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5:1-11) 죄인을 위하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11. 07:00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서 핵심적인 십자가 사건을 이 블로그에서 늘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해 왔습니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된다는 것은 그냥 그럴듯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답의 답이기도 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의 답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5장에서 이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많은 신앙인들은 옳은 것을 지키려 합니다. 세상에서 교회를 지키려 하고, 교인들이 모였을 때 신앙이 더 좋은 사람의 위신을 지키려 합니다. 그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 설사 세상의 법에 의하여 시험치고 공부하여 된 목사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교회가 지향하는 신앙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떨치거나 훈계하거나 욕하거나 뒷담화를 하거나 따돌립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반하는 사람이니 멀리하고 터부시 합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교회를 붕괴시키려고 한다거나 능동적으로 다른 신앙을 전파하려 한다면 다른 이야기지만 하나님을 믿겠다는 마음이 있고, 그 신앙을 그 교회 안에서 성장시키고 지키며 나누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치관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로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막으려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베드로는 막았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예는 결국 같은 것입니다. 의인을 더 의롭게 하고 죄인은 죄인으로 대하는 것이라는 것에서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막아선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것을 막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의로운 것을 지키려고 사람을 버리는 것이나 예수님을 막아선 베드로나 모두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의로운 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 그것은 죄인을 위하여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마구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거나, 목사님은 의로운 분이니까 좋은 차를 타고 또 육신이 피곤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나 교회 세습과 같은 일을 하고선 그것을 지적하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 일’ 혹은 ‘하나님의 일에 세상이 간섭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일 뿐 그 어떤 의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부분에서 현재의 신앙인들, 특히 소위 혹은 자칭 영적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관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이나, 초대교회 시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유대교에 뿌리를 둔 사람들의 신앙 가치관과 놀라울 정도로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로마서가 성경으로 남아서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것이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살 수밖에 없는 법으로 성경을 주셨는데, 성경을 학문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생명의 법과는 반대로 교회의 높은 곳에서 서서 말하기를 ‘성경대로 살아가야 하나님께 의로워진다’고 말하고, 의로운 것을 지키기 위하여 신앙에 대하여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세상의 모든 가치는 거저 물리치기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의인을 위하여가 아닙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들에 의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앙인들이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을 본받겠다고 하고, 십자가를 지고서 죽겠다고 하면서, 정작 삶 속에서는 작은 일에서도 ‘네 생각이 틀린 것 같은데…’라는 말에도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옳다하며 자기가 가진 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지키는 것인 양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반대로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더욱이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며 대접받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법과 의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십자가에서 모두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은 모든 인생이 그것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인생에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장대에 들린 놋뱀과 같이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의인이 죄인이 되는 세계인 것입니다.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의인이 그 육신을 죄인과 같이 사형을 당하는 것과, 죄인이 종이 되어 섬기며 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고 살아내는 삶을 사는 것이 십자가의 도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도는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의 법과 요구는 불의한 것이라며 회사가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일요일에 간절한 도움을 청하는 것을 외면하는 것도 십자가의 도가 아닙니다. 또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친구와 가족을 버리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 같이 십자가를 외면하고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의인이 의롭기 위하여 죄인을 심판하고 또 의를 모르는 사람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지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내팽개친 것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죄인을 위하여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어 흘리신 피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으니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생목숨을 버리신 대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가 짓고 벌은 예수님께서 받으셔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생명이 구원을 받는 것인지를 보이셨으니 그 생명이 자기 생명이요, 자기 정체성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