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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에 절제를

하나님을 아는 것은 공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이다.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하신다고 하셨다. 신학이나 성경공부를 하고 싶다면 그 말씀 앞에서 멈추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결국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공부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공부한다는 것은 모른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신학이나 성경공부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알고자 했다면 예수님께서 성령이 오시면 다 알게 하신다고 하신 말씀을 보았을 것이고, 그 말씀을 믿었다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진심으로 인정했다면 그 말씀 앞에서 공부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성령으로 인하여 알게 된 모습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정할 수 있어야 적어도 양심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안다는 것은 단연코 머리로 안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안다는 것’은 자기 안에 체휼되었기에 부인하려 해도 아는 것이요, 인지하지 않아도 이미 그렇게 살고 있는, 더 나아가서 살 수밖에 없는 모습인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생수의 강이 네 속에서 넘쳐날 것이라고 하심이나, 성령이 오시면 모든 알게 하신다는 것이나, 하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을 아는 것이라고 하심과 같은 말씀들이 모두 다 그런 의미이다. 하나님을 알면 자기 안에 영생이 있다는 것까지 안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식 곧 안다는 것이 절제를 가져올 수 있다. 절제는 신념을 가지고 참는 것에서 시작할지 모르지만 온전한 절제는 그것 자체에 관심이 없어지는 세계이다. 예를 들면 초식동물들은 고기를 먹는 것을 절제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게 완전한 절제이다. 하나님을 알면 우리가 교회에서 절제해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들이 하나씩 자기 삶에서 관심 밖으로 사라진다. 


그러니까 절제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절제하게 된다. 그것은 세상을 아는 것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절제라는 결과를 수반하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일을 보면서 참으려고 애를 쓰거니, 자기관리 교육 같은 것을 도입하여 절제하려는 것은 절제도 아닐뿐더러 하나님도 모르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절제에 인내를


그렇게 되면 인내도 물 건너 간 것이다. 인내는 참고 있는 과정까지에 대한 말이 아니다. 참아낸 결과까지가 인내인 것이다. 성경을 지키는 삶에서도 비슷한 개념이 있는데, 아무리 열심히 지켜도 어느 날 하나를 지키지 못하면 어차피 어긴 사람이 되는 것처럼(그래서 성경을 지켜내려는 것이 율법 신앙인 것이다.) 인내도 인내하려 애쓴 것으로는 인내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참아 내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인내는 고통을 견디는 것이 아니다. 그럴 값이라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고통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셨으면 될 일이지, 고통을 느끼게 해 놓고서 그것을 참아내면 인내한 것이라고 은혜를 주신다면 하나님은 아주 고약한 신이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은 더 처참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랬다면 하나님은 온전하지도 않다. 만든 사람이 미완인데 보기에 좋다고 하신 분이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내는 어떤 면에서는 이중적일 수 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참는 것 같지만 정작 하나님을 아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본성이고 어쩔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고통이 참는 것으로 또는 견딘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본성이 있는 사람이 보면 그 고통은 견디고 참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가져다주는 본성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많은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내라는 것도 절제와 마찬가지로 자기 안에 그럴 수밖에 없는 본성이 있어야 한다. 참으려고, 견디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본성이라서 어쩔 수 없기에 남들이 볼 때 견디는 것으로 보이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이 생명의 말씀인 성경이 말씀하시는 진정한 인내인 것이다.



절제와 인내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부터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것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하나님을 아는데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은 모른다? 이럴 수 없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아는데 하나님을 모른다? 그럴 수도 없는 것이다. 다른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의 일부나 지엽적인 것인 것일 수는 있어도 적어도 사람에게는 그것이 자기 존재의 전부인데 하나님을 아는 것과 자기 존재의 목적과 삶의 의미가 분리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세상의 것에 대하여 절제할 수밖에 없다. 가치관이 이미 돌아섰는데, 위로 올라가는 것을 선으로 영광으로 복으로 여기던 삶에서 뒤돌아서서 낮아지고 자기 육신을 자기 의를 주장하는 인생들 앞에서 죄인과 같이 수고하는 것에 내어주는 방향으로 돌아선 사람인데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추구하는 것에 대하여 절제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회개라는 말의 뜻이 ‘가던 길을 돌아서다.’라는 것이 괜한 말이 아니다.


