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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3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8. 11. 24. 13:00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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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시는 능력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을 주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육신으로 표현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육신이라는 소비재를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에 소비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기도 하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나심과 같은 것이다.


또한 신의 성품의 참예한다는 것,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가진 존재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이셨기에 the Christ가 되시고, 그 예수님을 보고 자기 삶이 또한 그것임을 순종하고 그렇게 살게 되면 그것이 그리스도(a christ)인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삶이 바로 경건한 것이다. 삶이 하나님의 성품과 의로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신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고 신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 이상의 경건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육신으로 하나님의 이미지(형상)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고, 우리 삶의 본질적 목적인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육신으로 표현한다는 것이 바로 아들이다. 아들이란 아버지의 의가 육신을 가진 존재로 나타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세계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그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나서 그 육신의 삶을 보니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의미이다. 바로 그런 존재가 아들인 것이다.


이 모든 신의 성품에 참예한 것의 본질을 예수님께서 보이셨을 뿐 아니라 그 보이심을 통하여 그것을 알지 못하던 사람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것은 자신의 운명으로 순종하게 될 때 그 사람도 예수님과 같은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이루어진 생명 있는 존재가 되어 경건한 삶을 살게 하시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능력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성품 곧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그 안에 이루어졌다는 것이기에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는 존재이고, 하나님이 의가 보이는 육신으로 나타난 존재니 아들이며, 사람들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중에 그것을 구하시니 메시아요 그리스도이며, 그렇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살기에 경건한 삶을 사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다는 것은 사람들의 암묵적 생각과 같이 남다른 능력을 보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능력이나 성품을 나타낸다고 하니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거나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자로 착각하고 사람을 훈계하고 책망하는 권세를 가지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더더욱 그 권위가 신학이란 공부를 하고 시험치고 수련해서 딴 자격증과 같은 것이라면 더더욱 아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것은 분명히 예수님의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능력은 물 위를 걸으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에 기인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에서 완성되는 것이다. 그것을 위하여 예수님의 모든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그 자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다는 것은 방언을 한다거나, 병자를 고친다거나, 대학원을 갈 것인지 취업을 할 것인지를 기도해서 알려 주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성경을 공부했다는 것이 마치 성경이 어떤 권능을 부여한 것으로 치장하여 높은 곳에서 사람을 가르치듯 권위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또한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수상 소감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그런 것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에서 나타났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도가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이 바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라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무엇인가?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세상의 법과 가치관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없는 모습이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주장하는 것은 불법이니 처형을 받아야 한다고 내린 판결에 순종한 사건이다. 그것이 십자가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세상에서 더 높고 좋은 자리로 가는 것을 도우시고 그것을 영광으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외쳤을 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주장하는 자들에 의하여 죄인이 되는 것을 자기 운명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 사건의 본질이고 그것이 육신을 가진 사람의 운명인 것이다.


바로 그 운명에 순종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능력을 버리고 그 운명에 순종하신 십자가에 달리시니 사람들이 비로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의 성품은 그렇게 표현되는 것이다. 크고 화려한 교회나 좋은 학위나 세상에서 큰 성공을 하나님 덕분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변화산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하는 베드로 사도의 말씀에서도 드러난다. 엘리야도 모세도 있는 것이 더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여겼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몸소 깨달았던 베드로 사도가 이제 곧 순교를 앞두고서 예수님의 능력은 예수님의 십자가 그것으로 족하고, 그리스도의 성품이면 족한 것이지 그 외에 무엇을 더하고 세상이 능력이라 여기는 것을 가져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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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능력이라고 한다면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도 들은 바 있는 것들이 있다. 물론 이것은 믿음과는 별개다. 그뿐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도 차이가 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이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는 것을 예수님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는가 하면, 예수님이 보이신 그 모든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다.


