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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에는 베드로 사도가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어떤 이들이 옛 신앙으로 회귀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와 관련된 교훈을 하고 있다. 그런 맥락에서 베드로 사도는 자신이 변화산에서 겪은 일과 범죄한 천사와 발람과 발락 등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구약시대에 있었던 말씀들의 공통적인 요소는 신앙의 타락과 변질과 상당한 관련이 있는 말씀들이다. 반면에 변화산 사건을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하고도 선언적인 말씀을 하시기 위함인데, 그 두 가지가 같이 언급되었다는 것은 옛 신앙으로 회귀하는 것은 다분히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신앙이 행여 약해지고 또 타락한 길로 들어설까 염려한다. 많은 경우 그런 염려를 깨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씀과 같은 것인데, 그 말씀은 넘어질 것을 염려해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스스로 섰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여정을 단계별 성취로 보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문제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취해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으로 나서 그 생명을 표현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성취와 성장을 구분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 신앙에 대하여 섰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학박사 학위나 목사 안수와 같은 것도 사실 같은 맥락이다.


생명의 세계는 어떤 단락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타락이나 옛 신앙으로의 회귀와 무관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타락을 염려하고 신앙이 약해지는 것을 염려한다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면 성취하지 못하고 머무르거나 이전 단계로 돌아가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염려한다는 것은 그 세계에 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학생이 수능을 염려하지는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옛 신앙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돌아가는 것을 염려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것을 벗어난 사람들에게는 무관한 이야기인 것이다. 벗어났다는 것은 단계를 다 이루거나 성취했거나 졸업한 것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거듭났다는 것이다. 즉 생명이 온전하게 나면 이전 것은 다 지나간 것이 되는 것이다. 마치 여자가 결혼하여 엄마가 되면 처녀로서의 모든 것은 이전 것이 되는 것과 같이.


베드로 사도가 옛 신앙으로 돌아간 사람들을 반면교사처럼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언급하는 것은 어쩌면 이 편지의 수신자들에게 이전 신앙으로 돌아갈지 모르니 조심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온전하게 설명하기 위함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온전하게 자리하고 있다면 그 사람에게 신앙은 단계로 대변되는 피라미드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성장으로 대변되는 생명의 세계에 속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베드로 사도가 이것을 인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강조를 위함이다. 이 편지는 자신이 이제 육신의 장막을 벗을 때가 되었다는 것을 직감하고서 쓴 편지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옛 신앙과 비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온전하지 않는 이들의 삶의 모습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된 자들과의 구분(거룩)을 확증하는 것이기도 한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정말로 출애굽의 여정과 같아서 크게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는 여정이 있다. 홍해를 건넌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세계이자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는 세계로 거듭나는 것이고 물세례의 과정이고, 요단강을 건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온전히 아는 세계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안다는 것은 이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없어도 될 뿐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밝는 모든 땅, 곧 만나는 모든 사람과 사람들의 세계 전부가 자신에게 말씀이 되고 또한 자신이 그들에게 말씀이 되는 세계가 된다는 것이다. 


반면에 옛 신앙은 신약이든 구약이든 말씀이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같이 자기 삶의 신호나 척도가 되는 사람, 곧 성경을 육신으로 지켜내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기도하라고 된 성경을 보고 기도하는 것도 육신으로 성경을 지키는 것이다. 지켜야할 것이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것이라고 해서 율법적인 신앙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고서 ‘이래야 하는 구나!’ 생각하고 기도하고 있고, 성경을 보고 있고, 화가 나는 것을 참고 있다면 다 옛 신앙인 것이다. 이것을 알면 옛 신앙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모아보면 옛 신앙으로 돌아가는 것은 신앙의 모든 여정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 자신의 본성이 된 사람,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 된 사람은 온전한 생명의 법 아래에 있으므로 생명이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과 같이 돌아감이 없겠지만, 성경 말씀을 신호로 삼고, 신앙의 여정을 단계적 성취라는 관점으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높은 곳에 오르려다 미끄러지는 것과 같이 옛날로 돌아가기도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 여정에 있어 홍해와 요단강과 같은 큰 전환이 있다. 그것은 아주 힘든 결정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 앞에서 겪은 갈등이나, 가나안 땅을 앞두고 겪은 갈등으로 다시 광야를 맴돌았던 것과 같이 한 사람의 신앙 여정에서 가나안 곧 온전한 생명으로 거듭나기 까지는 정말로 큰 결정을 해야만 한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오히려 출애굽의 일과 광야에서의 일을 기억도 하지 못하였던 것과 같이 생명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억지로 옛 본성으로 살아보려고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안다. 잊어버렸고 거듭났기에 이제는 없는 옛 본성을 어디서 찾아서 거기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옛 신앙을 염려해야 하는 사람들은 그 신앙의 여정이 광야에 있는 사람들이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툭하면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불평했던 것 같이.


