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받은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본능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5. 25. 10:09 Writer : 김홍덕

<구원을 받은 사람이 죄를 짓는가?> 하는 문제의 답은 “아니요”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지 사람의 행동을 기준으로 생사화복을 결정하는 Do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여호와라 부른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라는 것을 알고 믿는다면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이의가 있다면 그건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지도 않는데 어떻게 믿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자신을 정죄하고, ‘이런 꼴로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할 수 있겠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시는 기준과 다르게 사람을 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는데,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여 자기의 기준에 따라 선과 악을 판단하는 선악과를 먹고서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는 육신을 가진 자신과 모든 사람을 부정하고 부끄럽게 여긴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한 정체성을 떠나거나 부인하는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인 반면, 사람은 자신들의 행동을 기준으로 죄를 가늠하다 보니 구원의 여부와 관계없이 늘 죄를 인지하고서 그것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행위로 짓는 죄는 정확한 규범이 없다. ‘간음’에 대한 기준도 나라마다 다르고, ‘살인’이라는 것도 정황에 따라 다르다. 하나의 행동에 모든 인류가 공통적으로 적용하는 행위 규범은 거의 없는 것이다. 규범이 없다면 죄도 없는 것이다. 


다만 자기가 속한 사회와 국가와 문화에서 정한대로 그것에 순종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은 지키면 좋고, 지키지 못했다면 자기가 속한 나라와 사회의 법대로 책임을 지면되는 것이다.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가 속한 사회가 경멸하는 짓을 해 놓고 하나님이 다 사하신다는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들을 하면 안 되는 것이다.(하긴 그건 자유지만, 분명한 것은 구원을 받았다면 그럴 리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이다. 하나님이 가지신 죄와 사망의 법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와 창조하신 목적을 자기 운명과 삶의 목적과 의미로 삼느냐 아니냐? 그것이다. 행동에 관한 것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사회의 법에 따르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정한 가치관에 의한 법으로 인하여 죄가 된 것은 그 법에 맞게 벌을 받거나 용서를 구하면 되고, 하나님 앞에 죄는 하나님의 법에 따라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존재의 법이다. Be or Not이다. 그 존재냐 아니냐? 그것뿐이다. 행위에 관한 것은 큰 죄가 있고, 작은 죄가 있을 수 있다. 행위의 크고 작음이 있기 때문이다. Have에 관한 것 역시 같다. 돈이 없다는 것은 죄인과 같은 삶을 강요받게 되는 것이 그렇고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그렇다. 하지만 존재의 법은 단순하다. 그것이냐? 아니냐? 그것뿐이다. 사람이면 사람이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반은 사람 반은 말과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 동물을 상상한다는 것은 행위와 소유에 관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서 비롯되고, 그런 사람들의 가치관 안에서 통용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에는 그런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이냐? 아니냐? 그것뿐이다. 살았거나 죽었거나.


그러므로 하나님의 법에 의하여 죄가 사하여진 구원을 받았다고 한다면 어중간하게, ‘구원 받았는데 죄를 지을 수 있느냐?’라든가, ‘구원 받은 사람들이 짓는 죄는 어떻게 하나?’와 같은 소리는 다 반인반수를 생각하는 가치관과 같은 것이다. 죄와 하나님을 공로와 소유, 즉 Do와 Have에 관해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죄는 정체성이 무엇이냐 하는 문제일 뿐인데.


그렇다면 또 한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람들이 행위로 비롯되지 않아도 사람 안에 있는 다양하고 부정한 것에 대한 관점이다. 예수님께서도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한 것이고, 사람을 미워하면 살인한 것이라고 하셨듯이 사람 안에 있는 그 마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을 심히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들 양심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 문제는 신앙에 있어 아주 중요한 문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기초 중의 기초다. 왜냐하면 이것도 역시 사람을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부정한 생각을 늘 가지고 있고, 언제라도 그런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마음에서 일어나고 때로는 그것을 행동이나 말로 표현하는 사람의 본성을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왜 부정하게 여기는가 하면 그것이 결국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또 때로는 실정법이나 성경을 어기는 행동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앙은 부정한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면 온전하지 않다. 노아의 방주가 그렇고 고넬료를 찾아가는 베드로의 일이 그렇다.