절제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소비하라고 주신 육신을 오히려 영화롭고 평안하게 하는 것을 복으로 여기고 육신이 그렇게 되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을 흠모하는 마음을 참는 것이 절제다. 사람들은 오히려 절제되지 않는 것을 복으로 여기면서 겉으로는 그것을 참는 것이 속물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무덤에 회칠하듯 치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자기 존재의 목적을 알기에 육신을 그렇게 사용하지 않는다. 육신이 평안해지는 것을 선으로 복으로 여기는 세상의 모든 가치관들이 한편으로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속물이라 포장할 때 하나님을 아는 사람들은 그것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생명이 자라면서 관심을 두었던 것이 하나씩 자라져 가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을 알면 자기 자신도 모르게 절제하는 인생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절제된 삶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볼 때는 참고 견디는 고통이 있는 삶과 같이 보인다. 물론 축구를 좋아한다고 뛰어 다닐 때 숨차지 않는 것이 아니듯 하나님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볼 때 힘들고 고된 면이 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특급 호텔의 서비스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억지로 절제하지 않지만 절제하는 것이 가진 느낌은 그대로이다. 다만 본성이 그럴 뿐이다.


인내 또한 그렇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고통을 이기신 것은 신비한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리스도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생명이 본성을 거스르고서야 그 생명의 정체성과 이름을 부여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자가 고기를 안 먹는다면 사자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그 십자가의 본질인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죄인의 의 앞에 육신으로 수고하는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인내도 다 본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 인내도 절제도 하나님을 알면 어쩔 수없이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을 아는 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명으로 시작해서 그 생명의 본성에 이끌리어 절제하게 되고 인내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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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 1:5-7)



믿음에 덕을


성경에는 위의 말씀과 같이 단계적이거나 열거된 말씀들이 제법 있다. 이런 말씀을 대하면 순간적으로 사람들은 각각이 순서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많은 경우 순서가 있는 것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계단과 같이 하나씩 성취해 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람과 같은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를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는 것은 믿음이 있으면 덕을 세우고, 그리고 그 다음에 지식을 갖추고, 지식이 있는 자는 절제하려 힘쓰고, 그래서 참고 인내하라는 식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말씀 역시도 생명의 법으로 봐야 한다. 적어도 하나님을 생명의 주라고 여긴다면 생명의 주관자가 주시는 말씀이니 생명의 관점에서 봐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나무가 열매를 맺듯이 덕을 세우게 될 것이며, 덕이 있다면 지식의 밝음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며, 안다면 당연히 절제할 수밖에 없을 것이며, 그것은 인내로 나타나고, 그 인내는 우리 육신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경건한 삶이 될 것이며, 그 경건은 결국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 말씀을 대함에 있어 단계별 숙제처럼, 또는 예수 믿는 사람이니 저 덕목들을 하나씩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가르치고 받고 있다면 단언컨대 생명의 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생명의 법을 아는 사람이라면 이 말씀을 대하면 베드로 사도의 열거한 순서가 마치 아이가 나면 누워만 있다가 얼마가지 않아 뒤집을 것이며, 그리고 얼마가지 않아 기어 다니다가 일어서게 되고 얼마가지 않아 말하고 걸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신성에 참예하는 사람들에게 저런 일들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밖에 없다.


이 말씀의 시작은 ‘이러므로’이고 그것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예한다면’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이 자기 안에 본성으로, 생명이 되었다면 그 생명은 베드로 사도가 열거한 삶의 모습을 보일 것이라는 것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각각의 덕목은 생명으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생명이란 시절을 좇아서 잎이 나고 열매를 맺듯이 자란다. 이것은 언뜻 순서를 가진 일이만 약속된 것이기도 하다. 덕이라는 것은 사실 영어에는 없는 말에 가까운데 NIV성경에서는 diligence라는 단어로 표시되어 있는데 있는 부지런함에 관한 것이다. 이는 성경에서 말하는 빈도부사와 관련이 있다. ‘항상’, ‘쉬지 말고’와 같은 말씀들이 있는데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온전하다면 부지런하다고, 그리고 그 부지런함을 인하여 덕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어떤 때는 있고, 어떤 때는 없거나 약해지는 것이 아님을 안다. 항상 기뻐하라는 말씀을 두고 본다면 살아가다 화가 나는 순간 ‘아 항상 기뻐하라고 했지!’라며 화를 참는다면 이미 ‘항상’이라는 조건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그냥 그 삶 자체가 기쁜 것이고 삶이 감사한 사람이라면 사는 동안 항상 기쁜 것이 되는 것이다.


