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과 행함 (10)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내용과 형식 Date : 2015. 10. 2. 13:53 Writer : 김홍덕

약속과 증거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시면서 가장 먼저 이렇게 이야기 하셨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1-3)


믿음이라는 것은 신앙의 기본이다. 무엇을 신앙한다는 것은 어떤 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믿음은 신념과는 다른 것이다. 이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고, 수용적인 것이며, 순종적인 것이다. 이미 있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없는 것, 가지지 않은 것을 이루어 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이루어졌으면 하는 것의 본질이 그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든 것은 결국 자기 정체성이다. 자신의 정체성의 의미를 어디에서 찾느냐에 따라 원하는 것이 달라지는 것이다. 올림픽 금메달에서 자기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이는 운동을 하고, 돈에서 삶의 의미 곧 자신의 정체성의 의미를 찾는 이는 돈을 벌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지 않기도 한다. 메달에 삶의 의미를 둔다는 것이 바로 자기 정체성을 그것에 둔다는 것이다. 하여튼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사람은 어떤 것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바라는 궁극적인 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의미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사랑을 할 때, 사랑하는 상대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이 어쩌면 “네가 나의 존재 이유”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랑이라는 것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도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와 의미를 알게 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사람이 바라는 최고는 역시 자기의 존재의 의미와 이유이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구하는 모든 세상의 것 역시 결국은 그것이다. 돈을 구하면 돈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겠다는 것이고, 취업을 원하면 일하는 자아가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다. 반대로 서로에게 의미가 없어지면 이별하고, 직장에서 자기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면 사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바라는 모든 것의 실상은 자아 정체성이다. 그렇다는 것은 모든 사람의 바라는 것은 결국 자아 정체성의 실현이라는 것이고, 그것의 실상은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성경의 골격을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이 말씀은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 바란다는 말씀인데, 그것은 모든 피조물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을 고대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피조물인 사람 역시 바라는 바 믿음의 실상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와 히브리서 기자의 말씀을 같이 보면 결국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내용이 형식으로 표현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사람의 삶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 바라는 것이요, 믿음의 실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 대하여 히브리서에서는 믿음의 조상들이 증거를 받았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믿음의 선진들이 받은 증거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즉 증거는 믿음이 나타난 것, 곧 믿음이 표현된 형식이라는 것이다.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는 증거를 얻었는데 그것이 바로 믿음에서 비롯된, 믿음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벨 뿐 아니라, 에녹과 노아, 아브라함 등이 보여준 믿음의 삶들이 믿음이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 모든 선진들의 증거는 믿음이 있었기에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믿음의 조상들은 증거는 받았는데 약속은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게 선진들에게 나타난 믿음의 증거의 실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들이 받은 증거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즉 믿음의 실체이고, 증거의 본질인 약속이라는 것이다. 증거는 약속의 증빙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든 믿음의 증거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실상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 믿음의 선진들은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는 <우리>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이가 나오지 않으면 온전함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받은 증거가 온전한 약속의 이행으로 마감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모든 믿음의 증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나올 때 약속이 이행되는 온전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모든 믿음의 증거들이 약속의 이행으로 온전케 되는 본질이라는 것이다.


이 본질에 대하여 히브리서 기자는 담대하게 <우리>라고 하고, 그 <우리>가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보여준 믿음의 증거들을 온전케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히브리서 기자와 함께 하는 교회의 지체들이 믿음의 본질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것이고, 또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들과 같이 선진들이 받은 믿음의 증거를 온전케 하는 약속인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삶의 본질이요 내용이요 생명이 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성경 말씀을 지키며 산다는 것은 성경을 읽고 그것을 수칙처럼 지킨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증거는 있지만 온전케 하는 약속이 아직 없는 것이다. 말씀대로 산다는 것, 성경을 지키면서 산다는 것은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이 자기 안에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믿음은 순종적인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행함인 제사보다 순종이 나은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 믿음은 능동적으로 신념을 실현해가는 것 역시 아닌 것이다. 믿음은 또한 행함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 온전한 하나님의 말씀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말씀이 육신이 되고, 그 생명이 모든 행함을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나타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살면 굳이 따지지 않아도 모든 행동이 성경을 지키는 삶이 되는 것이다. 생수의 강이 속에서 계속 넘쳐날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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