심이 바로 이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많지는 않겠지만 생명의 안목으로 보면 처음에는 눈에 보이는 세상의 어리석음을 어떻게 할 수 없음에 당황스럽기도 하고, 일면 그것을 볼 수 있는 자신에 대한 자부심도 느끼게 된다. 그런데 바로 그 시점이 더 나은 선택 혹은 변질의 갈림길이기도 하다.


진정한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빠지는 큰 유혹이 바로 세상을 대하는 자신들의 태도에 대한 것이다. 생명으로 안목으로 세상을 볼 때 그 새삼스러움은 상상을 초월한다. 모든 것이 어리석게 보이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것은 하나같이 하나님의 생각과 달리 자기들이 가진 옳고 그름의 기준을 좇아 서로 이기려 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어이없기 그지없고, 한 편으로는 불과 얼마 전까지 그렇게 살던 자신이 그것에서 벗어난 상황에 감사와 영광과 거룩함을 인지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그런 안목을 주는 생명의 본성은 바로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시면서 보이신 하나님 아들의 생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세상의 안목과 전혀 다른 안목을 자신이 가지게 된 근원은 오히려 자기 눈에 보이는 그 어리석음 앞에 종이 되고, 그 어리석음에 빠져서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알 수 있도록 육신으로 살아 내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은 아주 큰 관문과 같아서 쉽게 그 너머로 가지 못한다. 필자가 사랑했고 사랑하는 공동체 역시 이 관문을 넘지 못했다. 복음을 가졌으나 그 복음으로 세상의 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무시하고 오히려 복음을 가진 자신들의 삶은 세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더 성공하고 좋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라 여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좋은 건물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고, 교인들이 성공의 자리로 가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는 자리로 가는 것을 보았다.


이렇듯 우리는 믿음이 세상을 이기는 것에 대하여 크게 착각한다. 생명이 없고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교회,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회로서 신학을 전공한 직업 목사가 설교하는 그런 교회는 세상의 성공을 위하여 하나님의 힘을 빌어 세상을 이기려 하는 어두움 중에 헤매면서도 자신들의 정통성을 신봉하는 망상에 빠져 있다.


반면에 많지 않은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공동체는 또 자신들이 얻은 생명의 근원이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 자신들 눈에 한 없이 어리석게 보이는 그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를 자기 생명으로 순종하여 얻은 생명임을 잊고, 자신들이 세상을 밝히 보므로 세상을 무시하고 또 자신이 세상을 이긴 것으로 착각하는 변질에 많이 빠진다.


그러나 그렇게 세상을 이기려는 사람들은 반드시 세상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 개독교로 비난 받고 있는 상황도 그렇고, 세상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경제적 문제나 사회적인 문제에 있어 자신들의 신앙대로 살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므로 다 형통할 것이라 여기다 결국은 세상의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큰 곤란함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세상 권세자들에게 굴복하라고 한 것을 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세상의 가치관에 자신을 내어주는 것이다. 세상에 진다는 것이다. 이기려 해도 지고, 스스로 자신을 내어 주어 지는 자리로 가도 지는 것이지만, 스스로 그 자리로 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을 좇아 가는 것이기에 영광스러운 것이지만, 자기가 가진 신앙과 생명이 하나님께로 왔으므로 세상을 무시하고, 자기들의 신앙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다 형통케 하실 것이라고 믿는 것은 온전한 것이 아닌 것이다. 세상은 그렇게 이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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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1:1-7) 하나님의 계획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8. 1. 07:17 Writer : 김홍덕

이렇듯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떠난 사람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즉 스스로 높아진 자,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정체성이 아닌 다른 것과 짝한 음행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그것을 외쳤습니다. 그것이 예언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사마리아가 들의 무더기 같고, 포도 동산 같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높은 것을 낮추신다는 것입니다. 또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낸다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 있는 돌과 같은 완곡한 마음, 또 돌과 같은 자지 자신이 스스로 정한 법을 다 제거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또 당연히 우상을 훼파한다고 하셨습니다.


