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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1-11) 예수를 아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후서 Date : 2018. 11. 20. 10:10 Writer : 김홍덕

우리는 일상 속에서 ‘안다’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안다는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것 보다 훨씬 깊은 의미가 있다. 일례로 유대인들이 ‘저 여자를 안다.’라고 하는 것은 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이와 같이 안다는 것은 단지 인지하고 있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이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안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도 이와 같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안다는 것에 대한 아주 중요한 속성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이 베드로후서에 나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1장 2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은혜와 평강이 점점 많아지는 삶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 보다 더 핵심적인 말씀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자신이 영생한 생명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고, 은혜와 평강이 더욱 많아지는, 자라듯 점점 더해지는 상태인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자신의 상태가 그러하지 않다면 당연히 예수님을 모르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를 안다는 것은 은혜를 안다는 것이라고 하신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은혜라는 것은 자기로선 할 수 없는 것을 주신 것을 말한다. 흔히들 말하는 것과 같이 십일조를 하면 부자가 되게 해 주신다는 것과 같이 자신이 마중물과 같이 하나님께 무엇을 드림으로 받는 것은 은혜가 아니다. 이미 자신이 뭔가를 했기 때문이다. 은혜는 자기로선 할 수 없는 것이 일어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절대로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은 우주의 신비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런 것 모르는 옛날에도 사람들이 사는 것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이 존재하고 사색한 이후로 그 많은 노력과 성과에도 아직도 알지 못하는 것은 자신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삶을 살게 된 이유이다. 철학이나 과학이나 모두 존재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할 것인지를 연구하고 사색한 것이지 왜 존재하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알지 못한다.


잠깐 진화론을 이야기 해 보면 그것이 의미가 없는 것은 진화의 목적성이 없기 때문이다. 최고로 진화된 존재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자기 존재의 이유를 모르는데, 존재의 이유도 모르는 존재로 진화한다는 것은 정말로 어이없는 발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것에게 있어 자기의 존재 이유와 목적 그리고 그에 기초한 존재와 삶의 의미는 자기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신 것이다. 스스로 있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유일성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나 바알이나 이런 신들은 사실상 사람에 의하여 성립된 것이지만 하나님은 스스로 계신다. 그래서 스스로 있는 자라는 그 평범한 말이 그렇게 중요하고 핵심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달리 사람은 자기 스스로 존재의 목적을 모른다.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존재하면서 그 존재의 목적과 이유를 모른다는 것은 가중 중요한 문제를 모르는 가장 중요한 문제를 가지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더 어려운 것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가장 중요하나 스스로 알 수 없는 것을 알게 해 주시는 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은혜인 것이다.


그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있다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고, 예수님은 그것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까지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예수를 아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영생 안에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어야 비로소 예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영생을 얻었다고 믿으려고 신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단지 성경에 예수라는 사람이 나온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나, 그가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하더라는 것을 아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자신 삶의 목적과 의미를 알고 있는 상태가 아니라면 절대로 예수를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고 자기가 성경 좀 안다고 예수를 안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만하는 것이다. 성경을 아는 것과 자기 존재의 목적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아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를 안다는 것에 있어 교회에 다니니까, 신학을 했으니까, 성경을 아니까와 같은 것을 기준으로 안다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를 안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존재의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들이 인생을 살면서 자식을 위하여 사는 것, 좀 더 거시적으로 나라를 위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라 여기기도 한다. 옛 국민교육헌장에서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는 것과 같은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아니다. 우리의 적국이 있다고 할 때 그 나라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더욱이 돈이나 명예도 아니다.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창세기에서 말씀하신 하나님의 형상(image)을 나타내는 것이고, 그 하나님의 형상,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드러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므로 보여주셨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모습이 바로 우리 인생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 자기 자신에게 아멘이 되는 것이 바로 예수를 아는 것이며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예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 이름으로 지구를 거꾸로 돌리는 역사를 보인다고 해도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학 학위를 다 취득해도 아니다. 예수 이외에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고 하신 그 유일성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그것이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라고 아멘이 되지 않는다면, 그래서 자신이 영원함 속에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심령이 자기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예수를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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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1-11) 부르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베드로후서 Date : 2018. 11. 19. 07:00 Writer : 김홍덕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후서를 시작하면서 ‘부르심’에 대하여 말씀하신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부르심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부르심과는 좀 다르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부르심은 먼저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 부르신 자를 알기 때문에 부르신 것이라는 것과 그 부르심을 받았다면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아서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생명과 경건에 대하여 아직도 노력하는 중이라는 말로 아직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면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부르심이 온전하지 않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고, 본질적으로 부르신 일을 알지 못한다는 것임을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


누군가가 사람이 많은 곳에서 특정인을 부르는 상황을 생각해보자. 부르는 사람은 부르는 대상을 알고 있기에 부르고, 부름을 듣는 사람은 그것이 자신을 부르는 것임을 알기에 대답을 하는 것이다. 물론 동명이인이라서 돌아보기도 하겠지만 이내 부른 사람이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 부르심은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이 온전한 부르심이 되려는 부르시는 하나님과 부르심을 받는 사람이 서로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온전한 정체성을 알고 있어야 하고, 하나님은 사람을 부르심에 있어 사람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을 모르실 리가 없다. 요한복음 1장에는 예수님과 나다나엘의 대화가 있다. 그 대화에서 예수님께서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라고 말씀하시자 나다나엘이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라고 묻고,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심에서만 봐도 하나님과 예수님이 우리를 아는 것은 문제가 없다.


