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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부활 승천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말세’를 이야기해 왔다. 모두들 하나같이 자기 인생을 마치기 전에 세상의 종말이 다가 올 것처럼 이야기했고, 또 하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다미 선교회도 그 산물이다. 그렇게 세상이 곧 멸망할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말하는 것은 세상은 언제나 죄악으로 관영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베드로 사도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이후에 세상은 달라진 것이 없다고 말한다고 했다. 그들이 말하는 달라진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은 세상은 언제나 가진 자와 가난한 자가 대립하고, 언제나 전쟁과 살인과 다툼과 질투가 있다는 것에서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그렇다. 특히 교회 안에서.


세상이 죄악으로 가득하기에 종말이 되었다는 소리를 가장 많이 하는 곳이 교회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많은 사람들이 옛 신앙으로 돌아갔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사람들이 창조 이후에 변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옛 신앙으로 돌아갔다는 것이 하나님 믿기 전에 육신이 바라던 것을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 단지 하나님께 이전에 구하던 것을 바라는 것으로 채색되었지만 그 신앙은 이전과 같은 것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에 그와 같은 맥락에서 세상은 항상 같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분명히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며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로운 것이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고후 5:17) 즉 세상이 창조된 이후에 변한 것이 없다는 사람들은 그 신앙이 옛 신앙 안에 있는 사람들이므로 그 어떤 것도 새로운 것이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로 거듭난 사람들은 모든 것이 새롭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제와 다를 바 없이 오늘도 세상은 죄악 가운에 있고, 종말이 다가오고 있으니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구하여 주셔야 한다고 한 결 같이 말하고 기도하는 사람들이야 말로 옛 신앙 가운데 있는 사람이고, 베드로 사도가 말하고 있는 창세 이후로 세상은 변한 것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인 것이다. 자기 안에 자신을 변화시킬 생명이 없으니 그 보는 안목이 같을 수밖에 없고, 하나님을 알기 전이나 하나님을 이름을 부르고 난 이후나 구하는 바가 같은 생명이니 또한 안목이 달라진 것이 없으니 세상을 봐도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실재로 하나님을 바로 알고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언제나 온전하다. 물론 이 온전함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온전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서 볼 때 이야기다. 사람들의 눈에 세상은 아주 혼미해도 아직 세상이 존재하는 것은 세상을 지으신 분이 뜻하신 바가 아직은 유효하기 때문인 것은 아주 상식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다는 것을 제대로 믿고 있다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과 특히 사람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고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것을 믿는 신앙 안에서 이 세상이 아직 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아직도 세상에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가지고 있다면 이 세상을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볼 것이고, 그 안목으로 보고 자신을 보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존재가 있음이 확연하니 세상은 창조 목적대로 잘 굴러가는 것임이 보이는 것이다.


