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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1:1-7) 하나님의 예언의 본질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7. 22. 12:40 Writer : 김홍덕

아이들이 어떤 물건을 만질 때 어른들은 그것을 제어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장려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위험한 물건을 만지려하면 급히 가서 물건을 만지지 못하게 합니다. 이는 그 물건의 정체성과 아이의 정체성을 고려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있는 예언들 역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는 사람, 즉 하나님 앞에서 어떤 행위를 할 때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반대로 어떤 행위를 할 때 벌을 주시는지를 신경 쓰는 사람들에게 예언서는 복잡합니다. 어떤 상황, 어떤 상태에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에 따라 장래에 복을 받을 것인지 벌을 받을 것인지 결정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행동들은 우상에게 절을 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면 잘 되고, 교회에 가면 하는 일이 술술 풀리는 반면, 기도도 하지 않고, 교회 목사가 말하는 것을 안 지키면 집안에 우환이 생긴다고 생각하는 모든 신앙 역시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입니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늘 미래가 궁금하고, 목사나 소위 말한다는 영발 좋다는 사람에게 가서 자신이 어떻게 할 것인지 묻기도 합니다. 장래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실지 알고 싶어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무당에게 가서 복채 내고 점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둘 다 어떤 행위를 해야 어떤 결과가 나올지를 알고 싶어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언은 이런 것들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우선은 어떤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가 되면 그 존재가 가진 본성대로 될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성경의 예언입니다. 결국 ‘너는 누구냐?’를 이야기하시는 것이 예언인 것입니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이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습니다. 그 내용도 사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이 무엇인 것을 외친 것입니다.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 악하다는 것인데, 행위가 악하다는 것은 그 악한 행위를 행하게 하는 자기 안에 본성, 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행위라는 것은 결국 그 속에 있는 것이 드러난 것이고,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 심령을 보니 악하다는 것을 선지자들이 이야기 한 것입니다. 속 심령에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이 없으니 그 행함 역시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할 리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의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과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구분하여야 합니다. 그것은 간단합니다. 사람 속 심령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자기 존재의 목적으로 순종되는지 아니면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세상의 일을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판단하는지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로 알고 산다면 자신의 주장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육신을 가진 자기 삶에서 육신에 거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도구로 순종하는 것임을 아는데 세상일에 대하여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하여 그러면 된다 안 된다 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은 어떻게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다른 사람의 삶이 어떠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강제하는 사람은 그 주장의 내용이 설사 종교적이고 선하고 도덕적인 것이라고 해도 주장한다는 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이유는 사람에게 없는 것입니다. 단지 자신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인 것을 알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악하다고 책망을 받은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관하여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 주장의 내용이 하나님이 뜻에 맞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전혀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멍청한 신이 아닙니다. 사람이 이렇게 해야 하나님이 온전해지고 말고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섬겨야 한다, 아니다 저렇게 섬겨야 한다 말들이 많습니다. 교파가 갈라진 것이 그 증거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악한 것으로 보시는 행위입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판단하는 기준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것을 선지자들이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큰 교회(이 블로그에서 말하고 있는 세상에서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교회)들도 미가 선지자를 비롯한 선지자들이 책망하는 대상의 본질 그 자체인 것입니다. 그들은 늘 세상을 바꾸려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언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 안에 어떤 의로움이 들어 있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의를 보고 그 사람이 어떤지를 선지자들이 말한 것입니다. 그것만 말하면 그 존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라는 유전자가 그 속에 있으면 사람으로 살 것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예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가서든 이사야서든 요한계시록이든 어떤 행위에 어떤 결과가 있을 것인지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존재, 하나님께서 보신 그 사람 심령 안에 어떤 것을 의로 여기고 있는지만 이야기 하면 그 사람이 가진 속 심령, 곧 생명의 정체성에 따라 행동할 것이고, 그 행동은 그 행동에 따른 결과를 수반한다는 것이 예언의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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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1:1-7) 하나님의 예언의 본질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미가 Date : 2018. 7. 21. 09:19 Writer : 김홍덕

구약 성경은 그 시대적 배경이 이해하는 것에 제법 도움이 되는데, 그 시대적 배경이나 인물의 특성과 같은 것은 어느 정도는 연구가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불확실한 것이 많고, 그나마도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기는 힘듭니다.