미가를 시작하면서 먼저 예언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습니다. 예언이라는 것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사람의 상태가 어떤지를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고 그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체성이 정해지면 그 정체성에 따른 내일의 운명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세우신 뜻을 이루지 못하심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일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을 위하여 살게 하는 것에는 어떤 모자람도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계획과 뜻과 말씀을 아전인수 격으로 생각합니다. 즉 자신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일 중에서 선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일을 감당하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가면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일들이 자기들에게 많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하나님의 통치와 섭리 아래 있는 것으로 사람들이 보기에 회피하는 일들도 다 하나님의 경영하심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즉 사람들이 볼 때 놀라고 두려운 일도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그 두려운 일이 자기 일이 되는 사람들 역시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을 기대하고 지으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버리고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것, 특히나 그 옳다는 기준은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아비의 유전에 따라 얻은 것인데 그것을 좇아 살아갑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이 표현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은 진노인 것입니다. 즉 진노하심도 하나님의 성품이고, 그 진노의 대상도 역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성전에서 나오셔서 모든 우상을 훼파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은 기생의 값, 곧 간음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로 인한 재앙과 같은 것일 수 있지만 분명한 것은 이는 하나님의 온전한 경영과 성품의 표현이지 일시적 흥분을 참지 못하여 화를 발산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라는 신이 가지신 성품은 그 정하신 것이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죄를 지을 것을 예측하지 못하고 있다가 죄를 지으니 그것에 대응하시는 분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이 자기의 뜻과 하나님이 사람 지은 뜻을 다 볼 수 있게 하시고 그에 맞게 대하시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알고 하나님의 뜻 곧 사람을 통하여 그 성품을 나타내시고자 하시는 사람을 지으신 뜻을 분명하게 알고 세상의 경영에 부족함이 없는 하나님이심을 알고 믿는다면 세상과 사람이 그 하나님의 의와 뜻에 부합되는지는 자연스럽게 알 것이고, 그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어떤 반응을 보이실 것인지도 분명한 것입니다. 어떤 존재는 어떤 결과를 얻는지를 하나님께서 정하여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언이라는 것도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할 때 하나님이 어떤 반응을 하신다는 식이 아니라, 어떤 존재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면 그 존재 정체성에 따른 본성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에 하나님이 정하신 존재 정체성을 버리고 사는 것은 곤고한 일이 될 것은 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만든 물건도 그 용도대로 사용하지 않거나 용도의 범주를 넘어서 사용하려고 하면 이만저만 힘든 것이 아닙니다. 물속에서 다림질을 하려고 하면 그 기술적 노력이 어마어마할 것입니다.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정해진 것입니다. 다리미의 정체성을 알고 물의 정체성을 알면 그것을 물속에서 사용하면 큰 일이 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 성경의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으신 목적이 분명합니다. 그 하나님의 계획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며, 무엇보다 이 세상은 그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면 모든 것이 형통하게 되어 있고, 그 뜻에 반하여 살면 온갖 곤고함을 겪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인생의 고난의 연속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사람들의 삶이 하나님의 계획에 반하는 것이라는 증거이기도 한 것입니다.


다만 사람들은 형통이라는 것, 하나님께 복을 받는 것을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난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육신이 수고하고 섬기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형통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육신의 평안이 곧 하나님의 복이라 여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간음의 결과인 것입니다. 평안이 하나님의 계획이라 여기는 것은 바로 세상이 추구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렇듯 자기 육신의 정욕을 좇아서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 육신이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한 자리에 올라 평안해지는 것을 형통이라 선이라 또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한 것이고, 또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자리를 떠난 것이기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그 성소에서 나오셔서 높아진 것을 낮추고, 간음한 땅을 평탄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이 계획은 사람들의 타락을 기점으로 수립된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에 계획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서 자기 육신의 평안과 성공을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라고 여기면서 사는 곤고함은 이루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 자기가 원하는 것들이 성취되는 것을 맛보기는 하나 근원적으로 인생을 곤고한 것으로 느끼는 것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을 인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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