월드컵을 창시하고 운영하는 주최가 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FIFA라고 하는 곳이다. 그 창립 목적과 월드컵을 개최하고 각종 대회를 개최하는 것은 당연히 돈이고, 그것에 축구를 통한 인류 사회 공헌(으로 대표되는) 사업이라고 약간을 채색한 것이다. 그 FIFA의 입장에서 보면 월드컵에서 어떤 나라가 우승을 하던 상관없는 것이다. 월드컵에 관해서 그들은 그저 결승전까지 잘 치러지기만 하면 될 뿐 그 외에 다른 목적은 없는 것이다. 아니 어떤 나라가 우승하도록 조작하면 그게 더 문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월드컵에 참여하는 회원국은 다르게 생각한다. 자기 나라가 이겨야 선하고 영광이 된다고 여긴다. 그래서 서로 죽일 듯이 대하고, 축구로 인하여 전쟁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그들은 각자의 나라가 섬기는 신에게 기도하고, 선수를 질타하고 자책골을 넣은 선수를 살해하는 등 개별적인 승부에 미친 듯이 집착하지만 결국 참가국 32개국 중에 단 한 나라를 제외하면 그 모든 바람은 물거품이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월드컵의 개최 목적이 상실되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사람들도 각자가 자기 삶이 바라는 것, 육신이 바라고 또 나라와 사회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외치며, 또 어떤 도덕적인 기준이나 사회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몸에 스스로 불을 질러가면서까지 주장도 하고 바로 잡으려한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들이 가진 가치관일 뿐이다. 이 나라에서의 정의가 다른 나라에서는 불의가 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 진리고 상식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 성령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의 본성이 육신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이 가진 본성이 육신으로 표현되고 나타나는 삶을 사는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진 사람이기에 이 세상은 하나님의 창조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 보이는 것이다. 그것이 거듭난 사람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들에게는 이전과 다르게, 즉 앞서 열거한 것과 같이 보이던 세상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 나타나고 있는 세상으로 보이는 것이다. 그런 그들은 세상이 창세 이후에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생명이 거듭난 생명이 되는 때가 새로운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된 때이기도 하거니와 자기 삶 안에서 세상이 이전과 다르게 보이는 것을 경험하고 간증하는 존재가 되었는데 어떻게 세상이 창세 이후로 변한 것이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도 여전히 교회에 가서 세상이 그 옛날부터 주문 외듯 죄악이 관영하고 말세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답습하면서 하나님께 그것을 고쳐달라고 기도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참 좋은 신앙이고 기도라고 여기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무당에게 빌던 것을 그런 것을 의로 여기시지 않는 하나님께 자기 맘대로 바라고 기도하는 옛 신앙에 속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 고상한 신앙이나 좋은 신앙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가 그 안에 없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에 그런 것일 뿐이다. 그러하기에 창세후로부터 세상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니 세상이 죄악이 넘치고 말세가 되었다고 하는 말이 창세후로부터 세상이 같다는 것이라 말하는 것이라는 것조차 모른 체 옛 신앙에 빠져 있는 것일 뿐이다. 자신이 변한 것이 없으니 모든 것이 한 결 같을 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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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정말로 인생을 걸어야 하는 것이다. 인생을 건다고 하니 예수님을 통해서 인생의 성공을 보장 받는 것이라고 여기자는 것이 아니다. 행여 일반적인 사회생활을 떨치고 교회에서 사는 것이나, 신학을 하고 목회를 하는 것이나, 선교사로 사는 것이 인생을 거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도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사람으로서 인생을 살게 된 목적과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목적대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가 그 존재 목적을 알고 존재 목적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삶을 거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아노라 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의외로 하나님을 대충 믿는다. 예를 들면 ‘율법’이 무엇인지 몇 십 년을 교회에 다니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설명도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모두 알게 될 것이라고 하셨음에도 늘 모르는 것이 성경이고 신앙생활이라며 교회에 다니는 것이 그것을 대변한다.


사실 성경을 대함에 있어 지극히 상식적인 몇 가지만 온전한 눈으로 봐도 신앙은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된다고 하신 말씀 앞에서 제대로 묵상만 해도 그럴 것이다. 평소에 스스로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 여기면서 성경을 알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은 엄청난 모순임에도 그것에 대하여 탐구하고 묵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남들처럼 일요일에 교회에 가고 어디 가서 도둑질 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라고 여기며 묻어가고 있을 뿐이다.


그런 사람들의 신앙이 베드로 사도가 두 번째 서신을 쓰면서 모든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전하고자 한 바가 있다고 한 것이 이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는 세상에서 귀하다는 것을 얻거나 이루려고 자신의 노력으로 살거나, 아니면 다른 신이나 종교에 의지하고 있다가 하나님을 알고 난 다음에는 이전에 바라던 것을 그대로 하나님께 바라는 것을 경계하는 것이 모든 선지자와 사도들의 외침이었다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옛 신앙>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죄와 타락이 또한 그것이다. 간음이 그것이고, 육신의 정욕이 그것이다.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 영광을 보고서 사람들이 교회로 와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 세상의 가치관과 간음한 것이고,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안락함은 복이고 선이며, 예수를 좀 더 편한 환경에서 믿게 될수록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하는 것이 육신의 정욕인 것이다.


육신으로 살면서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추구하고, 좋은 직장을 가지고 교회에 편히 다닐 수 있게 되면 하나님의 복이라고 여기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도 얼마든지 그런 삶을 살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 여기며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때로 결과나 삶의 모양이 같다고 같은 것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며 추구하기에 하나님께 그것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알기 전에도 구하던 것이다. 단지 그것을 의지하는 대상이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정말로 큰 착각이다.


그 착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기에 사람들이 예수를 대충 믿는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기적으로 들으면서도 자신이 정말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 알게 되었는지에 대하여 반추조차 해 보지 않지만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에 와서 헌금하고 예배드리면 된다고 하니 단지 자신이 그렇게 했다는 것으로 구원 받은 줄로 알고 있는 것이다.