예수님이 일으키시고 보이신 기적들이 객관적으로 사실이며, 그 시절에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흔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헌금 받아서 설교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믿는다. 그래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신들에게도 그런 기적이 일어나길 늘 바란다. 병이 낫거나, 남다른 성공을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초인적, 초자연적 현상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기 위해 노력한다. 심지어 창조과학회 같은 것을 만들어서 객관적으로 가능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바보들이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에 밑에서 조롱하던 이들이 바란 것이 바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적을 바라는 믿음은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그곳에서 내려와 보라고 조롱하던 사람과 같고, 또 다른 사람에게 그런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능력이라고 말하고 요구하는 자들은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기적을 보이라고 시험한 마귀와 같은 존재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자는 것인가? 그게 아니다. 그런 능력은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잔돈과 같은 것이다. 그게 예수님께서 보이시고자 하신 능력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이고자 하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을 보이시기 위하여 필요하면 언제든지 보이실 수 있고, 또 반대로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존재라는 것을 보이시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기시면 언제라도 하지 않을 수 있는 그냥 잔재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보이신 기적을 예수님의 절대적 권능이라고 여기는 것과, 그것은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 중에서 잔재주로 보는 것, 그 어느 것이 예수님의 능력을 더 인정하는 것이겠는가? 따라서 그런 기적들, 지금도 찬양하고 흠모하는 그런 기적은 예수님이 가지신 능력의 본질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지신 신비한 능력의 아주 작은 잔재주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기적을 직접 목도한 것으로 본다면 베드로 사도만큼 많이 본 사람이 있겠는가? 자기 장모도 예수님께서 고치셨는데. 그런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을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그런 기적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두렵게 하고, 흠모하게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의 모든 것을 주시는 것, 그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능력, 그 능력이 신기한 것은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시기 때문에 능력이고 신기한 것이라는 것이다. 병을 고쳐서 기도원 차리고, 교인들이 하나님을 뜻을 알고자 하면 기도해서 답변해주는 무당짓거리가 성령의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관한 모든 것을 주시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이라고 그 많은 기적을 목도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생명과 경건은 어떤 것인가? 이 육신의 생명 그것인가? 또 예배시간에 떠들지 말라는 것과 같은 것이 경건인가? 그것이 아니다. 생명은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는 것이고, 경건은 육신의 행위가 조용하고 조심스러운 것이 아니다. 요제를 생각해보라. 소 뒷다리를 들고 춤추듯 흔들면서 드린 제사가 요제인데, 하나님 앞에서 조용하고 조심스럽게 예배드리는 것이 경건이라고 말하는 것은 경건을 크게 오해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명사들의 정의에 있어 사람들은 일반적인 세상의 각도에서 본다. 생명이라고 하면 생물학이나 의학에서 다루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경건이라고 하면 조용하고 조심스러우며 정성스러운 것이라 생각하고, 능력이라고 하면 성공하는 역량이나 기적과 같은 것을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그 모든 단어와 명제들의 정의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고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야 하는 것이고, 능력이라면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을 이루어내는 것이 능력이며, 경건이라고 하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이 삶의 습관과 태도와 모양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조차 그렇게 생각지 못하고 세상의 일반적 가치관과 안목으로 생명이나 능력이나 경건을 보는 것, 그런 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세상에서 썩어질 것이며,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았다고 여길 수 있는 그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 뜻하신 바가 나타나면 살아 있는 것이다. 시계가 시각을 바로 알려주면 살아있다고 하는 것과 같이. 능력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을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뜻하신 것을 이루어내는 그것이 능력이며, 경건은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표현되어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이 경건인 것이다.


바로 이것을 알아야 성경을 바로 볼 수 있다. 베드로 사도가 전하는 이 서신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관점과 안목과 목적과 의와 가치관을 가진, 한 마디로 하나님과 같은 생명과 본성을 가지지 않고서 이 말씀을 보면 성경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약속한 책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것과 같이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 같이 사람 안에 하나님의 형상, 곧 그 본성과 생명과 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부르신다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예수님과 같은 것을 보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람도 누구를 부른다는 것은 같은 것을 하기 위하여 부르는 것이다. 하다못해 싸움이라도 그렇다. 같이 싸우자고 부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르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의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와 같은 생명을, 또한 그 생명에서 비롯된 삶, 곧 경건의 모든 것을 주시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본성을 가지게 하시는 것이 예수님의 능력이고, 부르심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의 성품의 참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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