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자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요 17:1-2)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영광(화)스럽게 되시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실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께 받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는데 그 목적이 하나님께서 아들에게 주신 자들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는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간단하게 요약을 한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준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준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왜 그럴까? 영생이라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얼마 정도의 사람이 알고 있을까?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사람에게 유익이라 생각하는데, 이 말씀은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곧 하나님의 유익에 관한 일이라는 말씀이 아닌가?


신앙의 여러 가지 문제는 사실 아주 간단한 것이 외곡 되면서 시작된다. 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묻는 여러 가지 질문들, ‘술을 마셔도 되는가?’와 같은 초보적인 것에서부터, 성선설, 성악설이나 ‘성경의 하루는 어떤 시간인가?’나 ‘구원 받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는가?’, ‘천국에서는 어떤 일이 있느냐?’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의문들은 단 하나 하나님과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몰라서 발생하는 의문들이다. 모든 원인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아주 단순하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형상도 없으신 영이신 절대자 신이시고, 사람은 그 하나님께서 실존하심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신 형상이 있는 존재다. 형상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의 나타나심과 표현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 사람이고 세상이라는 것,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이고, 하나님과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유일한 이해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성경은 수천 번을 읽어도 알 수 없는 책이다. 반면에 이 하나를 안다면 성경을 읽지 않아도 하나님의 모든 의가 자기 안에 있기에 성경을 때로 읽을 때 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로 읽히고 들리니 언제나 꿀 송이처럼 달고 오묘하고 신비하며 즐거운 말씀이 되는 것이다.


영광이란? 독사(δόξα)라는 말이다. 이는 ‘나타나다’, ‘간주되다’ ‘~처럼 보이다’라는 의미를 가진  ‘도케오’(δοκέω)라는 말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한다. 즉 영광은 눈에 보이지 않던 것이 나타나서 그 보이지 않는 것과 같이 여겨지는 것이라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존재가 하나님과 같이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그것을 보는 이가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미지를 알 수 있도록 나타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딘가 익숙한 말씀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하신 말씀이 기록된 창세기의 말씀과 흡사하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고> 하신 말씀 그것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And God said, Let us make man in our image, after our Likeness:)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모든 새와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창 1:26)


이 말씀을 잘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하여 하나님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도록 하자는 말씀인 것을 알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사람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있도록 하시겠다는 뜻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의요 영이시기에 모양이 없지만 그 의와 뜻이 육신을 가진 사람으로 통해서 표현되도록 하시겠다는 것이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유일한 뜻이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존재도 사실 이와 같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동은 사람 안에 있는 생각과 마음이 표현된 것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 있어 사람을 찾아가고, 위하는 마음이 있어 수고하여 감동하게 하는 것이다. 보고 싶은 마음이나 위하는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그 마음을 행동으로 나타낼 때 상대가 그 사람 안에 자신을 보고 싶어 하는 마음과 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즉 그 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미지가 형상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단 하나 이것이다. 이것이 온전하지 못해서 모든 죄와 곤고함의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본질인데 육신의 눈으로 보이는 것,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이 자기 삶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고 살기에 모든 것이 캄캄하고 어떻게 또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는 어두움에서 방황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단 하나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와 그 관계는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를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순종하느냐는 문제 그 하나만 해결되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즉 세상과 만물과 만민을 다스리게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영생은 너무나 쉬운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 17:3)이라고 하심이 아주 쉽게 이해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를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이 자기 존재의 목적으로 아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렇게 하나된 하나님은 영원하시기에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므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또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 역시 같은 의미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고 하면 하나님과 동일한 개체가 되는 것이나, 동일한 능력을 행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콜라가 콜라병과 하나가 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기에 그 내용이자 본질인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어서 그 의가 사람의 육신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표현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 안에 사람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이 계시는 삶과 상태와 존재의 정체성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사람을 말한다. 이는 아들을 보면 아버지를 알 수 있듯, 그 사람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고, 거듭남이며, 영생이다.


이것을 보이신 곳이 바로 십자가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니 사람들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고백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왕이 되고, 신비한 능력으로 육신이 가진 가난과 병드는 것과 정치적인 문제와 또 결혼이나 재정적인 문제를 해결하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형수가 되어 죄인으로서 죄인의 틀인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시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을 했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미지)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이루어진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와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부르짖는다. 그래서 교회에 가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과 자신의 교회가 세상에서 돋보이는 자리에 이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그것을 위하여 고민하고 고민하다 세상적인 방법과 학문을 도입하여 도모한다. 정작 예수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날마다 예수님을 죄인 만드는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또한 세상의 방식대로 세상에서 더 좋은 재력과 권력과 신분에 이르러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온 땅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을 이루라고 하신 뜻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준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수고하는 사람은 구원도 영생도 없다.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준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예수님께 예수님과 다른 정체성을 가진 것을 주실 리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세상의 방법으로 더 높은 자리에 올라서 세상을 성경으로 다스리겠다고 생각하는 그 가치관에 의하여 죄인이 되신 분이다. 죄인이 되실 뿐 아니라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분이신데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을 하나님께서 예수님께 주실 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당연히 영생도 구원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멸망의 자신들인 것이다.(요 17:12)


그러므로 영생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 곧 하나님을 나타내는 삶을 사는 존재가 되는 것, 그것이 영생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과 영생은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비밀이 자기 안에 없다면 단언컨대 영생도 구원도 없는 것이며, 하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도 모르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도 열리지 않은 창세기 이전의 혼돈 중에 있는 인생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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