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자신의 본능을 제어할 힘이 없다. 그렇다고 본능만을 좇아서 살면 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본능을 억제하지 않고 발산하면서 사는 것이 죄 없이 사는 것이라고 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안에 자신도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있다. 가장 큰 한계는 육신이 자신의 생각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하늘을 날 수도 없고, 바다 속에서 살 수도 없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어쩔 수 없는 본능도 있고, 또한 한계도 있는 것이 인간의 정체성인데, 그런 인간의 한계와 본능을 죄로 여기는 마음이 다 있다는 것이다. 요한 사도를 비롯한 성경의 모든 기록들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한계와 본능을 죄로 여기는 마음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그 죄를 없애기 위하여 육신을 제어하는 것이다. 그런 마음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려 한다. 마음 안에 있는 인간이 자진 본성과 한계가 엄연히 존재하지만 행동을 단속하여 그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미워하는 마음이 살인이고, 음욕을 품은 마음이 간음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마음의 뿌리가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과 한계를 죄로 여기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켜서 선에 이르려고 하는 사람은 사람이 가진 한계와 본성을 죄로 여기는 마음은 사람 마음 안에 미워하고 죽이고 싶은 마음이나 음욕이 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죄로 여기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 그런 마음이 없는 사람이 되려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 안에서 미워하는 것과 음욕을 품은 것을 죄로 여기는 마음이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았다고 의인인 척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큰 죄는 사람이 가진 한계와 본성을 죄로 여기는 그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원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이 가진 한계와 본성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대로 발산하며 사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 성경은 그것을 영지주의라고 경계를 하는 것이다. 특별히 요한 사도는 이 요한 일서에서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우선 보기에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본성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이 또한 그것을 죄로 여기는 것은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든 것은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은 외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지주의는 얼핏 보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능을 억제할 필요가 없다고 하니 한계와 본능을 가진 인간을 죄인 취급하지 않는 것 같지만, 오히려 극복하려 했지만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서 '어차피 안 되는 것 감추지 말자'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영지주의 역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본성을 죄로 여기는 것은 율법주의와 다른 것이 없는 것이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사람은 자신들이 죄로 여기는 사람의 한계와 본성을 행동으로 감추려는 사람이고, 영지주의는 포기한 사람이라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주의자들을 보고 <회 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다. 겉을 화려하게 하여 죽은 심령을 감추려 했다는 것이다. 반대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했다. 자신들이 죄로 여기는 사람의 한계와 본성을 예수님도 동일하게 가졌다고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들은 모두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성과 한계를 죄로 여기는 것에서 시작된 것이다. 요한 사도가 하나님 앞에서 시인해야 한다고 한 죄가 바로 이 죄다. 이 죄가 율법주의와 영지주의를 만드는 뿌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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