이 사람의 본성에 관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이 하나 있다. 이 사람의 본성을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문제이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자기 본성을 태어날 때 선택했을까? 그런 사람이 없다. 삶이라는 자체가 자기도 모르게 주어진 존재가 어느 겨를에 자기 본성이나 삶의 성격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자기 뜻으로 걸어 들어온 인생이 아닌데. 사람이 가진 모든 본성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을 그렇게 만들고 좋아하셨다. 그것도 심히.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본성은 그 어느 것도 부정한 것이 아니다. 그것이 부정하게 여겨지는 것은 사람의 안목으로 볼 때 부정한 것이지 선하신 하나님의 품속에서 나온 것을 사람이 부정하게 여기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베드로의 환상에 하나님은 ‘내가 정하다고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하느냐?’고 반문하신다.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행 10:15)


또한 바울 사도 역시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의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딤전 4:3-5)

라고 하셨다. 사람이 가진 모든 것,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상이 다 선한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면 모르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다 선하고 온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사람 안에 있는 여러 가지 본성과 욕망들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은 그 본성과 욕망이 목적 아래 있지 않고 자기의 주관 아래 있기 때문이다. 아담 역시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드러낼 존재의 자리를 벗어나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니 하나님이 주신 자신의 육신과 인생이 감사할 것에서 벗어나 부끄럽고 감춰야 할 것으로 바뀐 것이다. 몸이 바뀐 것이 아니라 안목이 바뀐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가진 본성은 그 어떤 것도 부정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사람이 가진 그 어떤 것도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없다. 날카로운 것은 위험한 것이지만 칼이 날카롭다고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날카로움이 목적대로 사용되지 않을 때 죄가 되는 것이다. 성욕을 예로 들면 사람이 성욕을 가진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가진 아들들이 나오기를 바라시는 마음으로 사람을 만드신 그 하나님의 성품이 있으셨기에 만드신 사람 안에 자기 종족을 보존하고 나타내려는 본성이 있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성욕이 부모가 가진 삶의 뜻,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이 자기 안에 있어 그것을 또 표현해갈 아들을 얻기 위한 결혼 안에서 표현되는 것은 표현될수록 선하고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을 벗어나 성욕 그 자체를 자기의 쾌락을 위해서 즐기거나, 또 하나님의 뜻은 알지도 못하면서 단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 재물과 권세를 이어갈 아들을 얻기 위하여 아내를 취하는 것들이 죄인 것이다. 


즉 성욕 자체가 부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모든 본성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두신 뜻, 즉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과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닌 자기 육신,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아는 가치관 안에서 누리고 주관하여 할 때 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당연히 사람이 가진 본성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모르는 것이다. 즉 존재의 정체성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구원받은 사람의 가치관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구원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을 받았는데도 사람 안에 부정한 본성이 있다고 하고, 그것은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그러니 그 질문에 대한 온전한 답은 ‘구원을 받지 못해서 그런 염려를 하는 것’인 것이다.


따라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사람이 가진 모든 본성이 하나님의 목적에 수렴하게 된다. 생명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개가 가진 모든 유전자와 본성은 자신이 개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지 고양이가 되려고 개의 본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개가 개다운 것이 선이다. 개가 고양이 짓을 하면 거짓이고 외식이다.


그러므로 자기 안에 있는 본성이 부정하게 여겨지고 있다면, 또 때로 ‘그러면 구원만 받았다면 마음껏 성욕과 같은 본성을 표출하고 기분 나쁘면 아무나 때리면서 살아도 되나?’라고 묻는다는 것은 ‘나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입니다.’라고 선전하고 다니는 것과 같다. 


구원받은 사람은 그 삶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은 무엇을 해도 선하다. 예수님께서 당시의 율법을 어기면서 안식일을 범해도 선하신 것이 그것이다. 당시에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은 지금으로 치면 현행법을 어겼다는 것이다. 그래도 예수님은 선하셨다. 그와 같이 구원을 받은 사람은 무엇을 해도 선하다. 왜냐하면 포도나무 가지가 포도나무 안에서 하는 ‘무엇’이라는 것은 포도 맺는 것에 관한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이 구원받은 이의 본성 안에 있는 ‘무엇’은 자기 하고 싶은 것, 자기의 본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표현하는 것이 ‘무엇이라도’ 할 때 그 무엇이다. 생명이 그것인데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인생을 주신 목적을 아는데 살면서 육신의 가치관, 세상의 가치관에 관한 법을 어기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육신을 가진 한계이다. 하지만 한계가 아니라 그것이 목적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것이 아닌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사시다보니 세상이 가진 가치관, 하나님이 보실 때 죄와 사망의 법인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이 죄인이 되었는데 그 법에 대해서는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다. 그러니까 육신의 일은 이 육신이 속한 세계에서 정한대로 따르고 순종하는 것이다. 그게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십자가의 비밀인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삶은 구원을 받아봐야 하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구원은 신앙의 목표가 아니라 시작이다. 생명이 나면서 삶이 시작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구원을 받은 후에 왜 죄를 지을까?’, ‘구원 받았지만 사람 안에 부정한 본성은 그대로지 않는가?’와 같은 의문은 구원받지 못한 이의 의문이다. 그러므로 그 의문들의 답을 알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정체성과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이 먼저다. 그러면 모든 것이 그야말로 빛이 비췬 듯 밝히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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