따라서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인가가 핵심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온전한 부르심이 되려면 사람인 우리가 부르신 이에 대하여 온전히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 역시 그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지 않는가? 믿고 믿지 않고의 문제는 있겠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별로 없는데, 하나님을 모른다고 하는 것은 억지가 아닌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아는 것은 아주 잘 안다고 해도 머리로 아는 것 이상은 아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신기한 능력과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을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거의 착각에 가깝다. 하나님을,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안다면 신학과 같은 학문도 좋은 시설도 필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기한 능력으로 다 주신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치적으로 생각해도 사도들의 복음이 신학 이전에 있었고, 오천 명을 먹일 때 앰프와 같은 음향시설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의를 아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그 만드신 목적 있을 것이니 그것을 아는 것이 먼저일 것이다. 나를 조성하신 이유를 알아야 무엇을 바라는지도 알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냥 상식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이유, 곧 자신에게 삶을 주신 이유보다 무엇을 바라시는지를 알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어두움이고 무지함이다..


따라서 부르심이란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부르심은 우리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것이다. 사람을 만드실 때 가지신 창조목적과 그 의도하심(이것을 ‘하나님의 의’라고 한다.)이 사람을 향하신 부르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 부르심의 소리를 듣고서 그것이 자신을 향한 말씀이라고 들려서 답을 할 때에 그 부르심이 온전한 부르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에 답을 하는 것이 되는 것이고, 그렇게 부르시는 그 부르심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말씀하시고 설명하시고 가르치시며 교훈하시는 것이니 그것을 자기를 부르는 소리로 듣고 답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모든 것이 자기의 것이라고 순종한 것이 되는 것이다. 


그 순종이 있다면 베드로 사도의 말씀과 같이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 되고, 답하는 순간 그것을 받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또 성경이 말씀하시는 부르심인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이 부르심이 자신에게 있었는가 알고 싶다면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알고 있는지 자문해 보면 될 것이다. 가 스스로의 질문 앞에 확신이 없다면 미안하지만 아직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는 사람이다. 그리고 이것을 부인하면 그것이 바로 양심에 화인 맞은 사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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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는 베드로 사도가 이제 순교할 때가 다가왔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했던 자신의 신앙고백을 겸하여 그리스도가 온전함을 아주 함축적이고 간략하게 쓴 서신이다. 따라서 이 서신은 1장 1절의 수신자에게 밝히는 바와 같이 불특정 다수인을 상대로 하는 서신이 아니라 자신과 동일한 신앙을 가진 형제들에게 쓴 서신이다.


베드로후서의 기록 목적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확신하지 못하고 이전 신앙으로 회귀하려는 사람과 그것을 부축이거나 빌미를 제공하는 거짓 선지자, 그리고 그들이 부인하려 애쓰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하여 육신의 안목이 아닌 성령의 안목으로 이를 봐야 한다는 것을 전하여 함에 있다고 줄일 수 있다.


그러한 내용은 사실 베드로 사도나 바울 사도와 같은 대사도들이 죽음을 앞두고 적은 편지의 내용으로서는 아주 작은 내용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본다면 이 짧은 서신에 있는 몇 가지 주제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 가장 핵심적인 사항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생각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베드로후서는 마치 시험 준비를 하면서 공부한 것을 시험장에서 보기 위해 요약한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베드로 사도는 이 두 번째 서신에서 특히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변화산 사건을 경험한 베드로 사도에게 있어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그 영광 속에서 들은 것이 확실한 예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모든 예언의 근간이며, 이것에 바탕을 두지 않고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그것이 바로 예언을 사사로이 풀이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서론이지만 잠깐 이야기 해 본다면 흔히들 하나님의 말씀을 사사로이 풀면 안 된다는 것을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라야 풀 수 있다는 말로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정말로 성경을 모르는 무지한 발상이다. 그 이유는 이 블로그 전반에 많이 녹아 있지만 우선 단 하나, 이 성경은 모든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는 그 하나만 알아도 그런 멍청한 소리는 할 수 없다. 모든 사람이란 공부하지 않은 사람도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사사로이 예언을 풀이한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예수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관점을 벗어나서 성경을 보는 모든 것을 말한다. 그러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믿는데 무슨 소리인가 싶겠지만 변화산 사건을 알면 이해가 될 수 있다.


사람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 말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예수와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변화산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과 개념이 사뭇 다르다. 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인생의 곤고함을 이기게 하는 예수며, 기도라는 행위와 성경을 보는 행위와 전도하는 행위의 공로로 은혜를 갚는 예수며 그 공로를 보고 은혜를 베푸시는 예수를 믿는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은 다른 사람은커녕 자기 자신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분이시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는 예수는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예수고, 지금 사람들이 믿는 예수는 사업 잘 되게 해주는 예수요, 기도하여 병을 낫게 하는 예수며, 신학을 공부해야 더 잘 알 수 있는 예수다. 이는 남과 북이 먼 것과 같이 전혀 다른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다른 예수를 믿으면서 성경을 보고, 학문으로 만들어 공부하고, 그것으로 밥 벌어 먹듯이 설교하는 이 모든 것이 다 사사로이 예언을 대하는 것이다.


바로 그렇게 예수에 대하여 또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는 차차 다루기로 한다)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서 가르치는 자가 거짓 선생이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바로 알지 못하는 그 관점,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라 자기가 육신으로 얻은 가치관이나 신학과 같은 학문으로 재림을 판단하고 하나님의 때를 논하는 그 모든 것이 바로 옛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이며, 재림의 본질과 때를 알지 못하는 것임을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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