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 받았으면 맘대로 살아도 될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5. 24. 15:05 Writer : 김홍덕

많은 기독교인들이 가진 의문이지만 어지간한 교회에서는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는 의문이 있다. 그것은 <“구원 받은 다음에 지은 죄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어떤 해답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명쾌한 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드물 것이라 생각된다.


특히나 이 블로그에서는 죄가 행동에 관한 것이 아니라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고, 존재가 회복되면 죄가 없는 인생으로 살게 된다고, 살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해 오고 있기 때문에 ‘그럼 구원만 받으면 어떻게 살아도 된다는 말이냐?’는 질문을 받기도 한다. 안타까운 것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답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생명의 법으로 설명한 것에 대한 반문만 하는 것은 대안 없는 비판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의문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이 의문을 원론적으로 정리해 보면, 예수님께서 구원하신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완료형으로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구원을 받았다면 죄와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 5:24)

그리고 무엇보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 8:1-2_

라고 말씀하시고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 말씀들은 현재 자신의 행동이나 삶이 혹시나 죄를 지은 것이 아닐까 싶거나, 또 정죄를 하거나 받을 일이 있다면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인가 아닌가? 당연히 그런 마음과 생각이 있다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말씀이다. ‘구원을 받았으면 정죄함이 없다는데 구원을 받았으면 맘대로 살아도 될까?’, ‘구원 받은 사람은 죄가 없을까?’, ‘구원 받은 다음에 지은 죄는 어떻게 될까?’와 같은 생각과 의문이 든다면 그건 한 마디로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이야기하거나 가르치고 배우면서 ‘구원을 받았어도 사람이 연약하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에 교회에 와서 늘 기도하고 회개하며 또 말씀을 듣고서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변명하고, ‘예수님께서 세족의식을 행하시면서 “목욕한 자도 발은 씻어야 한다.”고 하셨지 않느냐?’와 같은 괴변으로 의문을 침소봉대하려 한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복음] - (요한복음 13:1-11)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다.

[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 성전의 물두멍과 세족의식



백번 물려서 그것이 이해가 되고, 또 항상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야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마음에는 의문을 가지고 있으면서 오히려 ‘의심하면 믿음이 없는 거야!’, ‘보지 않고 믿어야 해!’라고 협박하고 자신을 억제하고 신념으로 믿고 있으면서 해결되지 않는 의문을 안고 사는 것은 정말로 답답한 일이다.


이런 모든 문제의 근원은 의외의 것에 있다. 구원 받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어떻게 되느냐나 아니면 그럴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모든 문제는 <죄가 무엇인지?>, <죄란 무엇에 관한 문제인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죄와 구원의 정체성, 곧 개념이 잘못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이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무엇인지 구원이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왜 모르느냐 하면 존재의 하나님 앞에서 행위의 죄를 논하고 있으니 당연히 모르는 것일 수밖에. 아들은 아버지의 혈통이란 존재의 정체성에서 비롯된 것이지 공로나 소유의 정도에 따라 아들이 되고 종이 되고 그러는 것이 아님은 알지만 그것이 하나님과 사람도 그렇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구원은 생명에 관한 것이다.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것이다. 거듭 났다는 것은 생명에 대한 용어고 개념이다. 생명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특히나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생명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하시는 생명이 되는 거듭남을 말한다. 이것은 육신의 생명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그 목적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목적 아래 자기 정체성을 두고 있다면 산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할 때 선하고 악한 것을 찾아서 그것대로 살려고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망인 것이다.


생명이란 것은 한번 나면 변하지 않는다. 고양이로 나서 개가 되는 것을 본적 있는가? 남자로 나서 여자로 성전환을 한다고 해도 사람으로 났다는 것은 틀림이 없고, DNA도 변하지 않는다. 즉 생명이란 나면 그것으로 언제나 그 생명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이 거듭남일진데 거듭난 생명이 이전 생명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구원받기 전, 죄와 사망 가운데 있다가 거듭나서 구원을 받았는데 어떻게 다시 죄인이 될 수 있으며 죄에 대하여 염려하겠는가? 죄가 정체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행동에 관한 문제라고 생각해서 그럴 수는 있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그럴 수 없다.


바로 여기에 사람들이 구원 받은 다음에 죄를 짓는 문제에 대한 의문이 있는 것이다. 즉 죄를 행동에 관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나 행동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 중심을 보시는 분, 곧 사람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인지를 보는 존재의 신이신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어떤 행위를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또 어떤 행위가 죄가 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죄를 생각하고 구원을 생각하니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자기 존재의 자리를 떠난 것, 곧 하나님과 사람의 정체성에 맞지 않는 것을 자기 의로 삼고 있는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 앞에서 공로와 행위의 결과가 죄가 되는지를 늘 신경 쓰고 걱정하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죄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구원이 뭔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은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구원 받은 다음에 죄를 지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행동으로 죄가 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람의 육신은 그런 행동을 할 수밖에 없기에 그런 행동을 한 자기 자신을 알기 때문에 ‘구원 받은 사람이 죄를 짓는가?’하는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아니 사실 그것은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다. 앞에서 바울 사도의 말씀을 보지 않았는가? 구원 받은 사람에게는 정죄함이 없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구원을 받은 사람은 아무런 죄도 짓지 않는가? 그렇다. 예를 들어 개로 태어나는 것이 구원이라는 세계가 있다고 치자. 한 강아지가 태어났다. 그 강아지가 다시 고양이나 말이 될 수 있는가? 그러니까 죄를 지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 죄와 구원에 관한 것이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이 생명의 주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이 행동으로 짓는 죄는 동일한 행위에 대해서도 죄가 되거나 되지 않거나 한다. 그것은 그 사람의 육신 살고 있는 문화권에서 정의를 내린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가 아니라 사람이 말하는 죄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 받은 사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인간의 자리를 회복한 사람도 육신은 그 문화권이 정한 법에 따라 죄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 말하는 죄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가 아니다. 


예수님도 그 당시 문화권에서 규정한 죄에 의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자기가 사는 문화권에서 규정한 실정법으로 죄인이 되지 않으려 하거나, 영화 <밀양>의 유괴범처럼 ‘하나님께서 죄를 사했으니 자신이 죽인 아들의 엄마에겐 사과할 것이 없다.’는 식으로 살면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예수님도 하나님 앞에서 온전하고 흠이 없으신 분이지만 세상의 법이 십자가에 못 박으려하는 것에 순종하시니 하나님의 아들이심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어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십자가의 도를 따른다는 사람들이 사회와 문화가 터부시하는 것을 범하고 <하나님의 일>을 운운하며 뻔뻔하게 있는 것은 후안무치한 신앙이다. 교회 세습과 같은 것이 그렇고, 목사가 여성도와 추문이 일어났는데도 버젓이 새 교회를 세우는 것이 그렇다. 진정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오해라도 물라나고 죄인의 자리에 가는 것이 옳은 것이다. 그게 구원받은 증거이다. 자기가 아무리 억울한들 예수님만큼 억울할 리는 없을 테니까?



다음 편에 <구원 받은 사람 안에 있는 사람의 본능>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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