그러므로 성경을 읽고서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내어서 어떤 단계를 성취하고 달성해 가는 것을 신앙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옛 신앙을 염려하고 경계하며 자기 신앙이 약해질까 염려하므로 더 열심히 행함으로 성경을 지키려 노력하겠지만, 어이없게도 그런 노력이 바로 옛 신앙의 모습인 것은 꿈에도 알지 못한다. 그 신앙에는 그리스도의 본성, 곧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생명은 돌아감이 없다. 대학에 들어간 이들에게 다시 돌잔치는 없는 것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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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가 옛 신앙을 교훈하면서 타락한 천사에 대하여 언급한다. 말 그대로 천사가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타락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근원적이고 상식적인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이시고 모든 것의 주인이 되시고 실수도 없고 빈틈도 없이 경영하시는 그 경영 아래에서 하나님의 경영 밖으로 이탈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영화 ‘어 퓨 굿맨’이라는 법정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이 의문을 이해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온다. 평소 자기 명령 아래 부대가 잘 관리되고 있다는 사령관을 법정에 세운 변호사는 그 사령관이 죽은 사병을 건들지 말라고 명령했는데 사병들이 죽은 사병을 코드레드(얼차려)를 시행했다는 것은 사령관의 명령이 무시된 것 아니냐는 논조로 사령관을 흥분하게 해서 자백을 받아내게 된다. 


그렇듯 군인이 자기 부하가 자기 명령을 어길 수 있다는 것을 용납하는 것도 힘든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이 하나님의 뜻을 스스로 어기고 하나님과 대적하는 위치에서 천년왕국이 도래하기 까지 다투고 싸운다는 것을 용납하실까? 아마도 하나님의 전지전능을 믿는다면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런 관리 소홀이나 피조물들이 그 경영하심을 벗어날 불만거리를 제공하거나, 하나님보다 더 나은 것이 세상에 있어 그것을 도모하신다고 믿는다면 또 모를까?