물론 사람이 때로 화를 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것에 화가 나는가의 문제이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 예수님께서 화를 내셨던 것, 사도들이 경계하는 것들을 보고서 화를 낸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씀하시는 항상 기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로 살고 있으니 그런 것에 대하여 화가 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항상’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라는 것이고, 하나님의 의를 가졌다는 것이 기쁨인 사람은 그 모든 순간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에 덕을 더한다는 것은 믿음이 있기에 언제나 그 믿음을 인한 성실함이 있다는 것이다. 이 성실은 신념으로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그 믿음의 성실함은 마치 우리가 사는 동안 의식하지 않아도 끊임없이 숨을 쉬는 것과 같아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본성이 된 사람의 믿음은 그 믿음의 성실함이 그와 같이 쉬지 않고 성실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덕에 지식을

그리고 그 믿음과 덕이 있다면 스스로 자기 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생명과 말씀과 법에 대하여 지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공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공부’라는 말도 고착화되어 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요 14:26) 


지식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지식이라 여기시는 것이고,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아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시고 보이신 모든 것이 그것이며, 그것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성령이 임하시는 것 그 하나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정말로 성경을 공부하고 싶다면, 아니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을 알려고 한다면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 앞에서 멈추어야 한다. 신학이나 성경공부를 하고 있는 자신은 성령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한 신학이고 성경공부인 것이다. 공부한다는 것은 모른다는 것이고 모른다는 것은 성령이 없다는 것, 성령이 임하지 않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덕에 지식을 더한다는 것은 신사다우면서 성경에 대하여 많이 알고 공부한 사람이라는 것과 같은 의미가 아니다. 덕이 있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하고, 그 믿음은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 곧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성이 되었다는 것이며,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본성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니 그것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과 본성이 되도록 잉태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신의 성품에 참예했다면 그것이 바로 성령이 오셔서 모든 것을 알게 하셨다는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본성이 되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 믿음이 있는 것이며, 이 믿음은 생명에 관한 것이니 생명이 그 숨을 쉬듯 성실하며 또한 숨 쉬듯 표현되는 생명의 본성이 덕스러운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 이것은 한 단계씩 이루거나 더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 자라면서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현상들인 것이다.


그렇게 안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오직 생명이요, 하나님께서 생명으로 여기시는 그 생명은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존재의 정체성으로 순종한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그 순종하고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이 그 속에서 생명이 되도록 하시는 성령이 임하셔서 그리스도의 모든 것을 알게 하시니 그것이 바로 지식을 더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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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의 의를 동일한 믿음으로 가진 사람들에게 편지를 하면서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큰 약속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다.(이 말씀은 히브리서 11장에 말씀한 약속을 받은 믿음을 생각나게 한다.) 약속이 있는 믿음, 약속을 받고 믿는다는 것은 그 약속이 자기를 유익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약속이 바로 자기 자신의 일이라는 의미이다.


베드로 사도가 언급한 약속 역시 그렇다. 약속을 믿는 사람은 약속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는 것 보다, 그 약속의 주체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약속은 결국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다는 것인데,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다는 약속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약속을 믿는 사람 자신이 신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된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약속은 앞선 글에서 이야기 한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시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자신의 의가 되는 것 보다 귀하거나 큰 것은 없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라고 믿는다면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보배는 하나님과 의가 같아지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약속은 어떤 이행을 수반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 자기에게 이루어지려면 자신도 뭔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헌금을 하고, 봉사도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말을 선하게 하고, 속에는 화가 나지만 참아야 한다며 참고 살아가는 이유가 바로 그것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약속한 것을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약속은 그런 약속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 한 것과 같이 이 약속의 성취는 자기 자신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돈을 더 가지게 되는 것과 같이 한 사람에게 어떤 것이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신이 그 약속의 대상이고 성취의 결과라는 것이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게 되는 것은 훈장과 같이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곧 신의 성품을 가진다가 된다는 것이다.