그 신앙은 단지 의지하는 신이 다를 뿐 세상의 사람들이나 자신이나 육신의 안락함을 소망하고 추구하는 육신의 정욕에 불과할 뿐 아니라, 오히려 존재의 하나님께 풍요와 다산을 바라면서 행위로 하나님의 마음을 얻으려 하고, 무엇을 하는 것이(Do) 하나님의 뜻인지를 탐구하고, 그것을 행하므로 하나님이 아니라도 자신이 바라는 것을 얻고자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이러한 심각한 어두움과 하나님 앞에서의 범죄가 오히려 미화되고, 하나님을 믿는다며 떼거지로 모여서 교회라 칭하고 교회가 나서서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크고 화려하며 비싸고 높은 것을 추구하고 가르치며, 육신의 정욕으로 바라는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면 주신다고 선동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에게 타락했다고 그렇게 분노하시고, 사도들의 때에는 세상의 것을 추구하는 옛 신앙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에 무엇을 하느냐에 관심이 없다. 아니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무엇을 할 것인지는 존재만 정해지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으로 나면 사람의 행동을 할 것이고, 개로 나면 개로 사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면 그리스도로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어두운 사람들이 그리스도로 났기에 세상에서 모범을 보이고 착하게 살며 성공해서 본이 되어야 한다고 한다. 그리스도의 본성 안에 그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고서야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무당에게 굿하며 바라던 것을 고스란히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무당이 굿하면서 바라는 것과 사람들이 교회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전혀 다르지 않다. 이것조차 구분하지도, 부끄럽지도 않은데 어찌 하나님을 알겠는가? 이것을 모르니 무당에서 받은 부적을 몸에 지니듯 자기 육신이 바라는 바의 성취를 위하여 기도하고, 성경보고, 말조심 하는 것이다. 자기 안에는 기도하는 본성이나 성령이 알게 하신 성경의 이치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에서 비롯된 것이고, 옛 신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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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기록한 모든 저자들, 구약이든 신약이든 무관하게 일관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 외에는 없다. 이렇게 정의를 내리면 사람들은 쉽게 동의하지만 정작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거의 대부분의 신앙인들은 성경을 읽고서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그리스도라는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은 세상의 어떤 문제와 연관 지을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망각한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그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그것뿐인데 ‘예수 믿는 사람은 착해야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은 말부터 행동까지 모두 선해야 한다.’라는 것에서 시작해서 ‘예수 믿는 사람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어서 그 부를 가지고 가난한 사람을 돕고, 그래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까지 많은 조건들을 붙인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 마다 마음속에 정말로 도전적인 질문을 하고 싶은 마음이 뜨겁게 든다. 그럴 때 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기도 하다. “예수 안에 그것이 없어서 그것을 걱정하느냐?”고 정말로 물어보고 싶다는 것이다. 도무지 성경을 어떻게 보면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있는데 그 사람이 세상에서 악한사람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는데, 성경을 학문으로 만들어 공부해서 거룩한 꼴로 가운을 입고서 설교하는 그 설교가 그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이것은 복음이 이 땅에 전해진 이래로 복음이 자기 생명이 된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울분이며 뜨거움일지도 모른다. 다시는 복음을 전하려 하지 않으려 해도 마음에 불이 붙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고 한 예레미야나 예루살렘의 멸망을 생각하시며 우신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을까 싶기도 하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만 알면 그것이 모든 것이고 또한 영생이라고 그렇게 분명하게 적혀 있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이 성경을 읽고서 그것을 지켜 행하여 육신이 이 땅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귀하게 여기는 삶을 얻고자 하는지, 그러고도 하나님을 믿노라 하니 이것이야 말로 참담한 것이다.


특히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전하는 서신들 속에는 알고 보면 모든 것이 이 말씀이었다 싶을 정도로 같은 말씀을 구구절절이 해 놓았지만 아직도 사람들은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라며 복음에 무엇을 더하고 있다. 그들이 그렇게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에 더하여 도덕성이나 신학이나 철학과 같은 지식이나 세상 가치관이 선하게 여기는 자리와 같은 것이 있어야 한다며 바라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온전히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 하나 밖에 이유가 없다.


