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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55

Category : 미디어 말씀 파일/마가복음 Date : 2018. 12. 14. 17:14 Writer : 김홍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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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이제 육신의 장막을 벗었을 때가 임박한 것을 알고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 곧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기에 넉넉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과 같이 자신의 모든 신앙 여정을 함축한 것을 전하고자 하는데 그것을 자신이 경험한 변화산의 사건을 가지고 말씀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과 함께 하면서 겪은 일들 중에는 그 임팩트가 변화산 못지않은 것들이 많다. 무엇보다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과 나눈 대화(요 21장)이나, 빌라도의 뜰에서 채찍질 당하고 있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 예수님이 자신이 생각한 예수와 너무 달라서 받은 충격과 같은 것, 그리고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이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지만 손대지 말라고 하신 것 등등...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경험한 것 중에 자신의 삶의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것을 이야기함에 있어 변화산에서의 일을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변화산에서의 경험이 자신이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삶을 정리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시점에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아마 그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자신에게 가장 명확한 사건이었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공관복음에는 모두 예수님과 베드로, 야고보, 요한 이렇게 네 사람이 산에 올랐을 때에 예수님께서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하는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 변화된 예수님과 함께 엘리야와 모세가 함께 나타났는데 그때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는 그 상태가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도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이 변화산 사건이 의미하는 것은 여러 차례 언급한 바와 같이 예수님과 기적과 율법이 함께 있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엘리야와 모세가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님의 말을 들으면 된다고 하신 것이 그 핵심이다.


이 변화산의 사건과 말씀은 우리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인생의 마지막 권면으로 삼기에 충분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오늘날도 사람들은 <예수님 + something>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지”라는 말이나 생각이 바로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것이다.


뭔가가 더 있어 온전하고 좋은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더해지기 전의 존재가 부족하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이 모세나 엘리야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여긴다는 것은 예수님으로서는 온전하지 않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착하게 살지 못한다고 여기는 탓이다.


때로 예수 믿는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면 이내 ‘그러면 예수 믿으면 도적질해도 되느냐?’고 반문하는 이들을 본다. 그 반문은 참으로 황당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의 본성이 사람의 본성이 된다는 것인데 예수님의 본성을 가진 사람이 도적질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믿는 사람은 착하게 살아야 한다, 기도해야 한다, 성경 봐야 한다 등등 말하는 것은 다 예수를 믿지도 않고 예수님을 아예 알지도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 어련히 기도하게 되지 않겠는가? 예수님의 본성이란 어련히 세상에서 선한 사람이 되게 하시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믿지 않기에 예수 믿기에 뭔가를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도 변화산에서 그랬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몰라서 모세와 엘리야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한 것이 아니다. 베드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몰랐던 것이다.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어떤 성품과 본성을 가진 존재인지를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 했던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사람들이 예수님이 메시아요 구원자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은 아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크게 건축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며, 착하게 살아야 예수님을 잘 나타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에 더하여 큰 교회, 세상에서 성공한 교인, 착하게 사는 것, 기도하는 것, 성경 보는 것이 더해져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만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하나님이 성공으로 또한 영광으로 여기시는 것이 있고, 그리스도의 본성이 흠모할 만한 삶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 거듭난 생명의 본성은 그런 것이며, 그렇게 살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그런 어이없는 짓거리를 하지 않을,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가 죽음을 앞두고서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다시 한 번 이 변화산에서의 일을 상기시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에 모세나 엘리야가 더해질 필요가 없듯, 믿음 외에 어떤 것을 더하여야 한다고 여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것이 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예수 믿으니 뭔가를 해야 한다는 소리 같은 것은 하려해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옛 신앙’, ‘옛 죄’가 바로 이것이다. 예수 이외에 뭔가가 더해져야 한다고 여기는 것을 인하여 사람들이 행위로 성경을 지키려하고,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착하게 살려고 하고, 기도하려 하고, 성공하려 한다. 예수님 안에는 그것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그렇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또한 예수를 믿는 것도 아니다.


