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로움과 십자가의 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8. 26. 00:48 Writer : 김홍덕

결혼 후 처음 맞이한 명절, 그 끝자락의 일요일. 신랑은 언제나 그랬듯이 교회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 그 시각 신부의 친정에서는 조카 사위 한 번 보겠다고 친척들이 귀향(성) 시간을 늦추며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축구는 늘 그랬듯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되고 있고, 신부는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신랑은 축구가 거의 끝날 무렵에서야 남들보다 조금 일찍 마치고 운동장을 나섰지만 그 역시 마음이 불편하다. 교회의 지체들과의 매주 하는 축구 시간이 처가의 친척들과의 결혼 후 처음 맞는 명절에 나누는 인사와 비교할 때 더, 아니 너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로 불편하게 도착한 신부의 친정, 당연히 대부분의 친척들은 돌아갔다. 그 시간까지 있을리가 만무했다.


여기까지는 서론이다. 본론은 그 다음이다. 신랑은 신부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정에 있는 너의 옷가지를 다 챙겨라'

그리고는 정말 그렇게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겨서 그들은 신혼집으로 돌아갔다. 마치 다시는 친정에 와서는 안 될 것 처럼. 교회의 지체들과 노는 시간을 빼앗은 죄를 지은 신부는 그렇게 옷을 가지고 돌아갔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크라이막스는 여기가 아니다.


이 부부의 일은 그 교회에 소문이 났다. 아니 정확히는 다음 예배 후 간증 시간에 부부의 간증으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결론은 신랑의 승리(?)였다. 신랑의 처사가 진정으로 복음적인 것이기에 찬양을 받았고 교회의 다른 지체들은 신랑의 신앙을 본 받아야 한다고 화답하고 칭송했다. 그리고 신부는 진심으로 자신을 돌이켰다. 그리고 그런 신부의 모습에 교회의 지체들이 역시 화답했다.



평범하지 않은 듯한 이 이야기는 실화다. 그리고 조금은 오래된 이야기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일이 있을 때 나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때도 지금 만큼은 아니지만, 그것을 복음으로 받아 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난 그냥 지나갔다. 어쩌면 적어도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지나왔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다. 무엇이 더 옳으냐를 떠나서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적어도 내 마음의 빚이다.


오늘 문득 이 이야기를 생각해 보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묵상을 글과 또 녹음 파일로 표현하면서 그때 완연하게 동의되지 않았던 그 마음이 진정한 복음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실화의 어디에서도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십자가의 도"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교회에서 보내는 시간을 신앙적으로 볼 때, 아니 사람을 하나님이 만드셨다는 신앙 안에서 하나님과 관련된 시공간에 사람이 더 함께하고 기여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분명히 의로운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야구로 비유한다면 안타를 친 것과 같다. 안타를 친다는 것은 야구라는 스포츠에서 경기를 이기기 위해서는 절대적인 것이다. 하지만 야구는 점수로 승부를 가린다. 안타가 중요하지만 안타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라고.


성도가 서로 교통하고 사랑하며 또한 공동체를 이루어서 함께 삶을 보내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의 본질이 나타나는 한 형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한 형식이라는 것이고, 그리스도라는 생명이 가진 행동 습성의 한 모습이라는 것이다.


결국 신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바로 저것이 하나님의 본성이구나!" 라고 탄성을 내게 하고,

"이 신앙은 나도 가지고 싶은 신앙이구나!"라는 감동을 주어

신앙 가진 사람을 접하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을 깨닫게 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는 것이 바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사건 속의 신랑은 의로웠다. 아직 신앙을 가지지 않은 처가의 식구들의 바람을 들어주는 것 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백성들과 함께하는 의로움을 선택했다. 하지만 그 의로움은 죄인이 된 적이 없다. 기껏해야 발을 동동 구르는 신부의 눈치를 보며 분이 난 마음 그것 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의인이 죄인이 된 것이 아니라, 의로움이 의로운 대접을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분냄, 그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로움이 세상의 군병들에게 끌려가서 십자가에서 처형을 당하는 것과 같이 신앙적 의로움이 죄인이 되지 않은 것이다. 죄인은 고사하고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이것은 십자가의 도가 아니다.


십자가의 도는 더 의롭기에 더 죄인이 되는 것이다. 신랑은 하나님의 의를 가진 사람이기에 하나님의 의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요구하는 것을 수용하는 죄인이 되었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렇게 자신은 원치 않지만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진 세상적인 가치관(새 조카 사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랫사람이니 그를 봐야겠다는 것)에 끌려 갔었더라면 좋았을 뻔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신부가 '남편은 교회 사람들과 축구하는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법이 절대로 없는데 이렇게 친척들이 불러서 왔노라'했었으면 어땠을까? 그것이 어떤 열매를 가져오지 못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십자가의 도를 보여준 것이긴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점에서, (이제는 교통함이 단절되어서 모를 수도 있지만) 그 신부의 친척이나 가족 중에서 그 신랑의 신앙을 보고서 그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은 없다.




이 이야기는 십자가의 도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이 가진 신앙의 의로움은 절대 손해보거나 손상 당하지 않으려 한다. 흔한ㄴ 예로 교회 가는 시간에 뭔가를 하지 않으려 하기에 교회 다니는 사람을 친구로 둔 이들은 교회에 가지 않음에도 그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수고를 하고 있는 것과 같은 것들이다. 신앙을 가졌기에 그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신앙 없는 사람들의 끊임 없는 양보와 이해를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세상의 임금으로 세우고 백부장을 십자가에 못 박고 있는 것이다. 거꾸로 된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의로움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눈에 보이는 세상이 본질인줄로 알고 살기에 세상의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보는 의롭지 않는 이들의 주장에 자신의 삶을 소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 육신의 사용법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은 육신 가진 삶을 어떻게 소비할 것인지를 말씀하는 것이다. 이 도를 가지고 산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의가 나타날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저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한 백부장의 고백을 오늘 자기 삶 속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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