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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8)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사람의 집합 속에 속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사람으로 나면, 사람이라는 성품을 가진 존재로 속하게 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성품은 믿음에서부터 시작해서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 베드로 사도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존재에게서 믿음에서부터 사랑에까지 하나님의 성품이 생명으로 인한 그 생명의 본성을 나타내게 되는 것과 같이 나타난다는 것은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믿음에서부터 사랑에 이르는 하나님의 성품은 바로 열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열매를 위하여 믿음을 가지고 사랑하여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 바로 열매라는 것이다. 다시 한 번 방향의 문제인 것이다. 믿음을 가지고 사랑하였기에 열매가 열리고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기에 믿음과 사랑이라는 열매가 나온다는 것이다. 생명이 먼저인 것이다.


그러므로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도록 믿음을 가지고 절제와 인내와 덕과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은 열매이이며, 그 열매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열매는 생명의 본성이 형식 곧 육신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의 법을 모르면 게으르지 않고 열매를 맺으려면 믿음을 가지고 덕을 세우고 사랑해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게 바로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소경이다.


소경은 단지 육신의 눈이 보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렇다. 성경은 절대로 형식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육신의 어떠함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속사람에 대한 말씀이며, 생명 그것도 생명의 본성에 대한 말씀이다. 속에 있는 것은 겉으로 육신으로, 생명의 본성은 육신으로 표현되고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이 열매이다.


그리고 생명은 그 생명의 본성을 타나냄에 있어 절대로 게으르지 않다. 사람이 육신으로 무엇을 하는 것에 있어서 게으르지 않으려면 엄청난 각성과 다짐이 필요하지만 생명의 본성은 게을러지려해도 절대로 그럴 수 없다. 들에 핀 풀 하나도 어느 한 순간 그 풀의 유전자와 다른 모습인 적이 있는가? 그와 같이 생명이 육신으로, 열매로,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절대로 게으르지 않다. 아니 게으를 수조차 없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고 그것이 성품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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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건이라는 것은 조용하고 신사적이며 도덕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되어 그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본성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또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또 신의 성품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이상의 경건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러나 사람들은 경건이라는 것은 행동 양식에서 그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 어떤 행동, 어떤 언행이 경건한지를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경건한 예배라고 하면 조용하고 엄숙한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레위기에 나오는 요제의 경우 제사장이 제물을 들고서 요란하게 흔드는 것이었다는 것만 알아도 경건이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논점은 단지 경건에 대한 시각 교정을 목표로 하거나, 조용하고 엄숙한 것은 경건한 것이 아니니 버리자는 의도가 아니다. 왜 사람들이 경건을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모든 신앙을 형식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엄숙하고 조용한 모습을 갖추어야 경건하게 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기에 군복을 입는다는 것을 상기시키고 싶다. 왜냐하면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 그 의가 본성이 되어 살아가는 모습이 경건이고, 일반적으로 엄숙하고 조용하게 예배를 드리는 것이나, 회개하고 예배에 임하는 것과 같은 것과 같은 경건의 단면들은 그 경건한 삶의 일부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경건이라 여기는 모습을 보일 수도 있고, 요제처럼 요란한 경건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경건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이기에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경건한 모습인가를 생각하려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보이셨는지를 보면 되는 것이다. 성전에서 상을 뒤집은 예수님이 경건한 모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성전에서 상을 뒤집은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든 말씀, 입으로 하신 말씀이나 육신으로 보이신 모든 말씀의 궁극은 결국 십자가이니 경건의 삶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엄숙하고 조용하며 신사적인 것이 경건이 아니라,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삶을 사는 그 삶이 바로 경건인 것이다.


