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1-11) 믿음의 본질과 열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9. 07:00 Writer : 김홍덕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은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있다는 것을 바울 사도는 지속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절실한 문제들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하는 일이 많은데, 그렇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일을 보살펴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의 본질일까요? 또는 예수님의 행적은 일반적인 상식으로 믿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은데 그 모든 것이 객관적 사실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일까요?


바울 사도는 이 믿음으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즉 믿음이란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육신의 일이 어떻게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마음에 성령으로 잉태되는 것이나, 물 위를 걷는 것과 같이 의심스럽기도 한 일을 예수님께서 분명히 객관적으로 행하셨다고 믿는 것이 믿음의 본질이 아닌 것은 믿음은 하나님께 의롭다하심을 얻는 결과로 나타난다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는다고 했다는 것은 참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믿음의 결과들, 병이 낫는다거나, 되기 힘든 사업이 된다거나, 예상치 못한 도움을 얻는다거나 하는 것과 같은 것이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 의로움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의와 자신의 의가 같아지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의는 또 무엇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를 아주 도적적인 시각으로 봅니다. <하나님께서 선하게 여기시는 것 ≓ 착하게 사는 것>에 가깝게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로워지는 것이라면 세상에서 착하게 살고, 또 교회가 가르치는 것에 충실한 것이라는 것이고 한정되어 생각하는 터널 시각에 빠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생각해서 늘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도덕적인 것이나, 정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하나님의 의가 그렇게도 나타나기도 하는 것 중의 일부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또한 세상을 만드신 목적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직 하나님만 선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온 천지만물을 지으셨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무엇이 선한지를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은 자만이 그 지은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으니 하나님만이 선하다고 판단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정의로운 것이나 도적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가지셨던 목적, 곧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를 나타내시겠다고 하신 그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하나님의 뜻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앞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것이라고 하심과 같은 의미입니다. 그리고 또 그런 이유로 믿음은 지극히 수동적인 것이며, 그러하기에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라 하심이 또 참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막연히 믿음이라고 하면 신앙에 의탁하여 삶의 문제에 대한 기대적 결과를 담보하는 신뢰 혹은 합리적 이성 너머의 일이라도 하나님이 하셨다는 이유만으로 사실이라고 신뢰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이런 믿음은 신념의 변종 혹은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이 믿음이라는 이름을 쓴 신념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믿음은 의지가 없으면, 능동적이지 않으면 시작도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믿어지지 않는 것을 믿어야겠다고 시작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누군가를 찾다가 그 중에서 하나님의 경쟁력이 최고라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면 앞에서 말한 믿음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는 다 자기의 의지에서 출발한 믿음입니다. 아니 신념입니다. 믿어지지 않는데 떼를 쓰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시작한 약속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신념이 믿음이 아닌 증거는 또 있습니다. 그것은 그 믿음의 결과, 그 믿음의 열매가 하나님의 의로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 글의 서두에 말씀드린 것과 같이 육신이 바라는 바의 성취나 성경의 말씀을 객관적 사실로 인지하려는 노력의 성공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본질은 하나님의 의가 내 삶의 본질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뭐 어려운 것인가 싶겠지만,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안목 안에 눈에 보이는 세계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 열리는 다른 생명의 눈으로 봐야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거듭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의 모든 것, 눈에 보이는 모든 세상이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안다는 것은 율법과 모든 성경은 지키려하고 노력하고 지키기 위해서 기도하고 애쓰며, 자신을 채찍질해 가면서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은 거듭난 생명만 있으면 그 생명의 본성대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몸으로 지키고, 또 교리로 만들어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성경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사람에게 두신 뜻이 사람 안에 생명이 된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 열리지 않았다면 미안하지만 거듭난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열린 첫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니 그것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믿는 사람, 곧 그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이 가진 믿음은 그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보여주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이고, 하나님께서 그 안에 있는 생명을 보니 하나님의 의와 같기에 그 의를,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이고 믿음의 결과며 믿음의 열매요 소득인 것입니다. 이것 외에 육신의 어떤 것이나 객관적인 사실을 믿을 수 있는 마음과 같은 것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고, 미신이며, 오히려 하나님을 그런 것이나 들어주는 잡신 취급하는 오만한 것, 곧 스스로 하나님과 같은 격이 되려한 죄의 모습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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