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들의 이단 논쟁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9. 13. 10:51 Writer : 김홍덕

지진으로 나라가 떠들썩한 날 기독교의 한 교단 통합 측에도 자기들 안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이전에 이단으로 규정한 몇 개의 계파를 “사면”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자 비판의 목소리들이 들끓고 있다. 여론이 어떻던 상관하지 않는 지도자들의 나라라서 그런지 여기도 뭐 딱히 예외는 아니다.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면 가능한대로 비판보다는 대안이 훌륭한 것이지만, 그 훌륭함에 미치지 못함을 무릎 쓰고 이 일에 대해서는 입 한 번 대고 싶다. 도무지 뭐가 이단인지, 누가 이단인지, 그리고 이렇듯 이단 논쟁을 하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신앙을 설계하는 사람들


이 사건을 페이스북에서 대하고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사람이 신앙을 설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에 의해서 어떤 것은 바른 신앙이 되고 어떤 것은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빙자하여 기독교라는 신앙을 설계하고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심으로 삶을 변화케 하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앙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근간인데, 사람들 마음의 동의는 고사하고 이론적, 상황적 동의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마저 느끼게 하는 결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작자들이라고 하고 싶다)의 정체를 보자. 그들은 대부분 목사나 신학자 그리고 장로들일 것이다. 총회인지 노회인지 뭔가가 그런 부류들의 계모임이니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교회 타락의 상징, 목사


먼저 목사와 신학자,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신앙이 학문이 되었다는 것에서 이미 교회 타락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 학문이 장벽을 가지고 있다. 바울 사도와 여러 사도들이 그렇게 사람의 어떠함이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면 안 된다고 했건만, 신학을 공부하는 공로가 있고, 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가르치는 교회에서 얼마나 역량을 보였는가를 기준으로 업적을 쌓아야만 설교 등 배타적인 권리를 가지게 되는 지극히 세상적인 법과 가치관으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신앙과 세상의 가치관이 간음하여 낳은 자식들이 바로 목사라는 신분이다. 고멜이 낳은 로루하마(호세아가 고멜에게서 낳은 딸)와 같은 신분이라는 것이다.


목사라는 신분은 지극히 세상적인 가치관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자리다. 신앙과 세상적인 가치관과 법이 혼음한 자식이다. 육신으로 하는 것에 대한 공로와 경력의 우월성으로 경쟁하는 것, 행위와 소유(지식과 경험)가 얼마나 더 많은가가 경쟁력인 신분이다. 다만 그 종목이 성경이니까 신앙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우기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계실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지금의 목사들보다 훨씬 경건했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껍데기만 하나님을 믿는 회 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는데, 지금의 목사들을 보고는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는 부류가 목사다.




이단을 논하기 전에 자기 정체성부터 돌아봐야


그런 그들이 이단을 규정했다 풀었다 하고 있다. 정하는 것도 용서하기 힘든데, 다시 풀고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의 열쇠가 목사나 장로 또 신학을 했다는 신분과 함께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목사나 그런 신분은 그 자체가 이미 교회 타락의 상징적인 자리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다고 하심이 이를 두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어떤 논리와 기준으로 이단을 삼고, 또 사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적들이 아무리 서로에게 충성하고 그 안에서 법을 잘 지킨다고 그 논리가 정당화되지 않듯, 논리나 교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논할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도적질한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경쟁해서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위법이고 그것이 이단의 근본이다. 자신이 이미 신앙과 세상이 결탁한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믿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이 설사 맞는 소리를 해도 다 틀린 것이다. 해적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안에 기강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 투항하는 것이듯, 목사나 신학자들은 무엇이 이단이고 또 어떤 것은 사면한다고 논의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인지 부터 돌아봐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이 이단의 뿌리


이단은 달리 이단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에 세상의 가치관을 결합하면 이단이다. 그것이 타락이고 죄다. 선지자들에게 책망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세상의 가치관을 결탁했다. 하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이기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성전에 이방 신상을 두지 않았을 때도 하나님은 제사조차 싫어 하셨다. 매일 와서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육신의 삶에 관한 것을 구하니 그랬던 것이다.


지금도 교회를 보라. 모든 교회가 하나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외치고 있다. 세상의 가치, 애굽의 가치관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법에 져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 십자가의 도를 믿는다는 교회가, 또 그것을 공부했다는 신학과 그 패륜적 지위인 목사는 오히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이단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그들이 이단을 논하고 있다. 이단을 정하기도 하고 사면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간음의 자식이라는 것도 모른 체, 오히려 사람이 신앙을 설계하고 결정하고 조작하고 있다는 것만 드러낸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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