이 논제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타락에 대하여 일관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타락을 논함에 있어 타락의 주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하여 스스로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대적하거나 다른 것을 선택했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타락의 주체의 죄도 문제지만 하나님의 전지전능이나 실수도 없는 경영이라는 말도 무색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성경이 하나님의 무결점 신으로서의 성품을 설명함과 동시에 스스로 타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가 타락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나 것이다. 특히나 타락은 천사의 타락에 앞서 인간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타락이 사실 사람에게는 더 중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듯 타락이라는 것은 우리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명제고 사건인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타락한 천사를 가두었다는 것도 그렇다. 타락한 천사를 하나님께서 가두어 두었다는데, 타락한 천사가 그 정체라는 마귀가 이 세상에서 성도들을 유혹한다는 것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가두었는데 그들이 탈옥이라도 했단 말인가? 하나님은 자신이 잡아 가둔 존재들이 탈옥해서 자신에게 대적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능력도 없는 신이라는 말인가? 타락한 천사인 마귀가 우리를 유혹한다는 일반화된 이론이 그렇게 상식적인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하나님이 유일하시고 절대적이시며 다른 모든 것보다 만족을 주시는 사랑의 신이라고 믿는 신앙을 가졌다면 앞에서 제기한 의문은 아주 상식적인 의문이며, 합리적인 의심이다. 즉 우리가 흔히 아무렇지 않게 마귀는 타락한 천사라고 하는 그것이 다름 아닌 하나님의 절대성을 믿지 않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마귀에 대하여 타락에 대하여 앞서 제기한 의문과 결을 같이하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거나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신앙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은 어떤 것이며, 하나님께서 그 타락에 대하여 진노하시고 심판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은 타락이라는 하나의 명제 같지만 앞선 언급한 것과 같이 이 타락에 대하여 어떤 정의와 안목을 가졌는지는 하나님을 진정한 창조주요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천사나 사람이 자기의 판단으로 하나님의 영을 거부하고서 타락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무능하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그렇듯이 변함없는 하나님의 정체성은 고정한 상태에서 묵상해야 한다. 타락이라는 것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관리 소홀이나 하나님의 부족함을 틈탄 반란과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타락을 설계하셨거나, 예상한 것이라는 수준이 아니라 동전의 앞면 뒤에 뒷면이 있는 것과 같이 창조와 경영에 수반된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 중에서 사람만이 ‘의’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의의 본체시고 그 의를 표현하실 형식이자 형상이며 물리적 모양을 가진 존재로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버금가게 그 창조의 과정은 설명되어 있지 않지만 성경에서 언급된 내용으로 볼 때 사람과 같이 의에 대한 개념과 판단과 안목을 가진 또 하나의 존재로 천사가 있다.


‘의’라고 하는 것은 판단의 기준이 되고, 사고와 갈등의 기준이 되며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공산주의적 사상이 죄가 되고 반대로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민주적 사고가 또 죄가 되는 것과 같다. 나라로 봐도 그 나라가 택한 ‘의’가 헌법으로 명문화되고 그것에 뿌리를 두고 모든 법과 사회질서가 수립된다. 따라서 나라에서 죄가 되는 것은 그 나라의 의에서부터 비롯된 것이고, 그 의가 기준인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라는 존재는 동물과는 다르게 어떤 것을 선으로 또 어떤 것을 악으로 여기는 본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의로운 존재로서 그 의를 나타낼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천사가 또한 의에 대한 개념을 가진 것은 천사가 하나님의 의를 수행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아바타처럼 자기 생각 없이 온전히 그것만 할 수 있는 존재로 상태로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란 존재가 자신의 의지는 전혀 없이 로봇이나 아바타와 같이 움직이기만 하도록 창조된 상태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면 그것은 전혀 의미 없는 것이다. 이는 우리 사회에서 최면이나 정신착란 상태에서의 일을 그 사람의 진의로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각양의 동물들을 보이시고 그 이름을 부여하게 하신 것에서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각 동물의 이름을 정해서 교육시키신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아담이 그 안에 있는 의지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들의 정체성에 이름을 부여했다는 것을 기뻐하셨다는 것이 그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가치관이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들의 정체성을 하나님의 뜻과 같이 이해하고 그 이름을 부여한 것을 기뻐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에 그 사람이 하나님 밖에 모르고 그것만 나타내는 로봇이나 기계나 아바타나 최면이나 가면 상태의 존재로 만들지 않았다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적어도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스스로 그것을 선택할 여지를 두셨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섭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고 그 모습이 보시기에 좋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자신의 운명으로 순종할 때에 하나님의 지은 모습과 존재의 정체성이 그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에 너무 적합하고 온전하며 훌륭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마치 공장에서 만든 전구가 품질검사에서 합격을 득한 것은 전기를 넣어 조명으로 사용하겠다는 의와 뜻에 부합된 상태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과 같은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사람이란 존재는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를 자기 본성으로 순종하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도 하고, 그것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갈 수도 있는 존재인 것이다. 이와 더불어 천사도 성경에서 보여주는 모습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인지할 수 있는 존재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는 형상 가진 존재로 만드셨고, 그것이 자기 운명이 되면 목적대로 사는 것이기에 만족스럽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가 나타나고 그것이 나타난다면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이 하나님 창조의 섭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선악과 사건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람이 자기 육신으로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스스로 의를 가지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 같고, 사람이 자기 주관으로 옳고 의로운 것을 찾아서 그것을 좇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의 행복이라 여기기도 한다는 것이다. 스스로 의를 가지면 그 의에 기인한 선과 악이 나타나는 것은 서두에 언급한 것과 같이 필연적인 것이다.


