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가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5. 3. 20. 15:19 Writer : 김홍덕

다른 종교에도 이단 논쟁이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특히나 기독교의 경우 이단 논쟁이 많고 그 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단이 많이 생기기도 한다. 좋은 제품일수록 짝퉁과 모방제품이 많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독교의 우월성을 고려해 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그렇게 좋은 것이 좋은 것으로 자리하지 못하고 비난 받고 또 많은 이단이 생기는 것을 방지할 수 있는 압도적인 진리의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므로 한 마디로 기독교를 뿌리로 하는 이단이 많다는 것은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기독교를 뿌리로 하는 이단 종파가 많이 생기는지 교회가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을 가지고 한 번 생각해보고자 한다. 먼저 밝힐 것은 이단이라는 기준이 교리에 입각해서 이단을 규정하는 것에서 벗어난 시각으로 접근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리라는 것은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고, 또한 교리는 신앙의 결론을 문장화 한 것으로 그런 교리에 도달하기까지의 과정과 원인을 포함해야 하지만 함축된 문장으로 그것을 다 밝히기 힘들기 때문이다.



1. "스스로 깨달았다" 라고하기 시작하면 이단이 된다.



많은 기독교의 이단들의 교주들은 어떤 계시에 대하여 스스로 깨달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그 깨달음의 과정이 남다름을 내세운다. 그러한 주장들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신비한 것을 수반한 사람을 영웅으로, 그리스도로 여기는 마음을 자극하여 숭배를 받기에는 주요한 전략이기는 하지만 성경적으로 볼 때 아주 위험한 발상이고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성경의 기본 구조 중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자신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고 하는 것이 있다. 사실 이것을 빼 버리면 기독교는 존립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때 사람의 모습으로 보내셨다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쟁점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성경을 기록한 많은 사도들에게 있어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끊임없이 이야기 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물론이고 요한 사도를 비롯하면 대부분의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와 같은 사람의 모습이었다는 것을 전하는 것에 노력했다.


그렇다면 그것이 왜 중요한가? 성경의 많은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것도 왕이나 사회적으로 상위층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평범한 목수의 아들이자 우리와 같은 육신과 성정을 가진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고자 하는 대상이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사람을 만나야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사람으로 모습으로 오셔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 계시를 전하시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을 통한 것이다. 구약 성경을 보면 기적이 나타난다고 하지만 결국은 사람이 그 중심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대단한 계시를 가지고 설교를 한다 해도 그것을 사람을 통해서 전해들은 것이 아니란 자기 스스로 깨달았다고 주장한다면 그 설교의 내용이 어떠하더라도 이미 하나님의 법 밖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천로역정에서 담을 넘어 들어온 사람과 같고, 혼외자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 계시를 보이실 때 사람을 통하여 전하신 이유는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을 가장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대단한 학자도 개가 짖는 이유를 다 알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 전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시간과 방법을 동원하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존재로부터 오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어떤 계시라도 그 사람에게 그 계시가 열리는 과정에 있어 반드시 사람의 역할이 있었어야 한다. 그것이 아니라 혼자 기도하는 중에 깨달았다는 식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그것은 그 말씀이 온전해 보여도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보여준 방법이 아닌 것이다. 설사 자신에게 계시를 열어 준 사람이 그 이후에 다른 길로 가서 연관성을 찾기 어려워졌더라도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교단의 수장이 어느 날 아니면 처음부터 자신의 계시를 사람을 통하지 않고 깨달았다고 하면 그것은 아주 위험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이디오피아 내시장이 혼자 성경을 읽으며 갈 때 집사 빌립이 '네가 읽고 있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묻는 장면이 있다. 그때 이디오피아 내시장의 대답이 많은 것을 시사한다.

