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우리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또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에 대하여 아신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Logos)이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신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말씀, 그의 계획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동에 큰 관심이 없다.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사람의 중심에 있는 것, 행동의 근원이 되는 의와 본성을 본질로 보시고 그것에 관심이 있으시다. 생각해보라. 사람의 하는 행동과 그 결과 중에서 하나님이 하시지 못할 것이 무엇이 있는지? 사람의 행동이나 그것이 가져올 결과 중에서 하나님께서 놀라실 만한 새로운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다 아신다. 사람이란 존재가 가진 육체적, 정신적 모든 능력을 아신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스스로 무엇을 의로 삼을지에 대하여만 비워 두셨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늘 우리를 그릇이라고 하시는 이유다. 그리고 순종을 강조하시는 이유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여 자신 안에 하나님의 의를 담든지, 아니면 자기가 옳다는 것을 자기 의로 삼고서 살든지 그것은 사람에게 맡기셨다. 이런 하나님의 허용이 없었다면 선악과의 문제 같은 것은 애초에 있을 수 없다. 


사람에게 하나님의 의를 순종하고 그것을 자기 존재 목적으로 삼고 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면 사람은 나면서부터 하나님 외에는 모르는 로봇이나 아바타와 같은 존재인데 어떻게 죄를 범할 수 있겠는가? 이 모든 것으로 볼 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와 자신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게 해 두셨다. 그래서 아담에게도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순종할 수 있는 말씀을 주셨지, 못 먹게 한 것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신다는 것은 여기까지 모든 것을 아신다는 것이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순종할 수도 있고, 자기 의대로 살 수도 있는 존재라는 것도 아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 곧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다. 4:12절의 말씀이 Logos가 사용되었다는 것에서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계획이라는 것임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가 없이는 나타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법 안에서 우리에게는 큰 대제사장이 있다는 것으로 이어간다. 제사장은 제사를 드리는 자가 제사를 받으시는 분과 하나가 되게 하는 중재자다. 사람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은 하나님께 무엇을 드린다는 의미가 아니다. 하나님께 양을 제물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양과 같은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제물을 드리는 사람 안에 제물과 같은 마음과 정체성이 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제사다.


모든 제사의 기본인 번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죄사함에 대하여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번제를 드린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먼저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순종하지 않았다는 시인과 고백이 있다는 의미다. 그리고 더 중요하나 것은 지금 내가 하나님 앞에 순종하지 않는 죄인이었음을 고백하고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이제는 무엇이 순종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말씀과 의와 뜻인지 알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은 안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 때만 시인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을 대제사장으로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 자신에게 있어 유일하게 선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선행되고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중재하시기 위하여 보이신 것을 우리의 본질로, 나의 정체성으로, 하나님께서 내게 인생을 주신 목적으로 순종한다는 의미다. 그것을 고백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믿음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자기 생각에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라고 해도)을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이렇게 이어지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앞서 권면 받은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다하는 것, 그 도리를 굳게 잡는 그것이 바로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을 믿는 도리를 다하는 것이 우리 존재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믿는 도리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우리의 대제사장이시니 그를 믿는 것이 우리의 도리라는 것이다. 이는 우리 인생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듯이 힘든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므로 자기 힘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 뿐이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도리라는 생각과는 전혀 결이 다른 말씀이다.


사실 많은 신앙인들에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삶의 의미와 존재 정체성에 관한 것이라는 것으로 새롭게 보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육신의 평안과 세상에서의 성공을 기대하는 것에 기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행동, 성경을 어떤 행동으로 철저하게 지켜내야 육신의 삶이 험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세상에서 이긴 자가 될 것인지를 신앙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을 정말로 눈 뜨고 제대로 보았다면 분명히 예수님은 세상에서 패한 자, 그것도 약간의 실패자나 순간의 실수를 한 사람이 아니라 완전한 실패자인 사형수가 되셨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실패자의 자리가 하나님 아들의 정체임을 보이심은 물론 예수님을 믿으려면 그 십자가를 우리도 지고 따라오라고 하셨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렇게 해 주실 것을 믿는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데 그것을 기독교인들이 자기 신앙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우리의 대제사장으로 믿는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우리를 중재하시기 위하여 보이신 것이 하나님 앞에서 우리 인생들에게 주어진 유일한 표본이고 믿음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우리 존재의 목적을 설명하는 유일한 본이라는 것이다. ‘도리’란 사람이 해야 할 가장 마땅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니 사람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에 순종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하고 마땅히 해야 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에게 있어 자기 존재의 목적에 속하는 것이 가장 온전한 안식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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