선악과 보기에 좋았다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인생을 행복하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절대적인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그 인생을 자신이 기획하고 선택하였을 때만 그것이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이 어떤 이의 목적 아래에서 창조된 것이라면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은 창조조자의 창조목적에 반하는 것이고 대적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선악과를 먹은 것이 하나님께 죄가 될 뿐 아니라, 그런 가치관이 하나님 앞에 범하는 모든 죄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창조자의 창조목적을 벗어난 피조물이 무엇을 한들 그것이 선한 것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으로 삼고 살 수 있는 선택의 의지와 그 표상인 십자가와 성경말씀과 또 그것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 살기에 너무 적합한 육신을 주셨다. 그것이 전지전능하시고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의 창조 섭리이다. 그 안에 사람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의지도 함께 있는 것이다. 최면 상태에서의 찬양은 어차피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창조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타락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타락이라는 것은 어차피 본질적 존재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의미라는 것도 그런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살고 있지 않는 그 모든 것이 바로 타락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리 소홀을 틈탄 반란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섭리 속에 주어진 기회를 탕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락이라는 것은 술과 여자와 도박과 범죄에 빠진 것이나, 교회에 다니다가 절에 가거나 무당을 찾는 것과 같은 것에 대한 말씀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만든 존재인 사람과 또 천사가 그것을 자기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 자기 인생을 창조목적을 외면한 체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하는 모든 인생들의 삶이 바로 타락인 것이다. 설사 그것이 성경을 지키는 것이라고 해도 자기가 의지를 가지고 하는 것이라면 죄가 되고 타락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타락의 의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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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신앙 여정을 출애굽으로 이야기 해 보면 애굽에서의 종살이 하는 것과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살아가는 때가 있고, 홍해를 건너서 정해진 규율을 지켜야 살 수 있는 광야의 삶을 살듯이 성경말씀을 규율과 행위의 규범의 준수를 육신이 바라는 것을 위한 지불로서 살아가는 세월이 있다. 그리고 요단강을 건너서 발길 닿는 대로 자신의 땅이 되듯 자기 안에 있는 본성대로 살 뿐인데 그 모든 것이 복음의 삶이 되는 시절과 사람이 있다.


그러한 과정으로 볼 때 광야에 있는 사람에게 옛 신앙과 옛 세상은 애굽의 시절일 것이고, 가나안에 있는 사람에게 옛 신앙과 옛 세상은 애굽의 시절과 광야의 시절 모두가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쓴 이 베드로후서의 수신자는 베드로 사도와 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하였으므로 우리가 볼 때 이 수신자들은 애굽이나 광야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복음을 누리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복음을 누리는 사람이라는 것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성품이 있기에 그 성품을 가진 하나님의 세계의 일원이 된 사람이다. 이것은 교회에 가서 세례문답을 하고 교인이 되는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이다. 그런 것에 의미를 두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종이쪼가리나 공식화된 증명으로 자신의 신앙을 보증 받으려 하는 것일 뿐이다. 


자기 안에 스스로가 아무리 부인하려해도 부인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것을 늘 확인하고 살며, 무심한 듯 살아도 불연 듯 자기 안에서 나오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인한 삶에서 충분히 보증을 받을 수 있고, 그 보증이 자신의 존재 정체성을 확신하게 하는 사람에게는 교회의 명부나 증서나 행사에 참여나 출석은 별다른 의미가 없다.


