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알고 보면 단 한 가지 오직 이것 때문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 그 하나 때문입니다. 그 하나가 사람들 사회에 성문법으로 정하여 규제하는 모든 죄악 된 행위를 표출하는 것입니다. 나는 옳은데 네가 자꾸 틀린 것을 옳다 하니 화가 나서 때로 죽이며,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싸우는 사람이나 나라간의 전쟁이나 이유는 같습니다. <너는 악하고 나는 선하다.>는 그것 하나뿐입니다.


싸우는 것이 아니고 도적질과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행하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선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야 도적질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에 자신이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그 하나가 모든 인생의 죄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문제 하나의 시작이 아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시간적인 시작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 마음 안에는 누구나 그런 본성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이 아담을 시작으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범죄가 우리 사람들 안에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아시고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인가? 그런 범죄를 지을 여지가 거의 100%인 사람을 만들어 놓고, 죄를 지으면 벌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고약한 분이신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전에 쓴 글 <에덴동산의 미스터리>를 참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담은 오실 이의 표상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자리를 사람들이 떠나서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만이 창조주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실 수 있음에도 사람이 스스로 그 자리로 올라서려고 한 것이 자기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그것이 원죄고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로 인하여 사람들은 모든 갈등과 죄의 문제에 빠진 것입니다. 이 일이 아담으로부터, 아담이 그것을 보임으로 모든 사람이 그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아담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담이 예수님의 표상이라는 것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법입니다. 아담이 사람 안에 선과 악에 대한 판단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으로 죄가 드러나게 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원래 모습을 보이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되셨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아담은 죄를 드러나게 했고. 예수님은 구속을 드러나게 했는데 그 법이 모두 한 사람이 그것을 보이므로 모든 사람이 그와 같다는 것을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렇게 죄를 세상에 드러나게 했고, 예수님은 그렇게 세상에 은혜가 드러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은혜라고 또 선물이라고 또 은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시작 부분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롬 1:11)를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은사를 말하겠다고 한 이유는 바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쓰고 있는 줄기가 그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주장,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 주장에 맞서 온전한 하나님의 복음과 율법을 주신 의미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맥락에서 볼 때 아담은 율법을 주장하는 자들과 같이 사람들의 죄를 드러나게 하고, 또 사람의 본성을 죄로 규정짓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은혜와 선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이 가능한 것, 아니 이 논쟁의 핵심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 육신을 가진 인생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육신을 가진 인생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이 어떤 목적과 의미를 가졌는지를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육신을 정죄하였고(부끄러워하였고) 예수님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구원의 은사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육신을 정죄하였고(부끄러워하였고) 예수님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구원의 은사를 보이심


이것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 그리고 또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아니 절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교회에서 장립집사, 권사 그리고 장로가 되는 과정에서 내는 헌금을 많이 비판합니다. 직분을 매매하는 것 같다고, 또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보다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직분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사회 윤리적 비판의 문제 이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의롭게 여기는가 하는 문제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요소, 신앙은 인정되지만 재정적인 측면이나 명예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것 보다는 신앙에 큰 문제가 없다면 기왕이면 다홍치마니 재력이 낫고 명예가 있는 사람을 항존직으로 선출하면 교회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일이 잘 될 것 이라는 복선이 깔려 있기에 세상적 역량이 나은 사람을 장립집사, 권사 그리고 장로로 선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임직식 때 헌금을 얼마나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그 기준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아담과 그리스도의 법이 공존



이것은 바울 사도 당시에 로마교회와 여러 교회에서 겪었던 문제와 동일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도 육신의 일이고, 율법을 지켜내는 것도 육신의 일입니다. 그와 같이 지금도 육신의 어떠함이 조금 더 나으면 하나님 앞에 좀 더 의롭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의 어떠함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바로 아담으로부터 세상에 들어온 것이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말씀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육신을 보니 자기가 먹은 선악과, 곧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니 부끄럽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꼴로는 안 되겠더라는 것이 아담의 생각이었듯, 바울 사도 당시에 유대인들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보고서 율법의 흔적이 육신에 없으면 온전하지 않다고 했고, 지금 이 시대는 기왕이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교회에서 중직을 맡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은 아담과는 반대였습니다, 아담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가치를 먹고서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부끄러워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육신의 한계와 아담이 부끄러워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 육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신령한 은사요 은혜며 선물이라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우리 인생의 정체성은 우선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워한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인생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 그것이 오히려 시인되고 드러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고, 아담이 육신이 부끄러워 무화과 나뭇잎 곧 율법으로 가렸다고 말씀하신 사람들의 마음(율법을 육신으로 지켜내는 행동으로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마음) 손과 발에 못 박히므로 행동으로 인생이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인생들이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어떻게 정죄하는지를 보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지를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으로 인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속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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