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 하는 부모, 순종해야 하는 부모)


바울사도의 권면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 이것을 읽다가 보면 이 말씀의 주된 대상이 누구인지를 잊기 쉽습니다. 이 말씀들은 에베소서를 시작할 때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자와 그냥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분명히 다릅니다. 방언하는 자나, 기도로 병고치고 돈 받는 자나 신학교 나온 사람은 더더욱 아닙니다.


이 말씀은 바울사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는 안목과 밝음으로 볼 때 신실하다고 여기는 사람들, 하나님의 예정하심에 속한 사람, 성령의 인치심을 받은 사람, 전에는 영적인 이방인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실한 성도들에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가진 생명으로 사는 것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고 예수 믿으니 이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신실한 너희 안에 있는 생명이 너희 삶을 이렇게 이끌게 될 것이니 너희 삶이 이렇게 이끄심을 받거든 그것이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 아니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인생에 대한 행위 규범을 명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생명이 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방향이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도록 행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어떠한지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도 이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앞서 아내와 남편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는 부모를 떠나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또 공경하라고 합니다. 어릴 땐 공경하다가 결혼할 때는 떠나라는 이야기일까?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면 안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은 성경을 그렇게 보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문자대로 지켜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설마 싶은 그 관점에서 성경을 보고 있는 것임을 증명하기도 합니다.


어리다는 것은 육신에 관한 것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자녀라고 하는 것은 영적 생명에 있어 자신에게 생명을 주신 분을 의미합니다. 이는 당연히 하나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고 바울과 디모데의 관계와 같이 영적으로 자신에게 삶의 의미를 알려주기 위하여 육신으로 수고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즉 영적으로 상대적인 자녀는 자신에게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인생의 의미를 알게 하신 이에게 순종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부모가 시키면 다 자식을 위한 말이니 그냥 순종하라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아내를 맞이하기 위하여 부모를 떠난다고 하는 것은 이와는 다른 개념입니다. 이때 부모는 자신의 이전 관습, 이전 세계의 가치관을 떠나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본토 아비 친척집을 떠나라고 하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아비 데라도 나중에 갈대아우르를 떠남 (창 11:33)) 이로 볼 때 이 부모 또한 육신의 부모를 한정하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경에서 생명과 관련한 모은 것과 계보는 단 하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어떻게 나타나고 이어지느냐의 관점에서 말씀하시는 것이지 육신의 어떠함에 관한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육신의 행위로 의로워지려는 사람들만 성경 말씀을 행간을 보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 보고 육신으로 성경을 지켜내고, 단어 그대로 보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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