그렇게 자기 안에서 생명이 있어서 그 생명을 인하여 살아가는 사람이 가진 생명의 안목으로 음란과 거짓과 육신의 욕망은 옛 신앙이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그게 달라 보여야 자기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맞는 말이 되는 것이다.


옛 신앙은 그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는 생각을 가진 신앙이다. 구약이든 신약이든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고 지켜내려는 신앙이 그것이고, 사람의 행위가 육신의 삶의 질과 결과로 나타난다는 가치관을 가진 생각이고 신앙이다. 예를 들어 사업이 잘 되지 않으면 새벽기도회를 잘 가지 않아서, 혹은 기도를 하지 않아서, 혹은 교회에 봉사 직분을 수행하지 않아서 그렇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바로 그런 신앙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 옛 신앙의 가치관으로 보면 탐심은 육신으로 재물을 탐하는 것이고, 음란함과 육신의 정욕은 성적인 음란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고기를 보는 양에게는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니나 늑대에게는 별미가 되듯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면 그 눈도 그리스도의 안목과 같고 생각도 그리스도와 같으며 가치관도 그리스도와 같을 수밖에 없다. 음란과 탐심과 육신의 정욕이 육신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자연스럽게 안다는 것이다.


성경이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 육신의 정욕은 육신의 평안을 추구함이다. 육신이 바라는 바를 추구하는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다. 그 육신의 정욕은 육신의 삶이 평안하고, 멀리서 기도했더니 그 기도한 것이 이루어지면 능력이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신의 수고를 최소화하면서 그 신앙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여기는 일들이 많이 이루어지면 좋다고 여기는 그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이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기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은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그 기본인데, 육신의 수고를 하지 않아도 기적과 같이 바라는 바가 이루어지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이 평안해지고, 육신이 속한 세상에서 육신의 삶이 영광을 얻으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가치관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년말 시상식에서 상을 받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개 풀 뜯어 먹는 소리를 하는 것이다. 자기가 그렇게 세상에서 영광을 받는 것을 하나님께서 영광으로 여긴다는 썩은 가치관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이다. 또 시험에 합격하면 감사하다고 헌금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런 모든 것이 바로 옛 신앙에 속한 육신의 정욕인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은 육신의 어떠함을 신앙의 모든 가치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욥의 세 친구와 같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 와 보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본성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지금 대부분의 교회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또 좋은 신앙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옛 신앙>과 그에 속한 육신의 정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 체.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 까지는 불기동과 구름기둥이 있었다. 불기둥과 구름기둥은 기적인적인 현상만이 아니다. 그것에서 벗어나면 생존이 위협을 받는 것이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추운 광야에서 불기둥과 구름기동은 생존의 필수 요소였다. 그 필수적인 신호가 이끄는 대로 가는 삶이 광야의 삶이다. 즉 성경에 있는 것을 지키면 육신의 삶이 보전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죽음에 이를 수 있는 여정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있어 성경대로 살아야 그의 행사가 형통할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대변한다. 교회에 가지 않고 기도하지 않으면 사업도 공부도 자라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것을 당부하는 것은 사랑의 표현 같아 보이지만 한 편으로는 자신이 광야의 신앙 곧 옛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는 고백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게 육신의 어떠함이 곧 하나님 은혜의 척도라고 생각하는 생각은 육신의 행위가 죄의 척도가 되고 또 복의 척도가 된다. 그래서 탐심이나 간음과 같은 것을 단지 육신의 행위로 보고서 그런 행위가 하나님 앞에 범죄며 그 범죄로 벌을 받아서 세상에서 흉한 일을 당할 것이라 여기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눈에 보이는 육신을 본질로 보고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옛 신앙의 행태인 것이다.


그렇게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사람은 또한 육신의 평안을 복으로 여긴다. 육신의 행위를 선하게 하였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서 부자로 만들어 주셨다는 식의 생각이 그것이다. 육신이 복을 받고 평안해지는 육신의 욕망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것을 복으로 여긴 것이다. 육신의 평안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고, 그 욕망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바로 율법적인 신앙이고, 광야의 신앙이며, 육신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이며 옛 신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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