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과 교회의 변질 9 – 신앙의 변질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8. 7. 5. 15:49 Writer : 김홍덕

그러므로 타락이라는 것은 근원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벗어난 것을 말한다. 따라서 변질이라는 것은 근원적인 타락을 벗어나서 생명을 맛본 상태에서의 변화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목적을 벗어나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생각하기에 그 성공을 담보하기 위하여 기도하고 전도하는 것을 포함하여 성경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신앙과 그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바로 타락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많은 교인을 바탕으로, 또 신학적 근거를 내세우는 우리가 아는 교회, 그리고 자기 종교를 기독교라 말하며 일요일에 예배 드리러 가는 사람들과 그 교회는 자신들을 정통이라 말하고 그 신앙에서 벗어나면 타락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이 믿는다는 것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은 크고 넓은 문으로 간다는 것이고, 신학이라는 것은 성경을 공부하는 수고와 공로를 바탕으로 차별되는 것이니 그것은 행위와 공로의 신앙의 근간이니 그런 가치관이야 말로 존재의 하나님을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으로 의로워지려는 신앙의 본질적 모습이기에 진정한 타락인 것이다.


이러한 타락의 이야기는 이 블로그의 전반에서 우리가 흔히 기독교 신앙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행위 규범적 신앙인지를 늘 언급하고 있기에 타락이라는 것을 정통 신앙에서의 변질이나, 교회가 행위가 사회적 규범이나 법률의 어겨서 비난을 받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 가서 영위하는 사업의 잘 됨과, 건강과 자녀의 성공을 기도하고 그것을 보장 받기 위해서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정하여 교육하고 서로 금기하고 감시하는 그 신앙이 바로 타락한 신앙이라는 것을 설명하므로 타락에 대한 언급은 정리하려 한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변질을 이야기 해 보자 이 주제의 글 5편을 시작하면서 타락과 변질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이는 앞서 대부분의 교회가 지향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크고 위대해지려는 신앙 그 자체가 타락이라고 한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다들 타락이라고 하면 교회가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것과 같은 것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가치관을 가지고 5편 이후의 글을 아무리 읽어 본들 온전한 이해를 담보할 수는 없다.


그러면 변질이라는 것을 어떤 것일까? 이는 딱히 정해진 단어의 정의가 별도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글의 의도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맛보고서 그 생명의 온전함에서 벗어나는 것을 이야기한다. 즉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이후에 변질이라 칭할 수 있는 변화를 보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암호나 비밀과 같아서 거듭난 생명을 아는 사람이어야 이해할 수 있고, 그렇지 않다면 오해의 소지가 많기 때문에 글로 쓰는 것에 대한 나름의 고민이 있었지만 간략하게 정리하고자 한다.


생명이란 날 때부터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생명 역시 그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 여기서 본성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전적 성질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그 ‘다움’은 변한다. 사람도 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개가 되거나 고양이가 되지는 않지만, ‘사람다움’은 다양하다. 교육이나 사회 문화나 자라고 생활하는 환경에 따라 다양하게 변한다. 그런 것이 변한다고 사람이라는 유전자가 변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암과 같이 세포의 이상적 변형이 있다고 해도 사람이라는 정체성의 변화는 없다. 그런 반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람을 두고서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는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신앙이라는 것도 이러한 측면에서 변질을 볼 수 있다. 그러나 흔한 사례라고 할 수 없기에 보편적인 사건과 같이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우선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믿으며, 눈에 보이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순종한 거듭난 생명이 많지 않기 때문에, 그 생명의 어떤 변화를 보편적 가치관 사례로서 말하는 것이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한 이러한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도가 먼저 이해되어야 할지 모른다. 그 하나는 앞서 이야기 한 세상은 그림자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 성품의 다양성이다. 세상이 그림자라는 것은 세상에 있는 것은 본질적 실체가 있다는 것이기에 우리가 살면서 겪는 일들은 하나님의 세계에 본질적인 모습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람다움에 기인해서 사람의 유전적 성질 외에 사람의 성경이나 생각이나 사상이나 이념이나 감정과 같은 것이 사회적으로 볼 때 긍정적으로 변화하거나 부정적으로 변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 변화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에서도 그런 변화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라.>는 말씀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을 났다면 그 생명이 가진 유전적인 본성은 변하지 않겠지만 그 본성에 기인한 그리스도라는 생명의 다움과 장성함이 있고, 반대로 그것에서 멀어져 가는 것도 있어서 이 생명을 한 번 맛보고서 타락한 자들이라는 말씀도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성품의 다양성인데, 사실 이것은 신앙의 타락이나 변질과 같은 주제 하에서 설명하기에는 아까운 것이긴 하다. 사람들이 때로 변질로 여기는 것들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생명 안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풍성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예가 있는데 바울 사도와 함께 여행을 다니기도 한 <유스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할례당이라고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다. 즉 할례를 받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을 육신의 할례가 무의미하다고 선언한 바울 사도가 함께 했다는 것이다. 이는 언뜻 생각하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기만 하면 통일된 생각, 같은 행위, 같은 본성을 가져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에 혼동을 주지만, 하나님의 생명의 다양성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 순종되어 있다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오히려 놀라운 사건으로 다가온다.


이 다양성의 문제는 복음의 신앙,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의 안목 안에서도 상당히 장성한 사람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사람도 어른이 되고 경험이 많은 사람일수록 다양한 사람의 의견이나 성격이나 사상을 잘 수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의 장성함, 하나님의 생명다움이 장성한 사람일수록 더 다양하게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변질되어서 다시 용서받지 못하는 자리에 이른 것도 구분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고(이 거듭남은 교회의 세례 문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 생명이 자라서 그리스도 다움이 장성하여야 하며, 생명의 다양성이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아름답고 놀랍게 여겨지는 자리에 가서야 보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함부로 궁금해할 것도 아니다. 어린아이가 아기가 어떻게 생기는지 물을 때에 커면 알게 된다고 하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다양성이 하나님의 풍성함으로 보이는 장성한 자리에서 보면 양심에 화인 맞은 것, 하나님의 생명을 맛보고 타락한 것과 같은 것이 자연스럽게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변질>이라는 것은 우선 이 글에서 지속적으로 이야기했듯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다음에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변질은 모든 변질적 상황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어떤 관점에서 보면 생명의 다양함이기에 품을 수 있고, 어린 관점에서 보면 품을 수 없기도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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