바로 그런 경건이 있어야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랑은 결국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해 주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정체성을 부여하셨다는 것과,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알게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결국 사랑은 우리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그것을 본 사람이 그가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했다는 것은 결국 우리도 예수님과 동일한 육신을 가졌기에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우리 삶에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시려고 의인이심에도 죄인과 같이 자신을 드리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사랑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하여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는 존재의 의미를 부여받게 되고,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알리시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를 가진 경건이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이 경건에 사랑이 더해진다는 말씀의 본질인 것이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는 것을 단순히 고통이라고만 생각한다. 예수를 믿는 것을 인하여 따르는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일요일에 출근하라는 요구를 받고서 갈등하는 것, 눈치 보는 것과 같은 것을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 핍박을 받는 것이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런 요구를 단칼에 뿌리치는 것이 능사는 아니기도 하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가진 의로움을 인하여 나의 육신이 한 번 더 수고한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궁극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와서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설명했더니 사람들이 가진 하나님 아들에 대한 이미지와 다르다는 이유로 죄인을 삼아 처형한 사건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가진 의로움을 인하여 육신을 드리는데 그 명분과 드림이 궁극적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고 하는 것은 33살 총각이 진짜로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나 예수 믿기 때문에 당하는 불편함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신이 더 온전한 의를 가지고 있으나 다른 사람들이 어두운 의를 주장하므로 인하여 육신이 한 번 더 수고해야 하는 그 수고에 자기 육신을 소비하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 또한 경건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가, 십자가의 도가 자기 본성이 되지 않은 사람은 자기 의를 주장하지 남의 의로움을 인하여 자기의 육신을 소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으면 그 의가 자신의 육신을 남들이 옳다는 주장으로 끌고 가는 것에 순종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이는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본성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 본성이 이끄는 삶이 바로 경건이고, 그 경건의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형제가 할 일을 한 번 더 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형제 우애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경건으로 살기에 형제를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아들을 발견했듯이 경건으로 살아가기에 형제를 사랑하는 모습과 삶은 그것을 보는 이들에게도 그 마음에 자신도 그렇게 살기 위하여 하나님께 지음을 받았다는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기에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고 존재의 의미가 되어 주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존재의 의미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본성으로 알아 살아가는 하나님 아들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기에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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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는 말씀은 앞서서 언급한 것과 같이 어떤 단계적 성취가 아니라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서 능력이 자람과 같이 하나의 생명에서 나타나는 징후들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 하나는 다름이 아닌 <그리스도의 본성>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본성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한 것, 곧 하나님과 하나가 된 본성이며,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으로 표현되는 상태가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삶의 모든 이유와 의미와 존재의 목적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가 우리 심령의 본질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요한 사도가 예수님을 칭하기를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다.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존재 안에서 본성이 되어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면서 살게 되는 그 온전한 변화가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열거한 것, 믿음에서 시작하여 사랑을 공급하는 것까지의 일련의 과정들은 그 생명이 잉태되고 거듭나고 자라면서 나타나는 생명의 징후요 생명의 표현이고 역량이며 능력인 것이다. 믿음에서 사랑까지의 모든 것은 한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때까지 그렇게 노력하자고 설교를 들어 왔다. 그것은 설교하는 자가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지식이 자기 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가 육신으로 수행하듯 익힌 지식에 기인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그 지식은 당연히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 하나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 믿음도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다. 단지 예수님이 객관적으로 실존했다는 것을 믿으려는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인내에 경건을 더하는 것은 경건이란 것을 인내에 더하는 것이 아니다. 인내하는 것도 얼마나 힘든 일인데 거기에 무엇을 더할 여력이 있는 인생이 몇이나 있겠는가? 더욱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본성이 있어 그 본성으로 인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되어 있으니 그렇게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인내도, 아니 그 보다 절제도, 또 지식을 더하는 것도 힘든 지경일 텐데 거기에 또 무엇을 더할 여력이 있을 리 만무한 것이다. 그 앞에 것도 수시로 지키지 못하는데.


그러므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것은 인내에 경건을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내가 경건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본성으로 거듭나서 그 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의 인내는 곧 경건이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아가라는 것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앞서 이야기 해 온 절제와 인내를 비롯하여 베드로 사도가 열거한 모든 덕목은 모두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그리스도의 성품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본성이라는 것이므로 이 모든 것은 하나씩 더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 그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억지로 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절제와 인내는 언뜻 엄청난 견딤이 요구되는 것이고 수도하는 것 같지만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에게 그것은 자연스러운 삶인 것이다.


그 그리스도의 본성은 어떤 이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기도 하고, 또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절제와 인내하는 모습 같지만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에게 그것은 운명과도 같은 것이다. 자기 정체성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렇게 살아갈 뿐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순순히 순종하심도 그것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경건이다. 경건이라는 것은 조용히 하고 차분하고 거룩한 목소리로 말하고, 신사적이며 도덕적인 봉사를 하는 삶과 같은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삶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 흔히들 예수님의 삶을 너무 경건하게 여겨 교회 학교 학생들이 예수님이 화장실은 가셨는가 물어볼 정도지만 사실 예수님의 실제 모습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불한당에 가까운 모습일 때가 많았다. 그러니까 경건은 태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경건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삶, 그것이다. 그 그리스도의 생명을 인하여 살아가는 삶은 남들이 볼 때 억지로, 또 신앙으로 절제하고 인내하는 것 같아 보이는 삶이 자연스럽게 순종되는 삶이다. 억지로 절제하지 않고 신념으로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본성, 하나님을 알기에 순종하게 된 그 본성대로 살 뿐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거듭난 생명이기에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운명적인 것이다. 그 본성을 인하여 살아가는 그것이 바로 경건의 삶이다.


그러므로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더하는 것은 첨가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밖으로 나오는 것이고, ‘경건해야지!’라고 작심하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 거듭난 사람의 삶의 모습이 경건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 본성이 절제하게도 하고 인내하게도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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