사람들이 진정한 복음을 알면 알수록 삶은 담백해진다. 우리가 이전에는 많은 현금을 가지고 다녔지만 이제는 카드 하나, 더 나아가서 스마트폰만 있으면 모든 경제생활이 가능해졌다. 카드나 스마트폰 안에 모든 것이 있는데 더불어 뭔가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이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잉태되고 그 생명의 본성에 이끌려 살기만 하면 그렇게 교회 다니며 추구했던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어 나타난다는 것을 안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도해야 한다, 성경 봐야 한다, 착하게 살아야 한다, 방언을 받아야 좋은 신앙이다, 세상에서 성공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 등등의 소리는 단 하나의 원인에 기인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고, 옛 죄와 옛 신앙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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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약해지지 않을까 걱정한다. 그런 것을 좋은 말로 깨어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믿음이 약해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얼핏 좋은 모습인 것 같지만 그 내면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애쓰고 있다면 아직 온전하지 않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신이 아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하여 노력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도 분명히 이러한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자기 신앙이 아직 애쓰고 있고, 행여 약해질까 염려하여 어떤 노력을 하고 있다면 자신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이 말씀도 그렇다. 굳건하고 실족치 않으며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에 넉넉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면, 즉 자기 안에 그 확신이 없다면 자기 신앙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게 성경이 말씀하시는 양심이다.


굳건함과 실족치 않는다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고도 남음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행여 다른 사람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이 그것을 부인하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스스로 인지하고 있지 않다면 분명히 부족한 상태이다. 그 믿음은 굳건하지도 않고 늘 실족하거나 그럴 위험에 처해 있으며, 행여 죽어서 하나님 나라에 가지 못하면 어쩌나 염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여러 증거가 있겠지만 자신이 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어떤 것을 만약 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벌을 주신다거나 삶이 곤고한 일이 생길 것이라는 생각에 빠지지 않고 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상태가 바로 굳건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예를 들어 새벽기도회를 가면서 빠지면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을 들어주시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예배에 빠지거나 하면 안 좋은 일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 그 모든 것이 바로 그런 상태라는 증거이다.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려면, 그것도 넉넉하게 들어가려면 자신이 영원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면 영원한 나라에 들어간들 별 소용이 없다. 나라의 영원함과 무관하게 자신은 유한하니 그 유한함이 한계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주 상식적인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는 것만 관심이 있다. 천국이 영원하거나 말거나 먼저 자신이 영원한 존재가 되어야 하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원한 존재가 될 것인가? 이는 성경에서 늘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 아는 바와 같이 사람의 삶은 유한하다. 유한할 뿐 아니라 별로 길지도 않다. 그럼에도 성경이 영원을 말씀하신다면 바보가 아닌 이상 이것이 육신에 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또한 그러한 것임을 알아야 하는데, 영원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라 생각하고, 성경을 지키는 것은 육신으로 지키려 하는 것은 어이없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영원을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그 하나님께서 영원함을 비롯한 당신의 성품을 우리 인생을 통하여 나타내시고자 하신 뜻이 사람에게 이루어진다면 그 영원함에 대한 답이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고, 지금 베드로 사도도 말씀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앞서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을 언급하였다. 그 신이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면 그것이 바로 영원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도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에서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원한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영원한 존재라는 의미이고, 그 영원함 곧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의 성품과 하나가 되는 것, 또한 동일하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이 그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지은 그 사람의 모습 그대로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이 순종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렇게 존재가 영원한 존재라면 그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도 또 그 영원함을 누리는 것도 넉넉할 것이다. 그러나 신앙이 행여 약해질까 염려하여 노력하고 있거나 인생은 연약하니 어떻게든 노력할 뿐이라는 신앙을 가지고서 죽어서나 천국에 들어가 보겠다고 힘쓰고 있는 것으로는 영원하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애쓰는 것은 죽어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음에 또 다른 기회가 있겠고 이 블로그 다른 글에서 몇 번 언급한 것과 같이 영원함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성품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우리는 형식으로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내용 곧 목적과 의로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의가 영원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면 우리가 이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에 영원함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농부가 알곡을 창고에 들이듯 영원한 존재로서 육신의 장막을 벗은 이는 자연스럽게 영원한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마치 떨어진 물방울이 물과 하나가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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