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에 대한 단상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6. 19. 10:15 Writer : 김홍덕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 15:22)


유명한 말씀입니다. 신앙이란 자고로 순종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가 하는 일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라고도 말을 합니다. 하지만 물에 던져진 생쥐에게 있어 순종은 어떤 것일까요? 물에 던진 상황에 순종하는 것이 순종일까요? 아니면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순종일까요?


제가 아는 많은 사람들 중에는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문제가 많고, 또 말씀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것이 없다는 것은 동의할 뿐 아니라 한탄을 하면서도 그 교회가 시키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순종일까요? 그러니까 물에 던져진 생쥐는 물에 던져진 자신의 상황과 그럴 수밖에 없을 정도로 나약한 자신의 운명에 체념하듯 순종하는 것이 순종일까요? 아니면 생명으로서 살고자 하는 본능에 따라 살려고 발버둥치고 물 밖으로 나오려고 노력하는 것이 순종일까요? 그러니까?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바른 길을 가지 않고 있다고 느낄 때,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하여 자신을 헌신할 노력을 것이 아니라면 떠나는 것이 순종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순종을 <시키는 것을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외부에서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잘 따르는 것을 순종이라고 여긴다는 것입니다. 마치 물에 던져진 생쥐가 외부에서 자신에게 강요한 상황에 순종해야 순종이라고 여기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언뜻 생각해도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순종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순종이라는 것은 자기 안에서 나오는 것에 대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안에서 나오는 뭔가가 있도록 어떤 것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이지요. 땅이 농부가 뿌린 씨앗을 받아 들이면 그 씨가 땅 속에서 자라 흙이 생명이 되는 생명의 본성,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본성에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순종이기에 먼저 듣는 것이 있고, 그리고서 그 들은 것이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생명으로 나타나는 것에 순종하는 것이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순종이라는 것은 사람 밖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순종이 아니라,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된 그 생명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께 할 가장 기본적이고 유일하며 가장 큰 순종은 사람을 만드신 목적,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순종하면 그 목적이 자기 생명이 되고, 그 생명이 자기 안에서 발현되는 것에 순종할 수밖에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밖에서 요구하는 것에 순종하는 일에는 언제나 갈등이 있고, 또 편차가 있습니다. 어떤 것은 하고 싶거나 하기 쉽고, 어떤 것은 반대로 하기 싫은 것이라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하는 것이 있고, 또 어떤 순간-힘이 있고 상황이 될 때-에는 어렵지 않지만 병 들고 힘이 없을 때나 또 정신력이 약해서 의지를 북돋우기 힘들때는 하기 힘든 것이 바로 사람 밖에서 요구하는 것에 대한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때로 순종이 어렵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자기 밖에 있는 것에 대하여 순종하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을 가르켜 예수님께서는 외식하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안에는 그것을 할 마음이 부족한데 몸으로만 억지로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릇(흉내)이라고 하셨습니다. 자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은 몸으로 해 내었다고 해도 순종이 아니라, 외식일 뿐인 것입니다.


반면에 사람 안에 있는 본성에 대한 순종은 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로 난 사람은 아무리 노력해도 소변 볼 때는 서서 누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안에 본성이 그런 것이지요. 그리고 모든 생명은 위기에 처했을 때 살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물에 던져진 생쥐는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의 본성이 그렇기 때문이지요. 그렇다면 교회가 말씀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것이 없는데 교회에 순종하는 마음으로 다니는 것은 어떤가요? 그것 역시 순종이 아니라 그냥 외식일 뿐입니다. 자기가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이나, 육신으로 살 동안 하나님을 빌어 육신의 일의 평안을 구하는 목적을 위하여 외식하는 것일 뿐, 순종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불순종의 자식입니다.


물에 빠진 생쥐가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순종일찐데,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들을 수 없는 교회에 다니게 된 상황을 받아 들이는 것이 순종이다? 그것이 바로 불순종의 아들입니다. 순종의 처음이자 마지막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목적, 그 하나님의 말씀과 의가 자기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에 거역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순종의 모든 것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 그 DNA를 거역할 수 있는 생명체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순종하라고 하셨다면 언제나 순종해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을 위하여 노력한다? 웃기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오직 <Be or Not>입니다. 노력해서 어느 정도는 하고 안 되는 것은 구하거나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신 것은 하나님의 세계가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언제나 순종하는 사람이거나 아니거나 그 뿐입니다. 삶의 많은 부분을 순종한다? 그건 다 불순종의 자식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이란 반인반수가 아닙니다. 일정 부분-그것이 많거나 적거나 무관하게-은 되는데 어떤 것, 어떤 상황에는 안 된다? 그런 순종이나 생명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순종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또 순종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생명이 되어 그 생명으로 살거나 아니거나 그 뿐입니다. 노력하고 있습니까? 그럼 순종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교회가 가르쳐 주는 것이 없는데 다니고 있습니까? 그것은 순종이 아니라 방종입니다. 진정한 순종을 이야기 하고 싶다면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야 합니다. 그 나라의 의가 내 생명이 될 때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고, 그 생명의 본성이 나로 하여금 그것을 어기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생명으로 살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순종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사람, 하나님을 어기려 해도 그럴 수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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