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5:14-21) 감사와 복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에베소서 Date : 2019. 8. 14. 06:44 Writer : 김홍덕

범사에 감사한다는 것은 마음으로 다짐하고 신념을 가진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념이나 다짐으로는 노력한 흔적을 엿보는 것은 어렵지 않겠지만 항상 그렇다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게 될 수는 없습니다. 어떤 것이 ‘항상 그렇다.’고 누구나 인정하려면 존재가 그러해야 합니다. 여자는 항상 여자지만 여자다움은 ‘항상’일 수 없는 것입니다. 여자도 때로는 남자다울 수 있기 때문에 범사에 여자답다는 말은 사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특히 바울사도가 범사에 감사하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렇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으로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으면 항상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것이 감사함이라는 것이 체휼되면 말 그대로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체휼된 이들에게는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도 알게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십시오,’, ‘노력하십시오.’와 같은 말은 합당치 않다는 것을 안다는 것입니다. 육신의 일, 평안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고자 하는 가치관에 입각해서 잘 된 일로 인하여, 아니면 위기를 벗어난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태어나지 않은 것보다 삶이 주어진 것이 감사한 사람들의 감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사도는 그 감사함에 이어서 피차 복종하라는 것을 함께 권면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이 서로에게 복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범사에 감사하게 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너무 공경할 것이며, 그 공경할만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는 삶을 경외함이 서로를 피차 복종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은 서로 복종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복종은 순종과는 달라서 자신의 의지가 굴복당한 것을 의미합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영어의 obey도 복종으로 번역된 경우가 많지만 이곳에서는 submit을 사용하고 있습니다.(NIV, KJV 공통) 문제는 복종이라는 것이 감사함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지가 굴복당한 상황이 감사한 것이라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일반적인 상식에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비단 이 뿐 아니라 생각해보면 성경에서 순종과 복종은 혼용되다시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을 말씀별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명의 법을 알면 이것은 혼용되어도 전혀 무방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생명은 본성이 이끄는 대로 자연스럽게 순종합니다. 본성이 이끄는 것에는 억지나 강제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순종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본성 앞에 본성과 다른 의지는 없기 때문에 본성에 복종한다고 해도 무방한 것입니다. 즉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것은 억지가 아니기에 순종이고 또 그 본성과의 관계로 보면 의지가 주장되지 않는 복종이기도 한 것입니다.


지금 바울사도의 권면에서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인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의 본성이 범사에 감사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감사가 그리스도의 본성 중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이는 사는 모든 순간 감사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사람은 자신의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인하여 범사에, 항상 감사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 사람의 힘으로 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알지 못했다면 그렇게 살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기에 그것에 대하여 경외함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자신을 보는 경험을 한 사람들의 세계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생명에게 자신이 제출되어(submit, 복종) 있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사는 것 아니요’와 같은 고백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피라미드의 위를 향하던 이전과 다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에게 자신이 복종되었고, 또 자기 삶이 그리스도의 생명대로 사는 것에 억지가 없는 순종하는 삶이 된 것도 아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거듭난 생명이 되어야 그 생명을 가진 이들에게 서로 복종할 수 있는 것입니다. 복종을 하는데 그것이 감사함의 연장선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자신이 드려진(submit) 것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서로에게 복종해야겠다는 다짐으로 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념이나 노력으로 범접할 수도 알 수도 없는 또 다른 세계인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사도가 범사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하고 이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한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이들끼리의 세계입니다. 물론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리스도의 생명도 없고 하나님도 알지 못하며, 세상에서 귀하다는 것을 가진 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가치관이라는 어두운 사람들의 가치 앞에도 순종하는 생명입니다. 그러나 피차 복종하려면 말 그대로 서로가 같은 생명을 가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신앙 이상의 일입니다. 즉 여기서 교회가 생기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에베소서 초반에 많이 설명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서로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들이고 그렇게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삶의 의미와 내용이 되는 것에 자신을 드려 복종한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이러한 감사는 이어서 그리스도의 생명 여부와 무관하게 우리의 범사에 속하는 결혼생활과 부모자신 그리고 사회에서의 상관과 부하의 일에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존재 자체가 감사하는 삶을 사는 존재이기 때문에 각개의 일이나 사건에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것과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모든 인간사의 일들이 감사함이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의 이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의 삶에 관한 것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그리스도인다움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끄는 삶이 어떻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사도의 권면이 가지고 있는 본질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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