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2장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6. 18. 10:49 Writer : 김홍덕

에베소교회는 표면적으로 이방인과 유대인이 함께 섞인 교회로서 이들간의 갈등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사실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는 교회가 세상의 가치관을 혼합하는 것과 함께 어디를 가나 바울 사도를 괴롭히는 문제였습니다. 또 한가지가 있다면 바울 사도를 사도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편지의 머리에 <그리스도 말미암아 사도가 된 나 바울>이라는 것을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엡 2장에 나오는 둘은 표면적으로 볼 때는 이방인과 유대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다수의 신학자들이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아마 그것은 역사적으로는 그런 문제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습니다. 굳이 그 시대가 아니더라도 어떤 집단이든 2개의 다른 성격을 가진 계층이나 사람들 사이의 갈등은 본능적인 것에 가까우니까요. 


그렇다고 이것이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쓴 내용의 본질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옥중서신이자나요? 옥중에서 그런 것이나 걱정하는 수준의 바울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보는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의 갈등이라는 것은 사람의 출신이 어디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갈등의 내면이나 중심을 보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보는 것은 결국 신앙의 형식과 내용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의 많은 교회들에는 유대인 출신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대표적으로 할례를 요구하는 일이 일상이었는데,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는 할례를 권한 반면 디도에게는 받지 않아도 된다고 권면하는 등 각 사람의 형편에 맞게 권면했지 그것이 "꼭 이래야 한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에게 할례와 같은 것은 다 신앙의 형식에 관한 것이었을 뿐이었기에 어떤 이들에게는 그 형식이 필요하였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것이 필요치 않았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재미있는 예로 골로새서 마지막 문안에 나오는 유스도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그 사람이 할례당이라는 것을 밝힙니다. 그렇지만 그가 자신의 복음을 위하여 아주 유익한 사람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압니다. 사람을 볼 때도 그 사람의 외모와 출신이 그 사람의 정체성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사회적인 비판가나 사상가들이나 때로 CEO와 같은 이들이 사람을 그렇게 보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일면 그렇게 보이는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만, 그들이 추구하는 것 자체가 세상에 있는 것에서 사람의 행복과 성공을 찾는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사람이 생각하는 꿈을 이루는 것이나, 회사가 추구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겉모습만 보는 것이 아니라는 식이지요. 결국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면서 다만 그 과정에서 사람을 외모로 보지 말자는 식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외모와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는 것은 아주 중요한 신앙의 걸림돌입니다. 바울이 주시하고 있는 것은 사람을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어보는 사람 안에 있는 안목, 그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람이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를 본질로 아는 것은 이 눈에 보이는 물질과 사람의 육신이 어떤 이유에서 존재하는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몸과 세상과 같은 이 현상계는 다 하나님의 의와 마음을 표현한 형식입니다. 그러니까 본질은 사람을 만들고 또 세상을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마음, 곧 하나님의 말씀과 의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막힌 담이란 바로 그 둘의 경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운명하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찢어졌다고 하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 휘장과 바울이 말한 담은 같은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담이 아니라 어떤 이유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지 못하는 이유 그것이 바로 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담과 유대인과 이방인의 갈등은 또 어떤 관계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에베소의 일부 교인들이 이방인과 유대인이라는 이 두 계층 사이에 갈등이 있었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가 가진 본질적 정체성을 외면했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의 외모가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풍성하시기에 다양한 사람으로 사람이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니까 사람의 다름을 신앙의 차이로까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문제의 근원은 이방인과 유대인과 같은 외면적인 문제가 둘 이상으로 구분된 것이 하나가 되게 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육신 가진 삶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하나가 되지 못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내용과 사람이라는 본질이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이 만나야 할 자기 창조주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예수님의 피로 하나가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휘장이 갈라지므로 대제사장만 만날 수 있다고 여긴하나님을 누구나 만날 수 있는 하나님이 되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 사람이라는 이 형식이 하나님의 의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둘이 하나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이 하나됨을 알게 되면 이방인이든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그런 사람의 외관적 정체성이나 할례를 받았느냐 아니냐와 같은 것으로 사람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예수님이 보여주신대로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나면 오히려 하나님 성품의 풍성함으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라는 이유로 헬라인이라는 이유로 또 할례를 받았다는 이유로 또 할례를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서로 용납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그런 다양함은 곧 하나님의 풍성하심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유스도나 또 심지어 주인의 돈을 훔쳐 달아난 오네시모와 같은 사람도 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으로 수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둘을 하나로 하시고자 한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과 사람의 삶, 그것 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가 되고 그 둘이 하나가 된 존재가 그리스도시며, 그 그리스도를 보내서 하나님의 뜻과 하나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하나가 되게 하시는 구원,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회복된 사람이 되게 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말씀하시는 유일무이한 둘이 하나 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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