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 3:1-8) 하나님 심판의 대상 -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엘 Date : 2020. 7. 18. 15:12 Writer : 김홍덕

이렇듯 구원은 가볍게 여길 일이 아니다. 온전한 구원에 대하여 한 번 더 정리하고 요엘서 3장이 말씀하시는 심판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정리하면, 구원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팔아먹거나 구원이 쉬운 것이라는 의미도 모른 체 그저 쉬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다시 구원을 얻을 기회를 상실하는 것이고, 근본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자 자기 만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구원의 기회를 상실한다는 것은 구원을 쉽게 생각하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증거가 자기 안에 없는데 단지 교회에 다니고 교리에 따랐다고 구원을 받았다 여기고 있으면 구원을 받지 못했는데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온전한 구원을 얻을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된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명명백백하게 구원 받은 증거를 말씀하시고 있는데 그 증거가 자기 안에 있지 않는데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 맘대로 정의하는 신적인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고, 자기가 그렇게 설계한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은 자신이 만든 하나님, 자기 하나님이니 그것이 바로 손으로 조각한 우상이고 그것을 섬기니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자신에게 있을 일은 성경에 넘쳐나지만 다들 눈 감고 귀 닫고 있다. 우선 요엘서에서 말씀하듯이 자기 해와 달이 어두워진 날이 있었는지, 그리고 대중적 신앙이 자신에게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에서 돌이킨 삶이 있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어디 이것 뿐인가? 또 하나의 예를 들자면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의 대화에서도 예수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 예수님이 주시는 물(말씀)을 구하고 그것을 먹었다면(자신의 것이 되었다면) 자기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영원히 솟아날 것이라고 하셨는데 그런 변화와 능력이 자기 안에 없다면 당연히 예수님이 주시는 말씀을 구한 적도 없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절대로 구원을 받았다고 할 수 없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네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많은 말씀들이 있지만 이 예수님의 말씀은 구원 받은 사람의 상태가 어떤지 보여주는 아주 선명한 말씀이다. 자기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생수와 같이 솟아나지 않는다면 구원 받은 사람이 아니거나 성경을 자기 편리대로 해석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선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물론 성경을 편리로 해석하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자기 심령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이 샘솟듯 하는지를 반추해 보면 자신이 구원을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메뚜기 떼와 같은 대중적 신앙이 자기 영혼의 재앙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서 시작하여 맞이한 어둡고 캄캄한 날을 지나 하나님의 회복과 성령의 강림으로 인하여 지난 날 자기 삶의 해와 달과 같은 자기 의로움 위에 선 자기 세상이 종말을 맞이한 사람이 되어 하나님을 존재의 신 여호와로 부르는 남은 자들의 것이다. 


그런 사람, 곧 구원을 받은 사람은 여호와의 신 곧 성령이 임하신 사람이므로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성령으로 잉태된 생명이 주는 본성이 자기 삶을 늘 이끌어간다. 본성은 마치 샘물과 같아서 어느 순간이라도 항상 그 본성대로 나온다. 즉 그리스도의 본성이 늘 동일하게 표현된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주시는 물을 먹고 속에서 생수가 넘치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면 자기 삶이 이와 같음을 부인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당연히 구원 받은 것이 아니다.


구원이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요엘 3장에 나오는 심판의 대상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심판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있다.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이 심판을 교회에 다니지 않으면, 또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이 육신으로 겪게 되는 일로 여긴다. 


요엘 3장에서는 구원을 얻은 사람을 괴롭힌 그간의 이방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어진다. 이것은 육신의 혈통으로써 어떤 민족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역사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민족의 전쟁도 결국 자기 안에 있는 세상의 가치관이라는 이방민족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져야할 가치관의 전쟁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요엘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 심판하는 대상 역시 구원 받은 사람 안에 있었던 이방민족과 같은 자아와 자기 의로움이 구원 받은 사람 안에서 어떻게 처리되는지에 대한 말씀이다.


구원은 육신의 생명의 갱신이나 변화가 아니라 육신은 동일한데 그 육신의 하늘이자 의로움이 하나님의 의로 바뀌는 내적 변화인 것은 틀림이 없다. 거듭나는 것을 모태에 들어 갔다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것이다. (요 3장)


그렇다면 구원 이전의 억압하던 주체 역시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속사람 안에 있던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이 육신이 묶인 것을 구하신 것이 아니라 육신의 삶을 주관하는 삶의 목적이 바뀌는 것에 있으므로 구원 이전에 우리를 사로잡아간 곳은 바벨론이나 앗수르가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을 섬기며 살던 삶이다.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기 전이나,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하며 하나님을 믿는다고 여긴 세월이나 동일하게 구하고 세상의 평안과 영광과 그 가치를 기준으로 하나님의 가치를 가늠하며 갈구하던 그 갈급함이 바로 우리를 사로잡아 간 주체였고, 우리의 구원은 바로 우리의 삶이 그런 가치관과 안목과 삶의 목적에서 하나님의 의 안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구원의 본질을 알지 못하면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대상을 다시 눈에 보이는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것을 방해하는 사람, 교회에 다니지 않고 여러가지 부정을 자행하는 사람을 이방인이라 칭하고 구원이 없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은 기독교 신앙 안에서 아주 정설적인 신앙관이다.


그러나 구원은 영적인 거듭남으로 생각하면서 육신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이방인이라 여기고 심판은 육신의 일에 재앙과 같은 일이 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짝이 맞지 않는 논리다. 구원이 영적인 거듭남이라면 이방도 당연히 영적인 이방이어야 한다. 육신으로 사람을 이방인으로 취급하려면 거듭남은 모태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는 이방은 육신으로 이방인 사람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던 세상적 가치관이다. 이것이 인정이 되지 않으면 성경을 이해하는 것은 아주 어려워진다. 구원이라는 것이 하나님과 다른 의를 자신의 의로 삼고 살던 삶, 애굽과 같은 세상의 가치를 좇아 사느라 위로 올라가야 이긴 자가 된다는 생각에 종과 같이 사로잡혀 살던 삶에서 구함을 받아 자유하게 되는 것이 분명한 것이라면 당연히 이방과 심판의 대상도 자신을 종으로 삼았던 세상적 가치관이어야 하는 것이다.


(계속)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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