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주의 vs. 영지주의 (2)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5. 11:55 Writer : 김홍덕

영지주의적인 신앙



영지주의는 왠지 옛날이야기 같아 보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모습을 직접 본 사람들이 있던 그 시절의 이야기 같아 보인다. 그래서 지금은 없는 이야기 같다. 하지만 지금도 이런 사상은 넘쳐 난다. 아니 영지주의 신앙이 넘쳐난다고 해야 맞을 것 같다. 신앙에 있어 현대적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신앙 없는 이들을 무시하는 것이다. 이런 신앙의 모습이 사회에서 외면을 받게도 하고, 심화되면 신앙을 사수한다는 이유로 자기들만 모여서 공동체라며 이단이 되기도 한다.


신앙에 있어서 지금 이 글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과 형식>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 중에 어쩌면 사회와 육신의 삶을 외면하는 것, 돌보지 않는 것, 심지어 적대시 하는 것, 그것이 신앙에 있어 가장 흉측한 모습일 수 있다. 이것은 신앙만으로 산다면서 사회생활을 단절하다 시피 하는 것을 말한다. 


우선은 그런 문제적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말하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육신의 행위에 있다. 육신이 행동으로 범죄 하지 않는 것을 신앙의 아주 중요한 요소로 인식하고 있고, 세상은 죄악이 관영하므로 그것과 연관되면 자신이 죄를 지을까봐 멀리하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앞에서 누누이 말한 것과 같이 신앙이나 믿음이 아니라 신념이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세상을 멀리하려 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신앙의 본질을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임을 모르고, 단지 육신의 행동이 죄를 짓지 않는 것에 매몰되어 있다 보니 세상에서 살아가는 자신의 육신을 그것에서 멀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을 멀리하는 신앙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연히 세상을 멀리하는 것은 온전한 신앙이 아닌 것이다.


문제는 그렇게 육신의 행동이 죄를 짓지 않도록 육신을 훈련하고 단련하고 금욕적인 삶을 살려고 마음을 먹게 되면 율법적인 신앙이 되고, 반대로 세상은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단절하면 할수록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여기면 영지주의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하면, 교회에 나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부모님 혹은 가족을 대하는 것에서 구분 지을 수 있다. 율법적인 신앙은 자기 마음에는 화가 나지만 자신을 다스리면서 부모님이나 가족에게 공손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라면, 영지주의적인 신앙은 가족이나 부모를 떠나 버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자기들끼리 모여서 그런 결정을 칭송하고 좋은 신앙이라 하고 영광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하면 당연히 <그 의가 어디에 나타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육신이고, 우리 육신이 사는 세상이다. 그런데 이 육신이 사는 세상을 부인하면 어디에서 누가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을 볼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좋은 신앙을 가지는 것,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 좋은 신앙을 어디에 쓸 것인가? 그냥 좋은 신앙을 가지는 그 자체가 신앙의 전부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의 전부라면, 뭐한다고 십자가에 못 박히면서 사람의 정체성을 보이였겠는가? 그냥 누가 봐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능력만 보이시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음 세대에 오셔서 보이시고 요즘 같이 미디어가 발달된 세상에서는 인터넷으로 예수님의 능력을 생중계하면 될 것이지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인생이 어떤 모습이고, 어떤 정체성을 가져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지를 보이신 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들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자신들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자기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셨다. 즉 세상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도구와 형식이고, 그것을 나타내심은 다시 육신을 가진 이가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삶으로 표현해 내는 존재가 되는 것을 목적으로 오신 것이다.


즉 육신을 가진 인생,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지 못하는 죄인들, 육신이 하는 모든 것이 죄인인 이들, 그들에게 하나님의 의가 전해져서 그 안에서 생명이 되어 하나님의 의가 다시 그런 인생들에게서 삶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인 것이다. 그런데 육신을 가진 이들을 외면하고, 세상을 외면하면 어디에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낼 것인가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리고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의를 그려낼 도화지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서, 또한 죄인들과 함께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의만을 가지고 숨듯이 모여서 살며 세상을 등지고, 육신의 부모와 직장생활 같은 것을 죄인들의 소행이라고 규정하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한다면 화가가 도화지에 그림 그리는 것을 죄라 여기는 꼴인데, 도무지 그 좋은 신앙의 근본은 무엇이며,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이렇듯 예전 영지주의자들이 영혼만 중요하게 여기고 육신은 무조건 버릴 것으로 여긴 영지주의, 예수님께서는 육신을 가지지 않으셨다고 생각하고 싶었던 그런 신앙과, 앞에서 이야기한 세상과 세상에 있는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까지 외면하는 것을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는 것은 같은 것이다. 바로 그런 신앙이 영지주의적인 신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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