가르쳐 주는 이가 없는데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가 오늘날 성경을 전해 듣고 하나님의 대하여 알게 되는 것은 오직 사람이 사람에게 전한 것으로 인한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과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전한 그 복음을 듣고 깨달았고, 또 그 제자들을 만난 사람들과 그 제자들이 말과 글로 전한 복음을 통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목사나 교단의 수장이 스스로 깨달았다고 말하기 시작하면 이단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2.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을 무시하면 이단이 된다.



기독교 신앙의 근간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것도 사람 없는 산이나 골짜기에 오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 마을에 오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말씀하시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의도를 가지고 계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비단 이단이 아니라도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큰 문제점 중의 하나가 세상을 무시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짐승처럼 여기고 상종하지 못할 사람으로 무시하는 성향은 공공연한 비밀처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실존하는 현상이다. 만약에 교회가 그런 모습으로 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성경에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을 죽은 자와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죽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짐승보다 못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긴 중요한 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죽은 자와 같이 여기시는 것은 그들을 죽은 자로 고착화시키고 배척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할 대상으로 보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것을 무시하면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본적인 의를 무시하는 것이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를 두고 성경은 모든 사람이 흑암 가운데 있다고 하셨다. 즉 예수님이 오시기 이전에는 어떤 사람도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만약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다 짐승과 같은 존재로 여기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 세상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뿐인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섬기러 왔다'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죽은 자 같고 설사 벌레보다 못한 사람 같을지라도 그것을 배척하고 무시하라고 죽은 자와 같다고 하거나 벌레만도 못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섬길 대상으로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죄악뿐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 그들을 섬기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죽이는 것에 대하여 자신을 내어주면서까지 사람을 구원하려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자신이 하나님에 대하여 알기 시작했다고, 또 다른 사람보다 더 계시가 밝아졌다고 느낀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을 세상 사람들이 없는 교회라고 그들을 벌레나 짐승 같다고 말을 하고 그것에 환호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이단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법은 하나님에 대하여 더 안다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그런 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대하여 더 알기 때문에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기 앞에 더 잘난 척하고 오히려 자신을 죄인 취급하는 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결국 그런 이유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렇게까지 당하면서도 그들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 예수님이시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대하신 것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대도 그들을 위하여 헌신하고 목숨도 내어주는 그런 모습이 예수님의 모습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님의 이런 모습과 달리 세상 사람을 무시하고 배척하고 그런 모습에 환호하는 것을 보면 이단이 되기 시작한 것이라 할 수 있다.



3. 사회와 분리되려 하면 이단이 된다.



많은 이단들이 종교의 범주를 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기본 질서를 무너뜨리려하기 때문이다. 가정을 버리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현상이다. 직장을 버리고 기본적인 사회생활을 소홀이 하면서 종교적인 몰입에 빠지는 것도 그러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이 나타나는 이유는 앞에서 말한 이단이 되는 두 번째 현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는 말할 것도 없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시고 자신을 지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에서 시작하는 신앙이 능동적일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자신의 능동적 의사 결정에 의한 것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된 믿음이 능동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능동적으로 무엇을 해야 신앙이라 주장하는 것은 다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신앙이 수동적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 땅에 두실 때 조성한 환경에 대하여 순종한다는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믿음은 수동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자신을 둘러싼 가정과 사회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문화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닌 듯 벗어나려 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실 때 실수했거나 불량을 만드신 신으로 치부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알고 보면 예수님도 그 당시 유대인들의 관습과 법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예수님께서 잡혀 가실 때 제자 베드로가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사람 중 하나의 귀를 칼로 자르면서 저항하자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하늘의 군사를 불러서 저들을 물리치지 못할 것 같으냐? 하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라고 하시면서 베드로를 꾸짖고 잡혀가신 것이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습은 하나님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면서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하는 그 당시의 법에 예수님께서 순종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순종함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니 예수님의 그 행사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고 생명이 있으며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시려 하는 뜻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셨기에 예수님을 살리신 것이다.


