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2:28-32) 구원은 남은 자들의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욥기 Date : 2020. 7. 17. 12:09 Writer : 김홍덕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에서 ‘누구든지’는 ‘아무나’가 아니라 엄격한 자격이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앞선 글에서 설명하였다.


그 자격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육신의 정욕을 좇아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하나님께 구하는 신앙이 자신에게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의 회복과 성령의 임하심을 경험하고,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그 날까지 자기 삶의 해와 달과 같았던 자신의 의로움과 가치가 지배하는 자아의 세상이 망한 사람이 자격자라는 말씀이 요엘서의 말씀이다.


그리고 이를 확증이라도 하듯이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욜 2:32 하)”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예루살렘에 피하는 자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을 자는 <남은 자> 중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는 ‘아무나’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확인시키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는 단지 세례문답이나 교회의 예식에 참석했다는 것 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치고 믿고 있다. 더욱이 그것이 성경을 학문화 한 신학을 육신의 노력으로 공부한 사람들에게서 나온 교리에 기인한 것이라는 것은 더 기가 막히는 일이다.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나 알도록 주신 성경을 학문으로 성역화하고, 그 학문을 이수한 사람들이 종교 안에서 육신으로 이룬 업적으로 설교하는 권리를 얻어서 떠드는 말에 행위나 업적을 의로 여기시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과 영생을 의탁하는 도박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구원은 결코 쉽거나 단순하지 않다. 어쩌면 너무 쉽고 상식적으로도 접근할 수 있는 것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어렵다. 그것은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면 너무 쉬운 것인데 사람들에게 구원이 쉽지 않고 어려운 것은 그 단순한 순종을 등지고 있어서다.


하나님 의에 온전히 순종하기로 하면 쉬운 것임에는 분명하지만 사람이 자기의 의를 좇아 살다가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기 위해서 겪는 과정은 절대 단순하지 않다.


물론 그 과정은 사람에 따라 다르고, 성품이나 겪은 세월에 따라 다르겠지만 삶의 여정이 순탄하거나 아니면 험난하거나 자기의 세상이 종말을 맞이하지 않고 구원을 얻을 수는 없다. 그런 과정을 지나지 않았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아무리 가르치고 믿어도 그것은 착각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우습게 만드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기 전에도 바라는 것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이었는데 교회에 다니면서 동일한 것을 바라면서 단지 그 성공과 평안을 하나님이 주시면 다르고, 성공과 평안의 세월을 하나님을 위해서 쓰겠다고 다짐한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거듭났다면 이전과 다른 생명과 가치를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교회에 다니기 전, 하나님을 믿기 전이나 믿고 난 다음이나 귀한 것은 동일한 가치를 지닌 생명을 거듭났다고, 구원 받았다고 말하는 것은 속이는 것이다.


세상이 크고 비싼 자재로 지은 건물을 좋은 건물이라고 하듯이 교회를 크고 비싼 자재로 건축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 말하는 것은 전혀 가치가 변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을 믿기 전에도 시험에 합격하고, 좋은 직장, 좋은 배우자를 얻는 것을 복 받은 일이라 생각했는데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라고 생각하는 생각 어디에 거듭난 변화가 있는가? 그런 것은 거듭난 것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성경 이전에 상식적 논리로도 말이 안 되는데, 그것을 성경을 채색하여 말한다고 상식 넘어 신앙이 된다고 가르치고 믿으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기만인가? 


더욱이 그런 기만적 신앙은 단순하게 구원을 얻지 못했는데 얻었다고 착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님을 지극히 모독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은혜와 복과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는데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복과 영광으로 여긴다고 하나님도 그것을 복과 영광으로 여기고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도 세상과 동일한,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과 동일한 가치관을 가진 신으로 치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하나님도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세상에서의 성공과 평안을 영광과 복으로 여기신다면 왜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말구유에 나고, 세상 가장 천하고 저주 받은 사형수로 십자가에 못박히게 두셨을까?


이 하나만 양심적이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하나님이 사람들과 동일한가치관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생각할 수 없는데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은 내려놓지 않고 거저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님을 믿으니 자신들도 믿고 있으니 그것이 진정한 재앙인 것이다.


구원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수에 의지하여 믿고 있는 대중적 신앙이 자기 영혼의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하나님께, 교회에 가서 세상이 귀하다고 여기는 것을 하나님 이름으로 구하고, 주시면 하나님을 위해 쓰겠다고 부도 수표 발행하는 신앙이 구원 받은 신앙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행할 사람, 하나님을 위한 능동적인 사람이 필요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에 순종하는 사람, 수동적인 사람이 필요한 분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피조물에서 파생된 가치를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금과 은, 그리고 피조물인 사람에게서 나온 사상적, 철학적, 도덕적 가치를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그 가치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규정한 신앙이 구원 받은 신앙이 될 수는 없다. 이것은 신학도 뭐도 아닌 그저 피조물인 사람이면 아는 상식적 논리다.


구원은 남은 자들의 것이다.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의로 여기고, 가치로 여기고, 신앙으로 여기나 하나님의 정체성에 반하고,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맞지 않고 사람들의 상식에도 위배되는 신앙이라는 재앙에서 남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메뚜기 떼의 재앙에서 남은 자는 대중적인 가치와 신앙이 하나님 앞에 자기 영혼의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들 중에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 대중적 신앙이 망한 신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믿음의 여정을 출발한 사람들 중에서 남은 자들에게 있다는 말씀이 이 요엘서의 말씀이다.


남은 자들은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적 신앙이 자신에게 재앙이라는 것을 인정하므로 매우 어둡고 캄캄한 날을 맞이했던 사람이고, 그 어둡고 캄캄했던 날이 여호와의 날임을 체휼한 사람이며, 그 여호와의 날을 인하여 자신의 가치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기준으로 회복된 사람이며, 그 회복을 인하여 임하신 하나님의 영이 일으킨 이적을 보고 그날까지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가치와 의와 선과 악의 기준과 같은 해와 달이 모두 어두워져 그날까지 자기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길고 긴 여정을 지난 사람이다.


구원은 그 여정을 지나기까지 남은 자들에게 주시는 회복이자 은혜와 생명이다. 그런 여정이 자기 삶에 없다? 그럼 당연히 구원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함부로 자신을 구원 받았다 여길 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