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2:28-32)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16. 11:5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공생애 마지막 즈음에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은 예수님을 선지자, 죽은 세례 요한,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가 아닌가 말한다고 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다시 물으셨다. 

그리고 그 대답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우리는 이 대화에서 이름을 부른다는 것의 깊은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한 번 본적도 없고 인간적인 관계가 전혀 생성되어 있지 않지만 한쪽 상대가 정치인, 연예인, 스포츠 선수와 같이 유명인이라서 누구라도 그 이름을 부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유대인들에게 죽은 세례 요한이나, 오래 전 하늘로 올라간 엘리야는 이런 유명인과 같은 존재들이다. 


이와 같이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이 보지 못하고, 자신을 불러 주지도 않고, 자신과 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기도 한다. 이것도 이름을 부르는 하나의 경우다. 


그러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상호간에 관계가 형성된 관계 안에서 서로를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고 인정하고 용납하는 관계다. 


때로 각색된 영화와 같은 곳에서 관계가 틀어진 사람들 대화 속에서 서로를 부르는 것에 대하여 화를 내는 장면도 바로 관계와 이름을 부르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영화와 같은 곳에서 그런 것을 각색하고 관객이 공감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이름을 부르는 것을 그렇게 본능적으로 인지하고 있고, 그런 인식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면 메뚜기 떼와 같이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형성된 상태에서 부르는 것인지 생각해 보자. 여기서 온전한 관계라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하나님의 정체성과 의와 뜻에 맞게 부르는 관계를 말한다. 하나님을 부를 때 자신이 원하는 것과 하나님의 성품과 의와 정체성이 일치해야 온전한 관계인 상태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온전한 관계고 온전한 부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 예수님의 이름을 부를 때 그런 관계성을 고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부르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서로를 부를 관계가 형성되어 있어야 하는 것인데, 사람들은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을 부른다. 늘 강조하는 바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베푸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그 하나님을 부른다.


만약에 하나님이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들의 생각과 같이 육신과 세상의 일과 그 일에 대한 가치를 기준으로 복과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이라면 그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것이고, 그런 하나님을 믿으면 그것이 우상이고 다른 하나님을 두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고, 하나님의 정체성과 의와 뜻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부르고, 자신이 하나님 부른 것이 온전한 것이라 여기는 것은 십계명의 시작부터 어기는 것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을 온전히 부르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 이라는 말씀에서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인데 그 의미가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스스로 있다는 것은 아주 평범한 말인 것 같지만 절대적인 신성의 상징이다. 모든 만물은 스스로 있을 수 없는데, 스스로 있다고 하신 것은 그가 곧 창조주라는 의미를 뜻한다.


그리고 또 스스로 있다는 것은 ‘풍요의 신’ “바알”, ‘다산의 신’ “아세라”와 같이 무엇을 하는 신이라는 것과 구별된다. 마치 Be동사와 Do동사와 구분되는 것과 같이 명확하다. (교회에 가서 부자되면 하나님께 영광스러운 일이고 그 재물로 주를 위해 살겠다고 기도하면서 그것을 얻기 위해 조심스레 성경을 지키는 신앙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기는 것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정체성과 의는 존재론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지,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면 무엇을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생각은 하나님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의미다.


따라서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를 때 구원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은 여호와 곧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고 존재의 신으로 부를 때 온전하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는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들이 하나님을 부르는 것과 완연하게 다른 이름이고, 다른 부름이다.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스스로 있다는 것처럼 절대적 신성에 관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라는 것은 행위를 의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이유이고, ‘네가 어디에 있느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와 같이 사람에게 물으시는 이유다.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기도, 성경 보는 것, 전도하는 것, 봉사 포함)을 하느냐?’가 관심이 아니라 “너에게 나는 누구냐?”, “너는 내가 의도한 존재(자리)냐?”를 보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오직 그것 뿐이다.


반면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자기 행위에 대하여, 자기 육신의 삶을 보전하고 축복하고 세상이 가치를 부여한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메뚜기 떼와 같이 절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다. 교회가 가르치고,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내용들이 하나같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평안한 육신의 삶을 구하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성경을 지키는 <행위>를 드리려 하며,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축복을 얻을 수 있는 행위를 효율적으로 할 것인지 연구한다.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구원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주신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아는 사람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부르면 그가 누구든지 구원을 베푸실 것이라는 말씀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알고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본성이 되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특히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부를 수는 없다. 따라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의도한 관계가 형성되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부른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신 부름에 응답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부르신 것에 답한 적도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은 여호와라는 신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란 신이 그 아들을 인류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보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이 존재의 신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세상의 영광을 구하고, 세상의 문제 해결을 구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다. 하나님을 모르는데 하나님을 부를 수는 없다. 결국 하나님을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누구라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을 아는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하여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하나님과 사람이란 존재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가 어떤 의미인지를 아는 사람이어야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의미가 있다.


요엘이 말하는 “누구든지”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떤 신인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무엇인지, 사람은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은 목적이 무엇인지,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아는 것이 구원의 조건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을 연예인과 같은 유명인과 같이 자신과의 연관성 없이 부르는 것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 말씀은 메뚜기 떼와 같이 대중이 하나님의 의라고 믿던 신앙은 재앙임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여 실상은 여호와의 날이지만 스스로는 자신이 재앙과 같은 신앙을 좇았다는 절망적인 어두움과 캄캄한 날을 마주하고, 그 어두움 속에서 탕자와 같이 하나님께 돌아오고, 하나님은 그를 회복시키시고, 이어 하나님의 신이 임하고, 그 신의 감동을 인하여 자신의 의로움이 모두 종말을 맞는 여러 여정을 거친 사람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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