사실 베드로 사도의 편지로만 본다면 베드로 사도가 문안하는 그 대상들, 곧 그리스도의 의를 동일한 믿음으로 가진 사람들은 이미 그 약속이 이루어진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것, 곧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된 사람이 곧 그리스도고, 그 그리스도의 의가 하나님의 성품을 가졌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가졌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의를 가진 사람들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의를 믿음으로 가졌다는 것과 신의 성품을 가졌다는 것은 같은 의미인 것이다.


다만 베드로 사도는 그런 성도들이 가진 믿음과 신의 성품을 가지게 하시겠다는 약속이 이루어진 근거가 예수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을 인함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약속의 이행을 위하여 하나님께 뭔가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약속이 이루어진 것은 오직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 그 하나를 인함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 곧 십자가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시는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시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뜻하신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경건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 모습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라 순종하게 되었을 때 예수님의 신기한 능력이 임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말씀도 그렇다. 우리가 그 부르신 자를 알았기 때문이라고 하심이 그것이다. 부르신 자는 예수 그리스도요 그 부르심은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며,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모습이기에 육신을 가진 우리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나의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이 부르신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운명이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인생으로 창조하시고 삶을 살게 하신 이유와 목적이라는 것을 순종하는 그것이 바로 부르시는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안다는 것이 바로 신의 성품 곧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그것을 본 사람들이 그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듯이.


또한 이러한 약속은 썩어질 정욕을 피하게 하신다고 하셨는데 이 또한 별개의 옵션이 아니라 같은 맥락이다. 정욕이란 육신이 추구하는 바를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정욕이 단지 성적인 욕망이나, 돈에 대한 욕망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이 주체가 되려는 모든 생각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육신이 주체가 된다는 것은 육신을 평안하게 하고, 육신이 속한 세계 흔히들 세상이라고 말하는 곳에서 가치를 부여한 것을 육신이 이루고 누리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신이 좀 평안해지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신 것이라 여기고, 육신이 세상의 가치로 볼 때 성공이나 높이 오르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육신이 평안하면 할수록 더 신앙생활하기 좋다고 여기며 그것을 복이라고 여기는 것이나, 육신이 도모하는 일이 잘 되지 않으면 욥의 세 친구와 같이 교회에 가야한다거나 하나님 앞에 어떤 행실이 잘못되었는지 돌아 봐야 한다거나, 예수 믿어야 해결 된다는 식의 생각과 같은 모든 것이 바로 육신의 정욕이고,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는 썩어질 정욕에 관한 것이다.


왜 그것이 정욕인가 하면 그것은 육신은 하나님이 주신 소비재인데, 반대로 그 육신이 소비되지 않고, 피곤하지 않은 가운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이 은혜요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육신이 소비재가 아니라 육신을 본질로 보기 때문이다. 이 육신을 본질로 보는 사람에게 십자가는 참혹한 것일 뿐이다. 육신이 죄인이 되어 처형당하는 것이니 당연한 것이다.


또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므로 자신들이 육신으로 살아가면서 지은 죄를 사하여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육신을 본질로 보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장 본질적인 말씀을 육신의 행함과 결부시킨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가 행위로 지은 죄를 사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지으신 목적을 이탈한 삶을 사는 것에서의 회복을 위하심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죄를 범하는 것도 독립된 행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벗어난 결과의 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를 그 행위로 지은 죄를 사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본질을 보지 못하는 것,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이기에 육신의 정욕으로 십자가를 보는 것이다.


따라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은 창조 때에 정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 자기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순종한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다. 세상 지으신 하나님과 같은 의를 가지는 것 이상의 귀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귀한 약속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것이 우리 삶의 목적임을 순종하는 사람, 육신을 본질로 보지 않는 사람에게 임하는 은혜인 것이다. 자기 힘으로 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으로 되는 약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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