따라서 본문을 구구절절 해석하는 것은 어렵습니다만 반대로 성경이라는 책이 전하는 기본 주제를 바탕으로 들여다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성경 속의 특정 부분이 아무리 어렵게 느껴진다고 해도, 결국은 성경 전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인하여 기록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미사 선지자는 우리가 잘 아는 이사야 선지자와 동시대의 선지자라고 합니다. 특이한 것은 그 아버지가 누구인지 언급이 없다는 것인데, 보통 이런 경우 그 신분이 드러낼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의미가 강하다고 하니 쉽게  흙수저였다고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주요 예언의 내용들은 남왕국 유다에 많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미가는 선지자인데, 좀 쉽게 말하면 예언가입니다. 무엇인가를 먼저 남들보다 미리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금리나 복권 번호와 같은 것을 미리 아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을 미리 알고 전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언이라고 하면 단순하게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선지서들의 내용들도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이방 나라가 쳐들어와서 모든 것을 부수고 여자와 아이들을 노예로 끌고 가는 <일>이 생길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사실 그렇게 서술되어 있기도 합니다.


문제는 그 예언을 주시는 하나님의 정체성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과 같이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한 <행위>를 자행함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고 이를 인하여 다시 사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은 행위를 보시는 분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를 보시고 의롭게 여기는 분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그런 분으로 여기고, 또 하나님의 예언도 그 맥락에서 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무당이나 신접한 자들이나 영화나 소설 같은 것에 나오는 퇴마 이야기들과 별다른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단지 심판하고 재앙을 주관하는 절대자가 하나님이 아니라 각종 잡신으로 바뀌는 것 이외에 모든 것이 다 같은 구조가 됩니다.


