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대한 소망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2. 15. 16:18 Writer : 김홍덕

3,40대 20여년을 만사를 제쳐놓고 다닌 교회가 있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교회에서 하나님의 복음이 무엇인지를 바로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정한 십자가의 도는 “의인이 죄인을 위항 죄인이 되는 세계”라는 것을 바로 알려준 교회였기에 20년 가까운 세월을 세상의 최고는 아니었을지는 몰라도, 나라는 인간이 가진 최선으로 섬겼다. 그리고 이제 그 교회를 나가지 않은지 만 2년이 되었다.


과거가 되었다는 것, 이제는 다니지 않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것이든 함께 할 수 있는 이유가 이제는 없어졌다는 것일 것이다. 당연히 그 교회에서 본다면 나는 변절자일 뿐이겠지만, 반대로 내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섬겼던 곳을 떠날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법에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객관적으로 심판하긴 어렵다. 기본적으로 신앙의 문제는 객관성이 논제가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나는 이 블로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만드신 그냥 사람들이 볼 때, 내 눈에 비친 성경, 그리고 교회에 대한 이야기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를 많이 참조한다. 그리고 그 결과와 반응으로만 본다면 나의 결정, 그 교회를 떠났던 결정은 틀린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물론 그런 반응 이전에 내 안에 있는 확신하는 것이 결정적이지만.


“교회란 어떤 곳이라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아마 앞으로도 받을 것이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이전에도 그렇게 답했고, 또 그럴 것이다.

“교회는 적어도 사람이 교회에 있는 순간만큼은 평안한 곳”이라고, 그래야 교회고, 교회란 그렇게 되기 위한 곳이라고 말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왜 평안하지 않은가? 평안하지 않다는 것은 당연히 부담이 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세상적인 교회,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는 교회들은 이런 논제의 밑바닥에 있다. 돈 많고 사회적인 지위가 높은 사람일수록, 혹은 그 교회에 봉사한 공로가 클수록 장로나 장립집사가 먼저 된다면 다 그런 교회다. 그런 교회의 부담은 명약관화한 것이다. 그럴 수 없는 사람,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 교회에 수고하고 봉사하기엔 자기 먹고 사는 형편이 아직은 편치 않은 사람, 그리고 만사 제쳐놓고 그럴 용기가 아직 없는 사람에게는 부담스런 교회이기 때문이다. 다른 것 볼 것 없이, 예배시간에 돌아오는 헌금 주머니만 해도 얼마나 부담인지 모른다.


이에 더 나아가서 더 큰 부담, 사실 복음이라는 것에 더 가까이 근접한 상황에서 부담은 신앙에 관한 것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평안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 그렇게 섬긴 교회를 떠난 이유 중에 하나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 믿음의 정체성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이 없거나 부족하다는 것이 교회 안에서 부담이 된다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짚고 갈 것이 있다면, 신앙이라는 것이 부담이 되는 교회는 세상적인 교회와는 다르다. 분명히 깊이가 더 있고, 성경적이고 신앙적이라고 할 만한 교훈이 교회 안에 있는 곳이다. 그것이 없는데, 신앙이라는 것이 교회 생활의 부담이 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앙이라는 것을 알고 보면 부담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마치 ‘예외 없는 법칙은 없다.’라는 말 때문에 예외 없는 법칙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깊어지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바로 교회가 바로 가는지 아닌지의 기준이 될 수 있다면 무리한 논리가 될까? 그렇지 않다. 사람들이 신앙이 깊어지면 많은 경우 신앙에 매몰된다. 더 좋은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신앙 아닌 것을 멀리하려 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가족이든 누구든 멀리 하려 하고, 신앙에 저해가 된다면서 직장생활, 사회생활을 등한시 하게 되는 것이 바로 좋은 신앙을 가지기 위하여 매몰되는 현상이다,


필자가 20년간 다녔던 교회도 그렇게 흘러갔다. 시작은 좋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 시작 때의 모습, 그 시작 때의 말씀을 간직하고 사모하는 사람들에게 그 흐름은 매우 부담스러운 것이었다. 다 교회에 모여서 목사가 되려하고(그것도 손쉬운 방법으로), 신앙이 없다는 이유로 가족들을 하나씩 등지기 시작하고, 직장일은 교회 생활을 위한 경제적인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점점 깊어졌다.