그런데 교회 생활하는 것을 반대하는 가족과 또 여러 가지 장애 요소가 있는 직장생활과 같은 것에 있어 교회 생활에 불편을 주는 요소에 대항해서 집을 뛰쳐나오거나 직장이 요구하는 것을 자꾸 외면하는 모습은 예수님께서 당시의 법에 의하여 십자가에 끌려가신 도를 전혀 모르는 것임에도, 오히려 교회가 그런 것을 찬양하고 성도들에게 요구하기 시작한다면 이단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신앙을 방해하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정말로 신앙 자체에 도전하는 것이다. 그것은 종교의 개종을 요구하고, 신앙의 정체성 자체를 부인하며 대적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하여는 필요하면 가정을 뛰쳐나올 수 있다. 직장도 그만둘 수 있다. 그런 것은 종교를 떠나 헌법이 보장한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받아들여 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는 다른 것이다.


하지만 교회에서 귀가가 늦어지고, 또 교회로 인하여 다른 생활에 지장을 주는 것을 염려하는 가족과 주변사람들의 요구를 종교적 탄압으로 보면 안 된다. 그런 요구는 할 수 있는데 까지 응해야 한다. 그것은 종교적인 자기 신념을 상당히 손해 보는 것이다. 엄청난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 요구되는 사회적 요구로 인한 자신의 신앙적 즐거움을 조금 손해보고 또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하여 더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그것을 보는 사람이 충분히 감동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감동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다. 사회적인 요구에 목숨을 내어 주신 것이다. 그랬더니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백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이려 하는데 하늘의 힘을 빌려 그들을 무찌른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죽임을 당한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도이다. 그러므로 종교생활을 하는 것에 방해되는 보편적 사회 요구사항을 핍박으로 여기고 대항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회적으로도 용납되기 힘든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교회로 올 마음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런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 이단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4. 사람 없는 곳으로 가고 힘을 내부로 모으면 이단이 된다.



