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 - 영지주의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질그릇의 선택 Date : 2020. 8. 24. 04:00 Writer : 김홍덕

복음적 관점에서 보면 율법주의는 전통적인 이단이고 영지주의는 예수님이 오신 다음에 새롭게 자리한 이단이다. 영지주의는 신약성경 후반부를 기록한 사도들, 요한과 유다 그리고 야고보와 같은 사도들이 많이 언급했다. 이는 다소간 사도들의 사역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바울 사도는 상대적으로 영지주의보다는 이방인의 신앙과 철학 곧세상의 가치가 복음과 간음(혼합)하는 것과 율법적 신앙에 대하여 많이 경계한 반면, 이스라엘 내의 교회와 유대인을 대상으로 복음을 전하는 비중이 높았던 사도들은 영지주의를 많이 경계했다.


영지주의는 쉽게 말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에 있어 육신과 영혼을 따로 생각하는 것이다. 어차피 육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으니 구원과 무관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영지주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이 아니라 잠깐 기절하신 것이라고 하거나,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고통을 느끼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더 나아가서 육신의 행위는 하나님 심판과 무관하니 방탕하든 상관없이 자유롭게 지내도 된다고 주장도 했다는 것에서 육신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과 무관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주목할 것은 영지주의는 사도시대, 초대교회 시대에만 반짝한 시대적 신앙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신앙인이 자신들은 예수님과 다르기 때문에 예수님과 같이 될 수 없고 단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라 예수님처럼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 거룩한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영지주의와 본질이 같다. 예수님의 육신과 자신의 육신이 다르다고 판단하는 것도 영지주의고,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육신의 행위에 찔려 죄 없다고 말하지 못하는 생각도 영지주의다. 그러므로 영지주의는 역사 속 한 시대의 신앙이 아니라 오늘도 현존하는 신앙이다. 오히려 사도들의 때보다 더 무서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자칭 정통이라는 신앙에 영지주의가 혼합되어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영지주의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육신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견해를 가진 관점이다. 하나님과 다르게 육신을 보는 두 번째 관점의 한 모습이다. 육신은 부끄러운 것이니 감추어야 하며, 육신 그대로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은 두려운 것이 라는 판단에서 출발한 것은 분명히 두 번째 관점이다. 육신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하는 영지주의는 육신을 부끄러워하는 두번째 관점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육신에 대한 관점이 같다면 하나님께서 만족하신 육신을 터부시할 이유가 없다.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는 육신을 하나님과 다르게 보는 같은 뿌리에서 나온 신앙


그러므로 영지주의도 육신을 부정하게 본다는 것에서 율법 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즉 율법주의나 영지주의 모두 육신을 부정하게 보는 두 번째 관점에서 비롯된 신앙이고 믿음이다. 육신을 부정하게 보기에 그것을 만회하려고 성경을 지키려는 것이나, 육신은 어떻게 해도 항상 부정하니 이것은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고 단정하는 것 모두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육신을 하나님과 다르게 보고 하나님이 만족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은 같다. 둘 다 같은 뿌리가 같고, 둘 다 선악과로 인하여 비롯된 것이다.


다만 율법적 신앙이나 영지주의는 뿌리와 본질은 같지만 해결하는 방향이 다를 뿐이다. 영지주의가 가진 특징은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의 신앙이라는 점이다. 예수님은 옥합을 깨뜨리듯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육신 안에 있는 하나님 아들 그리스도의 본성을 보이셨다. 그렇게 육신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상 이라는 것을 보이셨는데,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 사람들이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을 수 있을지를 비교하고, 자신이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를 살리고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는지 생각해 보니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예수님과 자신의 육신을 다른 것으로 규정해 버린다. 예수님의 행위와 자신의 행위를 비교하므로 예수님과 자신은 다른 육신이라고 생각한다.


영지주의는 없어진 신앙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기독교의 신앙 근간이 되어 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거듭났다고 말하 면서 예수님과 같을 수는 없다고 말하는 것이 증거다. 예수님과 육신이 같고, 내재하는 그리스도라는 본성이 같으면 예수님과 다를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우리가 예수님보다 큰일도 할수 있을 것이라고도 하셨는데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예수님 같이 온전해질 수 없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사람은 온전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영지주의의 본질이다.


사람들이 예수님과 자신이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화를 내고 성욕이 일고 욕심에 매인 자신의 모습 때문이다. 그 모습을 보니 부끄러워 도저히 예수님과 같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 겸손한 것 같지만, 사람의 육신을 그렇게 본다면 그 육신을 만드신 하나님은 실패자가 된다. 물건으로 치면 불량을 생산한 것이다. 온전하신 하나님이 아니고, 실수하지 않는 하나님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 하나님은 온전하게 사람을 만드셨 는데 그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고 모욕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은 예수님과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완전한 영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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