그렇게 되면 일어나는 현상이 있다. 그 교회 교인을 보고, 그 교회의 교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에 감동해서 ‘나도 저렇게 살아야겠다!’며 교회를 찾는 사람들이 줄어든다. 그리고 ‘저런 교회는 다니고 싶지 않다.’는 말을 듣기 시작한다. 그리고 교회의 자랑은 사람이 변한 이야기가 아니라, 건물 사고, 건물 가꾸고, 누가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것을 자랑하는 세속화된 교회로 점점 변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는 결국 세상을 매개체로 삼아야 한다. 교회라는 것의 가치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생명을 얻겠다는 의도였듯, 교회도 결국은 세상에서 교회에 속할 사람을 찾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교회가 추구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교회에 그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등지고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 교회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을 짐승 취급하고, 그런 사람들에게 단호하나 것이 신앙에 결연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사람들에게 죽어 나가는 그런 모습이 될 때 온전한 교회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가 또 교인들이 사모하는 신앙이라는 것, 믿음이라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세상을 심판하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이 가진 의의 기준과 가치관 앞에서 언제나 죄인이 되어야 하는 곳이다. 그것은 때로 세상의 법으로 인하여 교회가 파괴되는 것과 같은 일들 앞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지키기 위하여 교회를 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이 바로 믿음의 선진들이 그런 신앙을 지켰기 때문이기도 하다.


복음이라는 것,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죄인이고 죽어야 하는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예수님을 믿는 신앙, 그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고, 그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세상과 등지고, 세상을 멸시하고, 심판하는 것은 십자가의 도를 버리는 것이다.


교회에서는 또 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은 세상이 자신들을 욕하고 비난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은 내용의 문제다.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는 단 하나의 이유는 예수님이 받은 비난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곳에서 내려 와 보라!”라는 그것이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볼 때 ‘그렇게 하면 바보 같아지고, 망하는 데 왜 그런 방법을 선택하느냐?’하는 비난과 조롱이다. 그것 외에는 교회가 세상에서 비난을 받거나 조롱을 받아서는 안 된다.


십자가의 도가 뭔가? 바보 같은 짓 아닌가?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몰라보는 이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며 죽이려는 것을 순종한 것이 아닌가? 교회가 그 도를 따른다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전혀 하지 않을 바보 같은 짓, 즉 자신이 의인이면서 죄인이 되어 죽어 가는 삶을 살기에 조롱을 받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가 세상을 자극하고, 도전하고, 심판하고, 멸시하며 등지기에 받는 비난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신앙이 없다고 세상을 멸시하는 것, ‘우리는 신앙이 있으니 이래도 된다.’는 식의 행태로 인하여 받는 비난을 십자가의 고난이라고 하는 것은 아주 처참한 판단이다. 그것이야 말로 제대로 하나님을 모욕하고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이다. 그리고 교회가 그렇게 된다는 것은 아주 슬픈 일이다.


이 블로그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는 교회가 생기면 좋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경이 오늘 나의 이야기로 인정되는 사람이라면 신앙이 없어도 또 신학을 하지 않아도 또 헌금하지 않아도 또 건물이나 공간적인 동일함이 다소 결여되었더라도 자기가 속한 삶에 순종하고, 자기가 속한 세상이 자신에게 주장하는 것에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는 삶을 살아서 그것을 보는 이들이, 또 그렇게 나타낸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가 다른 사람의 심령에 성경의 감동과 잉태함을 낳을 수 있는 사람들이 모이기를 바라며 오늘도 이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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