앞에서 말한 2,3번째 현상이 교회에 나타나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 있는데 교회가 사람이 없는 곳에 건물을 짓고 외진 곳으로 떠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 자신들의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을 떠나 자신들 만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려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이단이 되어가는 필연적 과정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닌가? 그렇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많이 알아가고 계시가 밝아지고 사람이 변하기 시작하면 그 결과를 어디에 투자할 것인가 할 때 그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그 에너지와 깨달은 은혜를 전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도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하여 사람들 속으로 오셨는데, 그것을 믿는 사람들이 사람들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 모이고 폐쇄되고 독립적인 공동체 삶을 꾸미려 하면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는 반대되는 형태를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 까지는 정해진 범주 안에서 자라고 또한 자라기 위하여 자신의 역량과 삶을 소비하지만, 성인이 되면 제약 없이 세상에 나가서 자신의 세계를 펼치는 것이다. 캥거루족이라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는 것은 이미 어떤 활동을 해야 함에도 부모에게 의지하기 때문이듯 신앙이라는 것도 자라고 받은 은혜가 많아지면 그것을 세상에 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즉 에너지를 교회 안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밖으로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단적 현상이 교회에 나타나기 시작하면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짐승 취급하기 시작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두신 것에 순종하지 않고 사회적 문화와 구조를 신앙의 방해 요소로 여겨 가정과 직장을 외면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은 어쩔 수 없이 그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모이면 그 안에 생기는 에너지를 결국 자기들 끼리 소비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내부에서 에너지를 소비할 건수를 찾게 되고 그러한 요구는 신앙적인 심판 형태로 나타나서 자기들의 공동체 안에서 규정한 것을 어기는 실수나 잘못을 하는 사람, 그리고 잘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심판하고 교화시키겠다고 일반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압력과 부담을 주는 형태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그 가지신 모든 힘과 목숨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셨는데, 이것을 모르면 신앙의 모든 에너지를 내부적으로 서로 소비하는 형태가 된다는 것이다. 즉 지속적인 캥거루족과 같은 삶과 내부에서는 끊임없이 인민재판과 같은 심판이 일어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은 교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나도 참 저러고 싶다'는 마음이 들 수 있게 해야 하는 것인데, 외진 곳으로 가서 폐쇄적인 공동체를 구성하면 예수님의 제자인지 아닌지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차단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폐쇄적인 공동체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세상 사람들을 구원의 대상으로, 또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종 되는 것을 버리고, 오히려 그들을 무시하는 신앙이 찬양을 받고 있으며, 가정과 직장 동료들을 신앙의 방해자로 규정하고 배척하는 상황이라면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보는 위치나 관계에 있는 누가 그것을 보고 예수 믿고 싶어지겠는가? 그것이야 말로 정말로 복음을 훼방하는 것이고 상황이 이쯤 되면 이미 이단으로 많이 고착화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5.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한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이 마지막 요소는 앞에서 말한 것과는 성경이 좀 다른 요소이다. 이것은 다소 신앙적 교리에 입각한 해석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이 다섯 번째 요소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조금 이해하기 힘들 수 있는 요소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하나님이라는 신을 섬기는 말씀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아는 것이 그 핵심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자신을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의미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하나님을 어떻게 믿고 하나님과 사람이 어떤 관계인지를 설명하는 것에 있어 사람이 무엇을 하면 반응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이 어떤 존재로서 관계를 형성하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섬긴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어떤 봉사를 하고 공로를 쌓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하는 것이나 하나님께 헌금을 많이 하면 천국에 상금이 쌓여서 죽어서 천국가면 기와집에 살 수 있다는 식으로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발견하고,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가 창조주와 피조물로, 또한 하나님의 본성이 자신을 통해서 표현되는 아들이라는 관계만 성립이 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자신의 본성이 된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는 자기가 섬기는 신에게 공로나 수고나 재물을 드리면 신이 기뻐하고 복을 준다고 하는 종교는 많다. 성경을 읽고 하나님께도 그렇게 믿는 것은 나름의 신앙일 수는 있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신앙이라고는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했을 때도 '무슨 짓을 했느냐?'라고 물으신 것이 아니라, '네가 어디에 있느냐?(네 정체성의 자리가 어디냐?)'라고 물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성공하여 많은 것을 교회에 드릴 수 있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믿는 것은 나름의 신앙일 수는 있지만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생각의 결정체가 바로 교회를 크고 아름답고 웅장하게 지으면 사람들이 모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교회를 크고 화려하게 짖고 있는 모습이다. 교회를 그렇게 지어가는 것은 세상적인 위대함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믿음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한 교회의 착각들은 당연히 사회적인 외면을 받는다. 교회의 참된 모습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전한다는 것은 서울역에서 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삶을 보고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어지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교회가 사회보다 더 좋은 건물을 짓고, 교회 안에 사회적으로 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이 다니는 것을 내세우면 부러울 수는 있겠지만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 모습은 예수님께서 종으로 세상을 섬기러 오신 모습과는 달리 세상에서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서 사람들을 유혹하여 교회로 이끌려는 것일 뿐 참된 복음의 전도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위대한 것을 교회가 보이려고 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며, 그런 사람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많다고 자랑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 오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위대한 착각이고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그건 이미 사회적으로 증명된 현상이다. 


이렇듯 세상의 성공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굳이 이단이 되는 과정이라고 하기 보다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존재의 신, 곧 어떤 관계, 어떤 생명이 되기만 하면 굳이 사람이 능동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생명의 본성이 자연스럽게 표현되듯 성경의 모든 말씀이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고 그러면 그런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다시 예수를 믿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 바로 성경의 말씀인 것이다.



이상으로 교회가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과, 교회가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를 알아 봤다. 이러한 관점은 교회의 교리를 기준으로 이단을 규정하는 방법과 같은 것을 이야기 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사실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아니면 별로 이해할 필요가 없는 그런 논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글에서 이야기 하는 이단이 되어가는 과정은 교리가 아니라 가장 성경적인 관점이고 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도 쉽게 이단을 구분할 수 있는 관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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