많은 기독교인들, 특히 신학이라는 학문을 공부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은 그 차이가 하나님의 거룩함(구분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남의 물건을 훔친 것은 절도가 아니라고 할 수 없듯,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 일이 달라지고 그것을 예언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관하신다고 그것이 행위를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아닌 것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그런 것과 궤를 같이 하지 않습니다. 아니 근원적으로 다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이름 <여호와>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심이 그것입니다. 풍요나 다산이나 무엇 행위를 의롭게 여기는 신이라는 식의 정체성이 아닙니다. 즉, 하나님의 예언은 어떤 존재에게는 존재의 본성에 따라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언은 어떤 존재에게는 존재의 본성에 따라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을 향하여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였다고 외칩니다. 그 선지자들이 말하는 죄는 바로 하나님이 죄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가 사람들에게 ‘너희가 죄를 범하였다.’고 외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는 것을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의 예언을 이해하려면 당연히 하나님께서 무엇을 죄로 여기시는지에 대하여 상고함이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런 상고함이 없이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를 선지자들이 말하는 죄로 여과 없이 동일시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는 행위, 곧 Do에 관한 것이고, 행위를 규제한 법률이나 도덕을 어긴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 짓 하면 벌 받는다.’는 일상적인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라는 말의 어원이 ‘자리를 벗어나다.’라는 의미를 가진 ‘하말티아’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정체성은 흔히 사용하는 개념은 아닙니다. 일상적이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의미는 어떤 존재가 가진 정체성이라는 의미로, 존재가 존재하는 목적과 의미가 근간입니다. 즉 존재의 정체성은 존재의 존재 목적입니다. 따라서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존재가 존재하는 목적을 벗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으로서 사람들에게 죄를 범하였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라는 존재에게 두신 목적이 있는데 사람이 그 목적을 벗어났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은 사람과 어떤 존재적인 관계를 계획하셨습니다.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형상’은 이미지(image)로 사람이란 존재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진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즉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는 것을 삶으로 표현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신데 사람들은 행위로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 근간입니다. 그래서 궁리한 끝에 성경을 읽고 그것대로 <행하면>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의롭게 여기시고 자기 장래에 일어날 <일>에 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즉 어떤 행위를 하면 하나님께서 상이나 벌을 주시며, 그 상과 벌이 어떤 것인지를 미리 아는 것이 예언이라고 생각하는 그 생각 자체가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의 근간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어떤 행위를 드려서 장래에 위험을 제거하고 복을 받을까 고민하고 또 자기 행위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 예언을 들어 알고 싶어 하는데 그런 생각과 가치관과 욕망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언이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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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많은 과정을 건너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 인간의 타락에서 회복되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뜻을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로 알고 그 의의 본질적 내용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임을 아는 신앙을 가진 이들 중에서도 그런 모습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즉 인간의 타락을 벗어나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알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도 세상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를 믿으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그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향하여 ‘그러면 안 된다’는 입장에서 꾸짖듯이 복음을 전하며 이르기를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도 그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향하여 긍휼함 없이 생명을 가졌다는 것을 차별의 기준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그 결정적인 증거가 변질된 공동체 생활이다. 자신들과 다른 의를 가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피곤하고 불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에다가 자신들 만의 공동체 공간을 지어서 폐쇄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 공동체 공간이 늘 열린 곳이라고 말하기도 하나, 물리적인 문이나 벽의 문제가 아니다. 자기들의 공동체가 있다고, 생명을 누리는 곳이 있다고 해서 따라가서 앉아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구분되는 느낌이 드는 행태를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를 보이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진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인함이다. 성경에서는 사람들이 때로 하나님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함에 대하여 스스로 자신을 벌레와 같다고 고백하기도 한다. 그것은 말 그대로 스스로 고백하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겁도 없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컬어 벌레 같다고, 복음을 전해도 알아듣지 못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들을 종합하여 정리를 하면 복음을 알기에 세상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을 무시하는 것은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세상을 무시한다는 것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생명을 온전히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지 않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를 달리 한다는 것이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은 목적을 알고 살아가기 때문에 왜 사는지도 모르는 인생들과 차별된 존재라는 생각에서부터 그런 문제성 있는 태도가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가 자신이 가진 것이 귀할수록 자존감도 높아지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더 귀해질수록 더 낮아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죄인이 되어서 십자가라는 처형을 당했다. 그 이름이 예수이고 그를 믿는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의 본질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셨다고 믿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또 자신과 같은 사람을 만드신 뜻을 안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것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뜻이 바로 자신이 무엇을 가졌든지 낮아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이 법을 벗어날 수 없다.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존재 목적으로 아는 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율법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이나,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것이다. 물론 세상의 법을 어겨서도 무시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믿는 그 예수님도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죽임을 당했는데 지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행해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 닥쳐라’는 식의 태도를 가지는 것은 어이 없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온전한 신앙에서 변질이 생긴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 다움을 유지해야 하는데, ‘내가 내 본성대로 사는데 어쩌라고?’라는 식으로 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를 비롯한 많은 사도들이 서신서를 통하여 성도들에게 권면한 내용이 바로 이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참고로 사도들이 성도라고 하는 사람들은 교회에 다니며 세상의 성공을 바라는 사람들이 아니다. 성도 혹은 형제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존재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은 그리스도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 생명이 생명 답게 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은 세상에 져서 십자가를 짊으로써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와 뜻을 보이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나서 그 본성을 가지지 못한 이들을 낮게 보고, 훈계하려 하고, 적선하듯 복음을 나누어 주려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본성과 다르다. 생명 다움을 상실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변질이다.


이 신앙 변질의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세상을 무시하고, 자신들이 복음을 가졌기 때문에 자신들이 살아가는 대로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리스도다운 것이 아니다. 그런데 그 마음에 워낙 귀한 것을 가졌고, 또 인생의 존재 목적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께 성공을 기도하던 어두움을 벗어나서 밝은 눈을 가지고나서 보니 세상의 모든 것이 어리석게 보이고, 만만하게 보이는데 이것이 바로 선 줄로 아는 것이다. 여기서 바로 넘어질까 조심하고 근신하는 것이 나오는 것이다.


문제는 이것을 아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손바닥 뒤집듯 되는 것도 아니다. 시간도 오래 걸린다. 그래서 인내라는 권면이 있고, 또 장성하기까지 자라라는 권면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때를 기다리고 근신하지 못하면, 복음을 가졌기에 세상의 금융을 우습게 알고 성도들끼리 교제하는 것이 돈을 마구 쓰고, 가족이 예수를 믿지 않고 모르니 집을 나와서 자기 교회 교인들과 모여 살고, 신앙 생활을 같이 하던 성도들을 자기들과 신앙이 다르다는 이유로 훈계한답시고 비난하면서 심지어 그것을 사랑이라 말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타락한 신앙의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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