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좀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식의 말을 들어보게 됩니다. 때로는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이나 친한 이들끼리 장난 같은 것을 하면서 이것을 농담처럼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의 말씀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말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칠까요? 이 말씀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정말로 바울 사도가 언급하신 것과 같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지으면 되는 것일까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율법을 주신 이유에서부터 시작하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바울 사도도 율법이 죄에 대하여 개입했다는 말씀과 함께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 5:20)


이 말씀에 앞서 바울 사도는 한 사람, 곧 아담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 앞서서는 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표현이 <율법을 더하여>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하였다 즉 율법이 더해지고 추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아담이 가진 죄는 율법이 없었기에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모세의 때 까지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왕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롬 5:14) 


즉 모든 사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과 같이 자기 안에서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과 세상을 심판하여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판단하는 사망의 자리에 있었지만 이것을 죄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살라고 만드신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그러고 있으니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떠나 죄와 사망의 자리에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스스로 가진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죄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여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부끄러움을 육신의 행실과 겉모양을 바르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 모든 인생들의 그 가치관이 하나님의 법에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시려고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아담과 같은 마음을 가졌기에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자기 육신의 행동을 제어하면 속사람이 바뀌어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가 된다고 여겨 여러 모양으로 자기 육신의 삶을 통제하고 꾸미고 수련하고 절제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은 그렇게 겉모습이요 형식인 행동을 바꾸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모세의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의 여러 글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사람이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가 될 것인가 하는 것에 있어 이 율법은 생명의 법이기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는 그 의가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잉태되어지면 그 생명의 법대로 사는 모양이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했던 것이 모두 죄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사람이 행동으로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의 뿌리가 바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판단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의 삶의 모양이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겠다는 스스로 내린 선악의 판단에 따라 이 육신을 의롭게 할 행위 규범을 좇기로 하고서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주신 의를 알지 못하고 그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생각 자체가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 죄는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게 한 자기 판단, 곧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으니 이 육신을 행동으로 잘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선악과를 먹은 생각인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육신을 주신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원래 아는 것이었는데 자기가 자기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는 선악의 기준을 자기 것으로 삼고서 자신을 판단하므로 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표현하라고 주신 육신의 삶을 가지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니 터무니없이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정죄하기 위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가지신 그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사람이 어떤 모양으로 살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둘 수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할 수 없으며, 그 존재 자체가 안식이 된 존재기에 안식일을 지킬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을 주신 의도하심이 사람에게 온전히 열리게 된다면, 자기 판단과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자기 인생과 또 하나님 만드신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면서 한편으로 자기 육신을 율법으로 단련하려 한 자기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당연히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떠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할 수 없는 가장 크고 근본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존재하게 하신 것과 존재하시게 한 목적을 가지신 이가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가장 큰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떠난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한다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으로 여긴다는 것이니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은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으로부터 깨닫게 되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자기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순종하는 것이니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대로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보고 그 죄를 고백하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원래 목적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죄가 많다는 것은 지은 죄가 많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많다는 것은 고백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고문해서 죄를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죄가 은혜로 이어지려면 죄는 반드시 그 사람 스스로가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더하여 죄가 드러난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므로 그 율법을 인하여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비로소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이 있어 죄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이 율법으로 인하여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이며, 그렇게 고백된 것이 많을 때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많다는 것은 죄를 더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 앞에서 은혜가 넘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많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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