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신앙 안에 있는 근심과 갈등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2. 16. 11:20 Writer : 김홍덕

성경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이라는 것이 있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하는 세상의 근심이 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분명한데, 많은 교회들이 건방지게 교회가 가고 있는 방향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 물론 그것은 무조건 틀린 말은 아니다. 교회가 교회답다면 정말로 교회의 방향이 바로 교인들에게 근심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일면 그렇게 되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하셨다고 하셨다. 성령은 우리가 예수님께 들은 것, 또 본 것이 자신의 것이 되게 하시는 분이시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되도록 하시는 분이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그리스도의 삶을 보고서 그 마음에 자신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그 생각이 그 사람의 본성과 생명이 되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바로 이때 근심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볼 때,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삶을 볼 때, 십자가의 삶을 볼 때, 그때 사람의 마음 안에 일어나는 근심과 갈등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근심인 것이다. 자신이 생각했던 삶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삶의 본질을 마주했을 때, 그때 느끼는 당황스러움과 어느 것을 선택해야하는지 갈등하고 근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근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 근심의 결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로 보이신 사람의 본질, 십자가의 삶을 통하여 발견하게 된 자기의 존재 이유를 발견하고 그것이 자신의 본성이라는 것을 미운 오리새끼가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서 깨닫고 하늘로 날아오르게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으로 잉태되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좋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고서 스스로 그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도록 하는 삶을 살아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다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는 생명이 그렇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본성을 가졌기 때문에 그렇게 살게 되고,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스스로 마음에 갈등이 일어나고 근심하게 되어 자신을 돌아보고서 자신이 본 삶이 바로 사람의 본질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어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이 가진 사이클인 것이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 또 자칭 신앙이 있다고 말하고 계시가 밝다고 하는 이들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른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한 마디로 “그렇게 살아서 되겠냐?”는 식의 말을 하는 것이 자기 본분이라 생각하고서 삶은 없이 말만 할 때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은 갈등과 근심을 하게 된다. 교회는 신앙 공동체니 당연히 신앙을 추구하는데 누군가에게 ‘너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되겠느냐?’는 말이나 암시를 받는다면 그 근심은 가벼운 것이 아니다.


더욱이 그것을 사랑이라 채색하고, 그렇게 하는 이를 영광스럽다 하고, 그렇게 남에게 싫은 말하는 것을 십자가를 지는 것(총대 메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그것인 사랑도 영광도 십자가의 삶도 아니다. 오히려 그런 모든 것을 모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신앙의 모든 것은 다 수동적인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은 그 뜻을 수용하고 나타내는 것이 자기의 일이지, 자신이 능동적으로 어떤 것을 하여서 하나님과 사람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능동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순종하여 거듭난 생명이 표현되는 것에 동의하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즉 자기 삶이 하나님의 생명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되는 것에 허락하는 능동, 그것만이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능동이라면 능동이다.


교회가 사람에게 주는 근심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근심 그것 하나뿐이어야 한다. 교회가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공동체라면. 그렇다는 것은 교회에서 사람이 근심해야 하는 것은 오직 하나, 교회에 있는 먼저 된 사람들의 삶을 볼 때 자기 마음에 그렇게 살 것인지, 아니면 다르게 살 것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그 근심과 갈등만이 교회에 있는 유일한 갈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라 세습에 관해서 갈등하고, 돈 문제로 갈등하고, 설교를 잘 하느니 못하느니 다투는 것은 다 자신들의 교회가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공동체가 아니라 그저 계모임에 불과한 조직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일 뿐이다. 설교의 경우 잘하느냐 못하느냐가 논쟁이 된다는 것은 교회가 검증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싶겠지만, 이미 목사를 뽑을 때(청빙할 때) 그 사람의 신앙을 보고 청빙한 것이 아니라 이력서를 보고 뽑은 주제에 설교의 잘하고 못하는 것을 논하는 것 자체가 자가당착인 것이다.


그러나 더 어려운 문제는 바로 앞에서 말한 그런 세속적이다 못해 세상 사람들도 하지 않는 교회의 갈등이 아니라 신앙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도 교회 안에서 신앙이 어긋난 사람은 장로와 함께 찾아가서 권면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떠나라 했고,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집에서 나와서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고 다른 곳에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는데도, 신앙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집요하게 지적하고 훈계하다 못해 예배시간에 재판하듯이 하는 것에 이른다면 그것은 정말로 심각한 것이다.


신앙이 없고, 교회의 노선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그냥 두면 된다. 심지어 그런 사람도 교회에 예배시간만은 편안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설사 자기도취에 빠진 것이라 해도. 그런 사람들을 끊임없이 뒤에서 소곤거리고 괴롭히고 심지어 신앙 없다고 욕을 해대는 것을 사랑이라 회칠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신앙도 교회도 아니다.


교회는 사람이 스스로 갈등하게 하는 곳이다. 그 갈등은 교회에 가서 보니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된 사람들의 삶을 보니 세상의 사람들과 다름을 봄으로 생기는 갈등과 근심이다. 세상의 사람들은 어떤 세계에 있어 약자를 짓밟고 올라서는 것이 법인데, 교회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어리석은 방법, 바보 같은 방법인 십자가의 도가 주관하는 곳이기에, 사람들이 약한 자, 신앙 없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죄인과 같이 섬기는 일에 자기 육신을 사용하는 그 반대의 모습을 보고서 ‘이건 무슨 세계인가?’ 싶어지게 만드는 것이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근심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근심의 결과 사람이 변하는 일이 있다는 그것이 자신도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거듭난 세계로 인도하는 곳이 바로 교회인 것이다.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피라미드와 같이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는 법으로 살고, 공동체에서 추구하는 것에 있어 오히려 약하고 무능한 자를 위하여, 그 무능하고 어두운 자가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는 감동을 주는 삶에 육신을 사용하는 삶으로 변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앙도 예외가 없다. 신앙에 있어서도 더 밝고 더 좋은 신앙을 가진 이의 삶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감동을 줄 수 있도록 살아 내는 것, 말이 아닌 삶이 감동을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수고와 삶이 교회에 있어, 이때껏 그렇게 살지 않았던 사람, 그런 삶에 어두웠던 사람이 그것을 보고 스스로 옷을 찢고(신분을 버리고) 회개하게 하는 곳, 그곳이 교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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