예수가 모든 것이라고 믿는다면 <예수 + something>을 생각지 않을 것이다. 바울 사도가 세상의 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한 것을 알고 있다면 신학이나 창조과학과 같은 헛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이 있으면 더 좋다고 여기는 것은 예수 자체로서는 부족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 아들의 선하심을 믿는다면 예수 믿기만 하면 된다는 선언 앞에 ‘그러면 예수 믿으면 도둑질을 해도 되느냐?’고 질문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정말로 단 ‘1’도 모르는 어두운 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금 베드로 사도가 변화산에서 있었던 사건을 상기시키고 옛 신앙을 상기시키면서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다고 말씀하는 것이 이것을 이야기 함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전했더니 하나님을 믿노라하면서 하나님께 육신이 가진 문제들, 평안을 추구하는 육신이 바라는 것들, 세상의 가치관이 좋다고 여기는 것을 구하는 것이 바로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 가서 자식이 시험에 붙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육신이 수고하지 않고 기도만 하면 병이 낫듯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더 좋은 신앙이라 말하고, 그럴 수 있으면 더 좋은 것이라고 하며,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기까지 소비했건만 신앙이 좋으면 육신의 평안이 보장되어 하는 것 같이 목사를 대접하고, 좋은 파이프 오르간이나 스탠드글라스로 수놓은 교회를 지으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하며, 교인이 세상의 권력 가진 자리에 오르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라고 믿는 신앙이냐는 것이다.


또 하나님을 믿을 값이라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믿을 것인데 그 실수도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경영하신다면서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거리로 뛰쳐나가고, 정당을 만들며, 예배 시간 대표기도 때에 거룩하답시며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세상을 잘못 다스리고 있으니 각성하라고 훈계하고 도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모두 옛 신앙으로 돌아간 것이고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며 씻은 돼지가 더러운 곳에 뒹구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려면 하나님의 정체성을 알고 그것을 믿어야 하는데, 존재의 하나님을 믿노라 하면서 풍요와 다산의 잡신들께나 기도하는 것들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신앙이 바로 옛 신앙이며, 그 신앙에 기생하는 신학과 신학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꾸며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높은 곳에 서서 세상의 가치관이 높다고 하는 곳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올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 성경대로 살아야 한다고 외치는 그 소리들이야 말로 정말로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 있는 것이며 회 칠한 무덤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모르던 자들이 하나님을 알게 되고 나서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알기 전에 자기 육신이 바라던 것을 고스란히 하나님께 구하는 그 신앙이 바로 옛 신앙이고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며, 그것에 신앙을 의탁한 자들은 소경이며 죽은 자이고, 그들 앞에서 그 더러운 것을 외치는 자들은 가증한 것들인 것이다. 그런 것에서 하루라도 빨리 달아나는 것이 진정 자기 영혼을 구하는 것이라고 성경의 구절구절에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예수 그리스도이심도 알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은 세상의 가치관이 선하고 성공한 것으로 여기는 것을 선으로 알지 않고 오히려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하나님 아들의 본성을 가졌음에도 그 본성이 이끄시는 대로 종이 되고 육신으로 더 수고하고 종이 되며, 세상에서 실패자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온전한 신앙이며 신의 성품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경건한 신앙인 것이다.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 곧 자기 안에 하나님 아들의 본성이 있어 그 본성이 모든 것이 되었기에,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신앙생활을 더 편하게 하는 것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세상에서 성공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가졌더라도 다 배설물과 같이 여기는 사람들은 옛 신앙으로 가려해도 갈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이 행여 신앙이 타락할까 염려한다면 그 자체로 이미 옛 신앙에 있는 것이며, 성경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행여 자신에게 뭔가 해로운 일이 생길까, 세상 사람들 앞에 수치스럽게 될까 염려하므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 역시 그 자체로 옛 신앙인 것이다. 그것이 토한 것을 다시 먹는 것이고, 모든 사도들이 경계하는 믿음인 것이다.


복음은 오히려 세상에서 얼마든지 수치 당할 수 있고, 불편할 수 있으며, 수고스러울 수 있다. 때로 다윗과 같은 영화를 누릴 때도 있겠지만 그래야만 좋은 신앙이라 여기지 않는다. 빈곤에도 부유에도 처할 줄 안다는 것이다. 그 신앙에는 성경을 지키지 않아서 해를 당할까 염려하지 않는다. 자기 안에 있는 본성대로 살 뿐인 자기 모습이 성경대로 살고 있다는 것을 보기 때문이다. 그런 눈을 가졌고, 그런 생명을 가졌기에 빈곤에도 부유에도 처할 수 있는 생명을 가졌고, 예수 이외에 무엇을 더하지도 않는 신앙을 가지고 살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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